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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남는다는 것

by웹진 <문화 다>

“좋아서 쉬는 게 아니오”

최근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금연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32년간 담배를 피웠고 구강암 판정을 받아 흡연으로 혀의 대부분을 잃은 노년의 남성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얼핏 한 가장의 행복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듯한 내용이 이어지지만 결국 끔찍한 사진들로 마무리되는 충격효과를 노린 광고이다. 흡연의 폐해를 보여준다는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이 광고를 보고나면 왠지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나이든 남자가 쉰 목소리를 내고 뒤돌아서서 걸어 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흡연=개인의 잘못된 선택=끔찍한 질병’이라는 도식으로 그의 삶 전체를 불행 속에 가둔다. 요컨대 나이가 들고 건강을 잃어간다는 인간이라는 종의 불가항력적인 운명 속에서 한 개인의 개별성, 삶의 경험에서 얻은 통찰력, 선한 의지 등은 주목되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소거되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믿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생의 말미를 트랩에 갇혀버린 채로 맞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언젠가는 관찰자가 아닌 그 주체의 자리로 갈 것이라는 점이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2016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Ken Loach)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에도 초로에 들어선 한 남자가 등장한다. 스산한 가을날 청바지에 셔츠, 가벼운 점퍼를 걸친 그는 중간계급(middle class)출신의 숙련공 목수이자 공예가이다. 오래 치매를 앓던 부인을 떠나보내고 홀로 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의사의 권고로 일을 쉬고 있다. 40여년의 직장 생활동안 성실한 납세자로 살아온 그는 당연히 질병수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로부터, 정부의 사회복지 시스템으로부터 ‘거절’당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암전 속에서 음향이 먼저 도착한다. 질병수당 지급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하는 전화 속 여성은 자신을 고용연금부에서 파견한 의료 전문가라고 소개한다. 그녀가 부차적인 질문들만을 집요하게 하자, 참다못한 다니엘이 “난 심각한 심장마비 때문에 추락사할 뻔 했었소 좋아서 쉬는 게 아니오. 심장 얘기부터 좀 합시다. 딴데는 다 멀쩡해요.”라고 항변하지만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에만 답하라고 응대한다.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남는다는 것

이후, 질병수당 지급 신청이 기각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화가 난 다니엘이 다시 전화를 걸지만, 상담원이 모두 통화중이라 기다려 달라는 멘트와 연결음악만이 계속 반복된다. 지겨움 속에 분노로 지쳐가면서 전화기를 잡고 매달린 끝에 1시간 48분 만에 연결된 상담원은 기준인 ‘15점’에 미달된 ‘12점’이기 때문에 질병수당을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질병수당은 거절되었고, 항고를 할 수 있지만 항고를 하려면 심사관의 전화와 편지를 먼저 받아야 신청이 가능하고, 그 기간 동안 취업 수당을 받을 수 있으나 그렇게 하려면 취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내야 한다. 질병과 취업 수당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모두 중산층의 성실한 납세자로 살아온 다니엘의 지나간 삶의 노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절차’, ‘선례’, ‘디지털화’이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절차는 너무나 복잡하고, 잘못된 선례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은 인정을 베풀지 않으며, 수당 신청 방법은 디지털화되어 있어 곤란함을 가중시킨다. 마우스조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다니엘은 주변의 도움을 얻어 애를 쓰면서 인터넷 신청서를 작성하려 해보지만 번번히 컴퓨터 화면이 멈추고 빨간 ‘에러error’글자만이 나타나 그를 답답하게 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요”

50여년이 넘는 영화 인생 동안 언제나 사회적 약자나 소외 계층,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뤄오면서 ‘블루칼라의 시인(Blue-collar Poet)’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이자 리얼리즘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성인 ‘대처리즘’에 항거하여 노동자와 실직자, 이민자 등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연대를 꿈꾸는 작품 세계는 메시지가 명확하면서도 교조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으며,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특유의 위트가 두드러진다. 켄 로치는 아일랜드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각본가 폴 래버티, 프로듀서 레베카 오브라이언, 촬영 감독 로비 라이언 등 이전 작품에도 좋은 호흡을 보였던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켄 로치는 <지미스 홀>(2014) 이후 은퇴를 선언했었으나 여전히 자신이 할 얘기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은퇴 결정을 철회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리얼리즘적인 완성도를 위해 늘 비전문배우나 경력이 낮은 배우를 선호한다. ‘다니엘’ 역을 맡은 ‘데이브 존스’와 ‘케이티’역의 ‘헤일리 스콰이어’는 우리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친숙한 이웃들에 가까운 모습으로 영화와 현실이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치한 것이다.

