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중퇴 ‘공사판 아지매’, 나이 60에 간호조무사 된 사연은

[라이프]by 동아일보

한의원에서 인생2막 이숙희 씨

20년 간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 생활

현장에선 ‘설비 아지매’로 불려

57세에 초중고 검정고시 통과

온가족이 똘똘 뭉쳐 엄마의 열공 응원


“하이고, 제가 뭐라고, 이렇게 멀리까지…”


그를 수소문해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이숙희(64) 씨가 되뇌었던 말은 ‘제가 뭐라고’였다. 그는 4년 전부터 딸 권기순(40)씨가 원장인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고 있다.


이 씨는 지난해 경상남도가 주최한 ‘인생이모작 성공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우연히 이 수기 ‘굳세어라 숙희야’를 읽고,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한국의 고도성장 시절, 희생만 하고 살았던 우리 누이들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11~12일 경남 거제의 한의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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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한번 침상에 누우면 몸에 닿았던 수건들은 무조건 세탁실로 간다. 그래서 한의원 한쪽에서는 세탁기 3대, 건조기 2대가 쉴새없이 돌아간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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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때는 철저하게 ‘원장 선생님’과 ‘숙희 쌤’이다. 환자 차트를 보며 이숙희 씨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권기순 원장.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내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동네에선 아무도 몰랐어요”


1959년 생인 이 씨의 학력은 오랜 세월 초등학교 4학년에서 멈춰 있었다.14세부터 20대 초반까지는 공장에서 보냈다. 23세 때 지금의 남편 권오언(68) 씨와 결혼하며 공장을 떠났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27세부터는 혼자가 된 시어머니(당시 57세)를 모셨고, 30대 후반부터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 속칭 ‘노가다’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병약한 시어머니와 아들딸 5식구가 살아가려니 남편의 외벌이로는 부족했다.


현장에서는 ‘설비 아지매’로 불렸다. 아파트 공사 초기에 수도관이나 수전, 양변기 등을 설치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동파이프 용접 정도는 식은죽 먹기로 해냈다.


“설비는 골격만 만들어진 건물에 올라가 작업하는 일이 많아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가족에게도 정확히 제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얘기 안했어요. 이웃들에겐 더욱 숨기는 데 급급했죠. 창피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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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던 시절의 사진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의무안전교육을 받은 뒤 단체로 ‘증거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너도나도 뒤로 가 얼굴이 안 나오게 하려 애썼다고. 유일하게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은 게 카드 형태의 이 교육이수증이다. 이숙희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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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숙희 씨. 공장시절 사진은 이게 유일한데, 이것도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찍었던 것들 중 한 장을 준 것같다고 기억한다. 이숙희 씨 제공

그 많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가 공장에서 일하던 1970년대 사진을 보며, 그 많던 ‘산업역군’ 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낮은 임금에 인생의 꿈과 가능성을 저당 잡혔던 그녀들은 아마도 공장을 벗어난 즉시 이 기억을 흑역사로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그가 지금도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땀흘린 그 수많은 나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하듯이.


한의원에 도착하니 남편 권씨도 와 있었다. 아내에게 중요한 날이니 기사 노릇을 자처했다고. 무언의 응원이 느껴졌다. 저녁 7시, 진료가 끝나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권원장도 합류했다.


“내는 죽어도 대학은 가보고 죽을 끼라”


‘못 배웠다’는 것이 그의 평생 한이었다. 남편에 대해 “착한 사람”이라며 “못 배운 저를 받아줬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결혼할 때 시아버지께 ‘중졸’이라고 거짓말 했고, 학교에 보내는 서류에도 ‘중졸’이라고 써보냈다. 이 남편에게조차 끝내 ‘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말은 못했다고 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권씨가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웠어도 사람이 똑똑하면 되는기라. 당신은 똑똑하잖아.”


평생의 한을 푼 실마리는 61세 지인이 인터넷 강의로 공부해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땄다는 소식.


“귀가 번쩍 뜨였죠. 학원에는 창피해서 못 가지만 인강이라면 혼자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겠구나…”


밤마다 밥상 펴놓고 남편에게서 수학과외 받아


딸에게 처음으로 “내가 실은 초등학교 졸업자격이 없다”고 커밍아웃했다.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 거였는데, 딸은 “그게 뭐 대수라고, 검정고시 보면 되지”라며 집 근처 초등학교에 문의해 해결책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1년 4개월 만에 이 씨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초등학교는 한달 여 독학으로 공부한 뒤 2015년 3월에, 중학교는 5월에 합격증을 받았다. 고교 합격증은 이듬해 5월에 받았다.


“고등학교 과정은 독학만으로는 벅차서 학원에서 공부했지요.”


기초가 없는 수학이 문제였다. 구원투수는 가까이에 있었다. 공고와 폴리텍을 나온 ‘이과계’ 남편 권 씨가 밤마다 밥상을 펴놓고 수학과외를 해줬다.


