상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푸드]by 김정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 이상의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날의 바람 때문에 그렇다. 이맘때쯤 불어오는 바람은 지나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나태함을 꾸짖는 알싸함과, 상실감을 감싸주는 포근함을 동시에 주는 묘한 바람이다. 미뤄둔 빨래를 처리하러 빨래방으로 향했던 며칠 전 새벽, 나는 가을 밤바람을 한껏 맞았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나는 원래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휴대폰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찍어봤지만 모든 감흥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았다. 바람 때문이었다. 바람은 사진에 담기질 않는다. 찰나에 가둘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바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휴대폰을 집어넣고 그냥 이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상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에그베네딕트를 소리 내어 말할 때, 우리만의 독특한 억양이 있었다. 오직 나와 그 사람만의 억양.

잃어버린 휴대폰은 결국 찾지 못했다. 택시 기사님께 연락을 취하기 위해 카드결제내역을 확인해봤지만 그 날 밤의 결제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지인이 귀띔하길, 추적을 피하기 위한 일부 악질택시기사들의 신종 수법이란다. 잔뜩 취한 손님이 값비싼 휴대폰을 떨어트리는 걸 확인하면, 일부러 요금을 받지 않고 손님을 하차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택시요금의 몇 배나 되는 휴대폰을 슬쩍.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그 엄청난 기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지인이 몇 있었다.

 

나는 한 동안 휴대폰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돌아올 것만 같았다. 동일한 기계야 세상에 차고 널렸지만, 지난 기록과 기억이 담겨 있었기에 내게는 유일하고 특별한 휴대폰이었다. 언젠가는 바꾸게 될 휴대폰이었음에도 갑작스레 맞이한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거다. 문득, 나는 참 미련이 많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에게도 미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곧장 휴대폰을 사러 갔다. 개통을 시키고 연락처를 복원시키자 낯선 기계는 내 폰이 됐다. 옛 사진도 일부 복원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미진이와의 사진은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상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린 죽이 참 잘 맞는 커플이라 확신했던 적도 있다. 마치 슴슴한 평양냉면과 쫄깃한 제육처럼

새 휴대폰을 사용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전의 휴대폰이 어느 나라의 누구 손에 쥐어져 있을지 가끔 궁금했지만 전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상실은 역시 허무하다. 늘 지니고 있던 휴대폰도, 누구보다 가까이에 머물던 그녀도, 지금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허무함이 예전 같은 슬픔의 감정은 분명 아니다. 이별을 소화시키는 최종단계에 접어들었단 느낌이 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이상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금단현상이 몇 차례 발현되긴 했다. SNS를 찾아보고 Email의 휴지통을 뒤져봤었다. 여행사진을 주고받은 언젠가의 메일을 발견하곤 욱 하고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가, 이내 다운로드 가능기간이 지났음을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으로 대용량파일 압축을 해본다던 메일 속 그녀의 문장이, 당시의 행복했던 순간을 조금 떠올리게 해줬다. 고맙고 또 미안하단 말을 속으로 삼키며 메일을 완전히 삭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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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걸 잘 먹게 되면 다시 이곳에 오자던 약속도, 실내에 갇혀있는 기린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계절이 되면 한 번 더 동물원에 오자던 약속도 결국은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 미진이와 함께 자주 걸었던 어느 대학교의 운동장을 혼자 걷게 됐다. 우연히 그 근처에 가게 된 날 밤, 지랄 맞은 가을바람에 떠밀려 운동장 정문 안까지 들어가 버린 거다. 공놀이를 하고 있는 가족, 농구코트에서 공을 사수하기 바쁜 대학생들, 그리고 트랙을 뛰거나 걸으며 열심히 땀을 빼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트랙을 걸었다. 조명이 밝았기에 어둡진 않았다. 배경처럼 슉슉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속에 미진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몇 번을 두리번거리다, 민망해져선 다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다섯 바퀴째를 걷는데. 

 

미진이가 즐겨 쓰던 샴푸향이 났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설마. 혹시나. 그녀도 지금껏 내 뒤에서 걷고 있었던 아닐까? 진즉 돌아봤으면 그녀를 볼 수 있었을까? 바보 같은 생각을 떨쳐내려 멀리 보이는 철봉까지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래. 지난 연애 속의 나는 언제나 전력으로 달리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빨랐고 그녀는 느렸다. 내 뒷모습을 봐야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그냥 고개를 돌려 뒤를 봐줬더라면, 내 등을 간신히 쫓던 그녀의 힘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 그때 잠시 멈춰서 그저 이 가을밤의 정취를 즐길걸 그랬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정해진 바퀴 수를 채우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음으로 편안한 연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 가을의 바람과 같은 연애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상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집 앞 물웅덩이에서 빛나는 우주를 발견했을 때, 이런 별 것 아닌 발견에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연애.

천천히 마지막 한 바퀴만 걷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스포츠 수건을 목에 걸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였다. 게을러서 살이 찌는 건지 살이 쪄서 게을러지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게으르면 살이 '더' 찐단 사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를 안 해서 연애를 못하게 되는 건지 연애를 못해서 안하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연애를 하지 않을수록 연애를 '더' 못하게 된다. 나도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미진이와의 사진도, 통화기록도 전혀 없는 휴대폰에 새로운 추억을 많이 쌓아나가겠노라 다짐했다. 운동장 문을 향해 걸으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개의 소개팅이 예약됐다. 얼마나 많은 만남을 가져봐야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작은 빠를수록 좋은 거다.

 

그렇게 정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진이였다. 

이별소화레시피

이별을 극복하기 위해 괜찮은 사람과 소개팅을 아무리 해봐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는 고민이 꽤 많다. 그건 사실 당신의 인식보다 그 사람이 괜찮지 않아서, 혹은 괜찮다고 해도 그저 인연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 뿐이니 좌절할 필요 없다.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좋은 사람이란 것이,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줄 치명적 매력을 가졌단 얘긴 아니니까. 당신이 중독된 슬픔의 모양에 딱 맞는 해독제를 가진 이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이란 걸 명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당신의 감정정리를 타인의 힘에 의존해서 하란 얘기가 아니다. 그건 또 다른 허무함을 낳을 수 있단 사실 역시 무시하면 안 된다. 정리는 본인 스스로 하되, 모든 걸 정리하고 난 빈 방을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안 된단 얘기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싶으면, 다시 누군가를 들여놓을 의지를 적극적으로 가져야 청소의 마무리를 더 확실히 하는 법이다.

맛집정보

인디펜던트커피 / 서울 강남구 신사동 523-10 1층. 02-543-7584

을지면옥 / 서울 중구 입정동 161. 02-549-5378 

명일닭발 /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 325-16. 02-429-8548

201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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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보단 불안을 즐깁니다. 요즘남자요즘연애 [소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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