 

영화 속 상황은 정부의 사회복지제도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차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세금으로 구휼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방만하게 운영되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 누군가 수고하지 않고 무임승차할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한다. 반대로 다른 한 편에서는 무책임하고 경직된 관료제의 맹점으로 인한 복지의 사각지대 아래서 구제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의 입장은 후자를 향해 있다. 노동자가 병들고 노쇠하여 그간 내온 세금에 근거해서 국가로부터 적법한 수당을 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자신의 불행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 고단한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켄 로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견디며 자존심을 잃어야 얻는 복지란 어떤 의미인가.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남는다는 것

질병을 전시하고 구직활동을 증명해 내며 관료적인 행정의 편의성에 따라 휘둘리면서도 수당을 받기는 결코 쉽지 않다. 다니엘의 옆집 청년인 ‘차이나’는 그의 인터넷 신청을 도와주면서, “앞으로도 물먹일 걸요? 바닥 치게 하는 게 놈들 작전이죠. 우연이라는 건 없어요. 수당 포기자도 많아요.”라고 말한다. 관료적 효율성만이 극대화된 시스템 안에서 복지 수혜자들로 하여금 그 복지에 다가서기 힘들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노리는 점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요“라는 다니엘의 말은 결국 생존의 위협 앞에 선 인간이 정부의 사회복지 시스템 안에서 느끼는 모욕과 모멸감에 관한 냉정한 일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늪에 빠진 느낌이예요”

다니엘이 정들었던 가구를 팔고 가스전기료의 독촉장을 받으며 중류계층에서 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은 자기의 기술과 능력으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할 것 없이 살던 자신의 삶이 끝났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기대했던 질병 수당마저 요원해지고 그 과정에서 폄하당하는 자신의 가치로 인해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의 모멸감은 아직은 정신적 측면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아래서 젊은 싱글맘이자 아이가 둘인 케이티의 사정은 더욱 녹록치 않다.

 

다니엘은 수당 신청을 위해 복지 센터에 갔다가 그곳에서 케이티가 아이들을 데리고 소란을 부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런던에서 살다가 뉴캐슬로 이사왔는데, 초행이라 지리에 어두워서 정해진 상담 시간에 약간 늦었다는 이유로 담당 공무원이 수당을 깎는 제재 대상자 명단에 올린 것이다. 이에 대해 케이티가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려 했지만 공무원들은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우연히 이를 본 다니엘은 그녀와 아이들의 사정이 딱하고 공무원들의 태도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나서지만 결국 같이 센터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녀는 이른바 ‘보복성 퇴거’, 즉 살던 집에 문제가 있어 항의를 했지만 도리어 거주자의 만용이라는 측면에서 제재를 받아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다가 결국 지방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청소일도 구해보고 낡은 집이나마 보금자리로 가꿔가면서 10살 딸 데이지와 7살 아들 딜런을 키우며 살아가보려 하나 현실은 만만치 않고 생계에의 압박은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아이들만 먹이고 자신은 식사를 굶게 되고 아이들은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며 학급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다. 케이티는 밤마다 삶의 고됨에 숨죽여 울며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다니엘은 딱한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며 아이들을 위해 집을 수리해 주고 목공예 장식품을 만들어 주며 푸드뱅크(무료식료품 보급소)도 같이 가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푸드뱅크에 가서 물건을 고르던 케이티가 너무 배가 고파서 자신도 모르게 통조림 캔을 따서 손으로 입에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넣는 장면이다. 케이티는 스스로도 깜짝 놀라서 울며 늪에 빠진 느낌이라고 흐느낀다.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남는다는 것

요컨대 다니엘이 사회적인 층위에서 하위 계층으로 이향해가는 자신의 처지와 자신을 하대하는 시스템에 분개했다면, 케이티는 좀 더 근원적인 층위에서 인간 생존의 기본 요건인 배고픔 그 자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모멸감을 느낀다. 젊은 여자이고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고 타 지방 출신에 이미 하류 계층인 그녀는 당연히 다니엘보다 더 극심한 빈곤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시스템의 바깥에서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

우리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고 유리지갑 안의 돈을 세금으로 내는 것은 적어도 늙고 병들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극한 빈곤의 늪에 빠졌을 때 최소한의 사회보장의 혜택을 기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현실은 늘 불안정한 미래로 우리를 내몰고 이때 우리가 생존할 기본 강령은 각자도생이다. 하지만 켄 로치는 이 영화를 통해 불안한 현재의 실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복지 제도의 바깥으로 밀려나면서도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은 서로를 의지한다. 선한 사마리아인들은 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다니엘의 이전 직장이던 목공소의 조는 다니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고, 옆집에 사는 흑인청년 차이나는 그의 인터넷 서류 신청과 인쇄를 도와준다. 복지 센터의 공무원 중에서도 앤은 그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어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케이티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쳤을 때 겨우 생리대 정도인 것을 알고 담당자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고 자신이 물건 값을 대신 내주겠다고 말한다. 질병 수당을 담당하는 복지사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으로 다니엘에게 꼭 승소하게 해주겠다고 힘을 북돋는다.

 

국가나 시스템이 이들을 패배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고통이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며 돌보아주지 않는 사이에 사람들은 바로 가까이에 사는 이웃과 연대한다. 그리고 분노한 다니엘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관공서의 벽에 커다랗게 래커 스프레이로 써내려가는 것은 시스템이 약자들에게 빈곤의 책임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시민(市民)’은 더 이상 ‘신민(臣民)’이 아니므로 더 이상 이 불합리를 참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인간 존엄의 최소한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편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묵직한 감동을 주며 우리가 숙고해야할 가치들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별점

 대중성

 ★★★☆☆ 7

 평균

 최종 별점

 예술성

 ★★★★☆ 8

7.5

8.0

 

영화평론가 이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