대망의 고교 졸업증서는 손에 넣었지만 수학능력시험을 볼 자신은 없었다. 딸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보라고 권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대학에만 향해 있었다. 그러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학도들이 가는 2년제 주말대학’ 정보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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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가 2015년 5월부터 2016년 8월 사이에 받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시험 합격증. 사진이 작아 독자 편의를 위해 발급일시만 인위적으로 확대했다.

나에게도 동창이 생겼다!


“2년제건 4년제건, 그냥 대학에 한번 다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주말에 종일 몰아서 수업하는 학교였는데 보육복지상담과로 들어갔어요.


리포트도 써보고 MT도 가고, 학사모 쓰고 졸업사진도 찍었습니다.


저는 평생 동창이 없었잖아요. 남들이 학창시절 얘기하면 낄 수가 없었죠. 그런 제게도 대학동창에 교수님까지 생긴 거예요.”


사실 ‘만학도를 위한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국립창원대에 개설된 4년제 ‘자산관리학과’가 그것. 며느리가 영어교사란 점도 고려해 아들 부부에게 상담을 청했더니 2년제 쪽을 추천해줬다고.


“자산관리는 저로서는 별로 써먹을 데가 없지요. 하하.”


의료봉사 현장 도우며 남 돕는 일의 기쁨 맛봐


졸업반(2학년) 올라갈 때 미션 하나가 추가됐다. 딸의 권유로 간호학원에 등록한 것. 권기순 원장의 회고다.


“그 즈음 가조도에 의료봉사를 갔는데 엄마가 와서 도와줬어요. 교실을 빌려 지역 어르신 30여 명을 치료해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기분 좋아하시는 거예요.


한의원에서도 일손이 부족하면 엄마가 가끔 허드렛일을 도와주셨는데 일 파악도 잘 하시고 정말 믿음직했어요.


‘간호학원 1년이면 간호조무사 자격증 딸 수 있는데, 그거 따서 우리 한의원에서 일하시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1년 간 주중에는 간호학원, 주말에는 대학강의를 듣는 강행군을 벌인 끝에 2019년 봄, 만 60세에 이 씨는 간호조무사 자격증과 대학졸업장을 모두 따냈다.


“간호학원 상담 과장님이 ‘학원 창립 이래 60세 넘어 합격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맙죠. 안 받아주셨으면 제가 어떻게… ”


사실 간호학원 입학할 때 여러 군데에서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이 학원 상담과장은 훗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 나름 사람보는 눈이 생겼는데, 이 분은 해낼 것 같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가족의 무관심에 초4에 중단된 학업


1960년대에도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다. 이 씨는 왜 졸업하지 못했을까.


“2남 4녀 중 막내딸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집이 시골에서 안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전학수속을 밟아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언니오빠들은 모두 출가하거나 집을 나갔고 어느 틈에 제가 소녀가장이 돼 있더군요. 부모님 모두 예순이 넘으셨고요. 열넷 정도부터 집근처 과자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뒤로는 아무도 학교 얘길 꺼내지 않았다. 19세 때에는 친척의 소개로 구미의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이 무렵 전남 광주에서 공군 중사로 근무하던 남편 권 씨와 펜팔로 연결됐고, 권씨가 창원의 기능대(현재의 폴리텍대)에서 공부하면서 창원에 자리를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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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이렇게 멋있었다니까요.” 이 씨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펜팔로 연애하던 시절 공군 중사 모습의 남편 권 씨 사진을 보여줬다. 이숙희 씨 제공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일도 있는데 왜 ‘노가다’ 일이었나요?


“제 마음 속에 정해둔 원칙이 있었어요.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가족 저녁밥은 내가 차려야 한다는 원칙이죠. 해질녘 귀가할 수 있으면서 학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선택지가 없었지요.”


이 일은 당시에도 벌이가 쏠쏠했다. 남편보다 많이 벌 때도 적지 않았다.


2002년, 최악의 시련이 닥쳐왔다. 딸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학원비기숙사비를 대야 했는데 남편은 다니던 대기업에서 ‘잘렸다’. 어머니 병세는 더욱 나빠져 대소변 수발이 필수가 됐다. 집을 사며 얻은 대출도 있었다.


모든 불행이 다 내게로 왔던 시절


“모든 불행이 제게로만 오는 것같았어요 . 그때 제가 43살. 지금 생각하면 참 젊었는데, 당시에는 제가 무척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낼 돈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끝까지 모시겠다는 마음도 컸지요.”


당시 그는 늘 불안했다고 한다.


“새벽 6시에 어머니 점심까지 차려놓고, 요강 준비 다 해놓고 나가요. 고교생이던 아들이 할머니 요강수발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 어머니 혼자 돌아가셨을까봐…


현관에서부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서, ‘그래 에미냐’ 대답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내렸죠.”


