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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평범할수록 특별하다,
그것이 '수퍼 노멀'

by조선일보

재스퍼 모리슨

뉴욕 MoMA가 작품 3점 소장… 삼성 이건희도 감동한 디자이너, 가구부터 식기까지 넘나들어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다. 영국의 재스퍼 모리슨(60)은 그런 역설을 일깨우는 산업디자이너다. 가장 절제된 형태 안에서 가장 충실한 쓰임새를 추구한 디자인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설립 당시 가구 조언을 맡았고,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이 그의 작품 3점을 소장하고 있다. 비트라(가구), 알레시·무인양품(생활용품)을 비롯해 디자인 트렌드를 이끄는 기업들과 협업했다. 그의 2004년작 커피포트를 박람회에서 본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삼성은 왜 이런 물건을 만들지 못하는가"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모리슨은 이를 계기로 삼성의 러브콜을 받고 휴대전화, 냉장고 같은 제품을 디자인했다.


모리슨이 핀란드 생활용품 회사 이딸라와 협업한 식기 세트 '라미' 출시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지난 24일 서울 퇴계로 문화 공간 '피크닉'에서 만난 그는 "짧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꼭 돈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알맞은 가격에 훌륭한 기능과 분위기를 갖춘 물건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했다. 연초부터 이곳에서 열린 모리슨 특별전도 이날 막을 내렸다.


모리슨 디자인의 모토는 '수퍼 노멀(super normal)'이다. 그대로 옮기면 '극도의 평범함'. 화려한 디자인의 홍수 속에서 평범할수록 특별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 내재돼 있다. 이렇게 보면 수퍼 노멀은 '특별한 평범함'에 가까운 의미가 된다.

조선일보

①속이 텅 빈 마지스의 ‘에어 체어’ ②안경을 머리에 걸친 재스퍼 모리슨 ③여러 소재를 사용한 이딸라 식기세트 ‘라미’ ④차곡차곡 쌓이는 알레시의 냄비·프라이팬 ⑤짝수만 넣은 무인양품 벽시계 ⑥빨간색의 농담을 달리한 비트라의 접시. /Walter Gumiero·Elena Mahugo·Nicola Tree·Andre Huber·이딸라·비트라

특별한 평범함이란 즉각적이지 않으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드러나는 것이다. "일본 도마를 쓰면서 깨달았어요. 평범한 사각형인데 양쪽 끝이 둥근 손잡이처럼 생겨서 잡기 편하고, 보관할 때도 도마가 바닥에서 살짝 떠서 물기가 잘 말랐죠. 딱히 그 도마가 좋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면서 어느새 그것만 쓰고 있더라고요." 이와 달리 그저 평범하기만 한 물건은 좋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도, 오래 쓴다고 애착이 생겨나지도 않는다. 모리슨은 "무엇이 수퍼 노멀한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100%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전에 서울의 민속박물관에서 도자기를 보면서 기능에 충실하고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물건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수퍼 노멀이 유명해진 것은 모리슨이 2006년 비슷한 철학을 가진 일본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와 '수퍼 노멀' 전시회를 열면서다. 전시에는 문구용 클립, 플라스틱 양동이 같은 물건들을 자신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 모리슨은 "디자이너로서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익명의 물건들에 끌린다"고 말했다.


모리슨이 여러 차례 언급한 '분위기' 또한 그가 집중해온 화두다. 예컨대 이번에 이딸라와 함께 만든 식기 세트는 세라믹·나무·유리 등 여러 소재를 쓰고 소재마다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게 했다. 모리슨은 "결혼 선물로 받은 식기 세트처럼 다 똑같은 그릇으로 상을 차리던 시대는 지났다"며 "마음에 드는 그릇을 하나씩 사모은 듯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모리슨은 바우하우스 전통을 계승한 디자이너로도 불린다. 올해 창립 100년을 맞은 바우하우스는 간결한 조형미와 합목적성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디자인 학교다. 그러나 정작 모리슨은 바우하우스와 자신의 디자인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당시로선 아주 급진적이었고 대부분 대량생산되지 못했습니다. 내게 바우하우스는 해답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실생활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 저는 그 답을 찾고 있으니까요."


채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