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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벤처투자의 제왕 손정의 ‘지옥에서 천당으로 1년’

by조선일보

[Mint] 다시 정상에 오른 손정의


“소프트뱅크가 21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back on top).”


소프트뱅크 주가가 지난달 9일 ‘1만엔’ 고지를 넘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쓴 표현이다. 소프트뱅크의 주가는 10일 기준 1만120엔으로, 2000년 2월의 이전 최고치(1만111엔)를 뛰어넘었다.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3월과 비교하면 극과 극으로 달라진 상황이다. 당시 소프트뱅크는 일본 기업 사상 분기 최대 적자인 1조4381억엔(약 15조1200억원)의 손실을 냈고, 주가는 2주 만에 5092엔에서 2687엔으로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이것이 1년 여 만에 약 4배가 된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어쩌다 1년 새 ‘지옥과 천당’을 오가게 된 걸까.

세계 최대 ‘벤처투자사’

조선일보

소프트뱅크는 도쿄거래소에 ‘통신업’ 분류로 상장되어 있다. NTT도코모, KDDI에 이은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여서다. 이 회사는 그러나 1981년 PC 소프트웨어 유통업체로 문을 열 때부터 벤처투자회사의 면모를 보였다. 창업자 손정의 회장은 미래 유망 사업과 기업을 찾아 초기 투자를 함으로써 수년 후 큰 이익을 얻는 방식에 능했다. 1986년 작은 벤처기업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MS)를 발굴해 MS 소프트웨어의 일본 독점 판매권을 따냈고, 1996년에는 미국 야후에 초기 투자해 3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고 ‘야후 재팬’ 서비스도 열었다. 2001년엔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6년에는 적자 기업 보다폰재팬을 인수, 이동통신에 뛰어들었다. 손 회장은 이 과정에서 애플 아이폰이 출시되기도 전에 일본 내 독점 유통권을 따내 소프트뱅크 이동통신 서비스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프트뱅크가 명실상부한 세계적 벤처투자사로 떠오른 것은 중국 알리바바 투자에 성공하면서다. 손 회장은 1999년 중국 알리바바에 2000만달러(약 225억원) 규모의 초기 투자를 감행, 2014년 알리바바가 뉴욕 증시에 상장하자 초기 투자금의 2000배에 달하는 ‘잭팟’을 터뜨렸다. 소프트뱅크는 이 기세를 몰아 2017년 유망 기술 기업에 투자하는 ‘비전 펀드’를 설립하고 매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현재 비전펀드의 규모는 1000억달러(약 114조원)에 달하며, 아마존과 구글, 페이스북, MS, 우버 등을 비롯한 전 세계 130여 개 기술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미국 뉴욕 증시 상장을 앞둔 쿠팡과 지난해 말 상장한 미국 최대 음식 배달 업체 ‘도어대시’ 등도 비전펀드의 투자처다.

투자 실적 따라가는 주가

이렇듯 벤처투자사의 면모가 강하다 보니 투자 성과에 따라 회사 주가가 움직인다. 지난해 3월 주가가 2600엔대까지 빠진 것도 소프트뱅크 자산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투자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며 막대한 평가 손실이 나서다. 알리바바 주가가 2개월 새 23% 빠지면서 40조원의 자산 손실이 발생했고, 도어대시 등 5~6개 투자 기업의 상장 계획이 연기된 데다, 40억달러 이상을 투자한 미국의 공유 사무실 업체 ‘위워크’의 실적 부진도 큰 타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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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손 회장의 투자적 경영 방식, 이른바 ‘손류(孫流)’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적자를 무릅쓰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시장을 장악하는 방식이다. 매년 천문학적 적자를 내는 쿠팡에 지난 2015년부터 27억달러(약 3조원)를 쏟아부은 것이 대표적이다. 손 회장은 결국 알리바바와 미국 통신사 T모바일 지분을 대거 매각하고,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회사 영국 ARM 지분을 미국 엔비디아에 넘기는 승부수로 약 800억달러의 현금을 확보, 급한 불을 껐다.


손류의 굴욕은 오래가지 않았다. 2분기가 되자 글로벌 증시 반등세에 따른 투자 기업들의 주가 상승이 이어졌고, 소프트뱅크는 사상 최대 규모의 흑자(1조2557억엔)를 내며 ‘대반전’을 일궜다. 소프트뱅크가 대주주인 미국 도어대시와 중국 온라인 부동산 중개 플랫폼 베이커쟈오팡의 IPO(기업공개) 성공, 차량 공유업체 우버의 주가 회복이 컸다.

손정의 “이제 막 수확기 진입”

소프트뱅크는 올 들어서도 이 회사가 투자한 쿠팡과 중국 차량 공유 업체 ‘디디추싱’, 틱톡 모기업인 중국 ‘바이트댄스’ 등의 상장 일정이 발표되고, 사무실 공유업체 ‘위워크’의 수익성 회복 같은 호재가 줄을 이으며 주가 상승세를 이어갔다. 손 회장은 지난 1월 미야카와 준이치(宮川潤一) 부사장을 CEO로 승격시키며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지난달 열린 온라인 실적 설명회에 나와 “비전펀드는 이제 막 수확기에 진입했다”며 여전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계속 잘나갈 수 있을까. 투자은행 제프리스의 아툴 고얄 수석연구원은 “소프트뱅크는 현재의 IPO 열풍 속에서 사실상 가장 수익성 높은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쓰루오 미쓰노부 시티그룹 애널리스트는 “소프트뱅크의 주가 급등은 초저금리와 과잉 유동성 때문”이라며 “투자자들은 ‘음악’이 멈추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김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