2003년 초 딸이 한의대에 합격한 직후 할머니가 타계했다. 걱정과 달리 시누이 두 분과 이씨까지 집에 있는 상황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온 친척이 ‘자네는 부모한테 잘해서 복 받은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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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선생님이 침구치료를 마치고 가면 간호조무사인 숙희 쌤이 뒷처리를 맡는다. 침을 뺀 환부를 소독하는 이 씨. 붉은 빛은 적외선 치료광선이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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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가 한의원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줬다. 모든 한약은 이곳에서 직접 다리는데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돼 있다고 한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설비 아지매’에서 ‘숙희 쌤’으로


요즘 이 씨는 주 3일 경남 창원의 집에서 한의원이 있는 거제까지 시외버스로 출근한다. 2015년 개원한 한의원은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 손님들이 줄을 선다.


일터에서 모녀는 서로 ‘원장선생님 ’ ‘숙희 쌤’이라고 부른다. 다른 4명의 간호조무사도 이름에 ‘쌤’을 붙여 부르기는 마찬가지.


20년 간 공사 현장에서 ‘설비 아지매’라 불리던 그가 ‘숙희 쌤’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권 원장이 한의사를 지망한 이유도 가족생각이 컸다.


“우선 우리 가족 건강을 제가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엄마는 40대부터 얼굴이 퉁퉁 붓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수입도 생각했죠. 부모님 고생이 모두 돈 때문인데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우리 집에 좀 도움이 되겠다….물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보람도 크죠.


지금 엄마에게 월급 겸 용돈 겸 돈을 드릴 수 있어 너무 좋아요.”(권 원장)


무리해서 일 하다 스테로이드 부작용까지


권 원장은 공부하다보니 이 씨의 증상이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인한 ‘쿠싱증후군’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날 그날 일을 나가야만 벌이가 있으니 약 먹고 주사 맞아가며 무리를 했는데 스테로이드를 너무 맞았다는 것.


-그렇게 고생했는데 가끔 남편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


“제가 모자라 그 일을 택했는데 남편 탓할 입장이 아니죠. 솔직히 제가 잘났다면 그런 데 갔겠어요. 다른 거 했겠지.”


부인이 번듯한 직업을 가진 남편 동료들을 보면 이 씨는 남편에게 미안해했다. 그때마다 권씨는 “당신이 공부 더 했으면 나 못 만나. 날 만나줬겠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어떤 일도 제가 다 이겨내야겠다는 책임감이 굳어지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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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를 중심으로 찍은 가족사진. 어머니는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셨지만 착하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이숙희 씨 제공

세대간 희생과 도움의 선순환


세대 갈등이니 세대간 착취니 하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이 씨 가족은 희생을 한 세대덕에 잘 된 아랫세대가 다시 윗세대를 도와서 함께 잘 되는 ‘윈윈’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족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그 엄마의 마음을 아는 딸은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답을 찾는데 힘을 보탰다.


특히 평생 이씨를 가둬둔 학력 콤플렉스를 떨치고 세상에 나오도록 마음 썼다. 이씨가 수기를 통해 세상에 모든 걸 공개하겠다는 용기를 낸 것도 딸의 극약처방 덕이다.


“(수기 쓸 때) 처음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못 간 얘기는 빼고 고등학교 중심으로 썼어요. 남들 보기 창피하니까요. 그런데 딸이 막 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 넣었어요.”(이 씨)


엄마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는 아들조차 수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


“엄마의 경우 제 눈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학력은 별 의미가 없었어요.


엄마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저희가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졸업한 셈이예요. 저희가 읽는 교과서, 참고서, 만화책, 제 전공서적까지 모두 읽었거든요.


화장실에 앉으면 신문조각이라도 읽으세요. 늘 조그마한 거 하나에도 배울 게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희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지요.” (권 원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죠”


공모전 최우수상 상금은 50만 원. 이 상금을 분배한 얘기에서 이 씨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고 본인 운명일 뿐이죠. 남탓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더더욱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해요.


우리 남편은 그 상금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힘이 돼 줬어요. 그래서 10만 원 더해서 60만 원 줬고, 사위 딸 며느리 아들에게도 10만 원씩 딱딱 줬어요.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완성품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이번엔 권씨에게 60만 원 받아서 뭐하셨냐고 하니 “딱 반 갈랐지”라며 킥킥 웃는다. 이 부부는 뭐든 생기면 즉시 절반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


68세, 64세인 부부는 모두 현역.이 씨는 한의원 일을 힘닿는데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남편 권 씨도 전기기사 자격으로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먼길을 돌긴 했지만 건강한 가정을 일구고 자녀 잘 키우고 60세 넘어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씨.


그의 원동력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자신이 안간힘 다해 지켜낸 가족의 뜨거운 응원이었다. ‘굳세어라. 숙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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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이 많아도 늘 ‘서로가 최고’라고 북돋으며 살아온 이숙희 권오언 부부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뒤에 권기순 원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보니 가족사진 느낌이 난다. 거제=서영아 기자sya@donga.com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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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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