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 직업을 거쳐 오십을 앞두고 만난 천직

[라이프]by 전성기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의 화두는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와 ‘지금까지 벌어놓은 것으로 언제까지 먹고살 수 있는가’가 되었다. 이제 인생은 이모작, 삼모작까지 가능하다고 하지만 모든 농사에서 수확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장사익의 첫 번째 농사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마흔여섯 살에 딱 한 번만 불러보기로 한 노래를 20년 넘게 부르면서 소리꾼이라는 천직을 만났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시원하게 노래 부르는 모습이 누구보다 잘 어울립니다. 예전에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고요.

고등학교 시절에 서울로 유학을 왔어요. 충남 홍성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돼지를 키워 파는 일을 하셨어요. 그때는 은행원을 최고 직업이라 여겨서 공부를 제법 했던 아들을 서울 선린상고로 유학 보내신 거죠.


졸업 후 지금의 종로 공평동에 있던 고려생명보험에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다녀왔더니 회사가 없어졌더라고요. 그 뒤로 작은 무역 회사에 들어갔지만 오일쇼크 파동이 일어나면서 잘렸고, 여우 목도리에 꽂는 핀 만드는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생과 딸기 장사도 했습니다. 가구 판매점도 해보고, 독서실도 차렸어요.


다 오래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일했는데, 정비 기술이 없다 보니 손님을 맞이하고 주차해 주는 일을 했지요.

노래와 관련된 일은 전혀 안 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목소리가 좋으니 웅변을 권하더라고요. 그날로 마을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산에 올라가 반대편 산 아래 공동묘지를 향해 소리 지르는 연습을 중학교 3학년 무렵까지 5년 동안 계속했어요. 그때 트인 목소리는 고등학교 가서 빛을 좀 봤습니다.


목청이 좋으니 소풍 때마다 불려 나가서 반 대표로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 당시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의 인기가 최고일 때라 ‘나도 저런 가수가 되어볼까’라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종로 낙원동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에도 3년 정도 다녔어요. 지금 부르는 가요는 전부 그때 기본기를 배운 것들입니다.

그렇게 40대 중반까지 직업을 열다섯 번이나 바꿨다고요.

제 노래 중에 ‘이게 아닌데’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의 3분의 1이 ‘이게 아닌데’입니다. 그 노래 같은 인생이었죠. 이러려고 세상 나온 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의 연속이었습니다. 진중하지 못한 성격과 부족한 것이 많은 탓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인생이었어요.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내 현실이 외롭고 힘들던 그때, 동네 아저씨가 태평소를 불고 있었는데 저녁마다 거기 가서 듣고 놀았죠. 위로가 참 많이 됐어요. 그러다 ‘한솔회’라는 국악 동호회를 만나 어울리면서 단소, 태평소, 대금을 배웠습니다. 그때 이거라도 제대로 딱 3년만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추운 한겨울에도 한강 둔치에 나가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뒷산에서 목청을 풀었던 것처럼요. 그리고 3년 만인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태평소 연주로 대상을 받아버렸어요. 제 나이 마흔여섯 살 때입니다.

그렇게 태평소를 시작으로 다시 음악을 시작한 거군요.

노래를 하게 된건 친구인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제안이 계기가 됐어요. 사물놀이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임동창의 피아노에 맞춰 ‘대전 부르스’를 불렀는데 듣기 좋았는지 공연을 하자고 조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딱 한 번만 해보자길래 그러자 했는데, 신촌에 있는 소극장에 하루 400명씩 이틀간 800명이 몰렸어요. 공연한 다음 날 일어나는데 문득 ‘이게 행복이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해 겨울에 음반을 녹음했고, 그렇게 시작한 노래를 20년 넘게 부르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있죠. 제가 노래를 시작한 게 딱 그렇습니다. 엄청난 행운이었어요.

남들은 웬만큼 자리 잡고 뿌리내리면서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는 40대 후반에 드라마틱하게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마흔여섯에 가수로 데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요즘 수명이 길어졌으니 대략 제가 아흔 살까지 산다고 치면, 딱 그 절반인 마흔다섯 살을 기점으로 제 인생이 정확하게 둘로 나뉘더군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노래를 하기 위해 그 전까지는 깜깜한 밤을 겪은 것이더라고요. 요즘 노래 잘하는 어린 친구가 얼마나 많아요. 어쩌다 경연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처럼 늦게 시작한 사람은 이미 겪어본 인생을 노래할 수 있잖아요. 그게 제 생명력이지요.


인생의 전반부가 없었다면 후반부는 없었을 거예요. 어려서 목청을 틔웠고, 고등학교 때 가요를 좀 배웠고, 시대적으로 팝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자연스레 팝을 귀로 익혔고, 나이 들어서 국악도 배웠으니 제 안에서 장사익만의 퓨전이 탄생한 것 같아요.


긴 시간에 걸쳐 하나씩 배운 것들과 그 과정 하나하나가 소리꾼 장사익이라는 집을 쌓아올린 벽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근사한 재주가 있어서 완성된 집이었다면 저 같은 사람은 금방 생명력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단하게 쌓아 올린 노래 인생에도 위기가 있었지요.

2016년 제 나이 일흔을 한 해 앞두고 성대 수술을 했습니다. 목소리가 이상하더라고요. 소리가 꺼끌꺼끌하고, 호흡이 짧아지고, 노래 한 곡 하면 물을 마셔야 하고, 가래가 끼고. 아랫소리가 닫혀서 힘을 줘야 열리길래 이러다 노래 못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면서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성대라는 게 민감한 근육이라서 살을 떼어내고 회복을 잘 못 하게 되면 쉰 소리가 나게 됩니다.


걱정을 하면서 일주일 만에 수술했는데 한편으로 되게 감사했어요. 수술 후 보름간 묵언 수행처럼 말을 못 하고 지냈는데, 그때 제 노래를 다시 듣고 다른 사람들 노래도 들으면서 지냈어요.


내가 만약 노래를 못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때 깨달았지요. 노래 할 때가 나는 꽃이었구나, 노래를 하지 않는 지금은 눈물이구나 라고요.


사실 노래를 시작한 이후부터는 기차 타고 쭉 가는 것처럼 그저 즐겁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수술을 계기로 처음 태평소를 잡을 때의 마음을 되찾은 것 같았어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죠. 요즘 ‘나를 찾기 위해’ 산티아고나 제주 올레길을 많이 걷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성대 수술을 통해 알게 됐지요.

수술 후 목소리가 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었나요?

처음엔 걱정했지만 목소리는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어요. 나이가 들면 목소리가 바뀔 테고 거기에 맞춰서 노래하면 되죠. 그 전까지 가성을 안 썼지만 이젠 씁니다.


나이에 맞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노래로 전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해 준다면 제가 계속 노래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요.

노래 외에 손글씨 실력도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콘서트 포스터 글씨도 직접 쓴다고요.

제가 상고 출신이잖아요. 상고 나온 사람들은 필체가 좋아야 해요. 매일 신문을 두어 개 받아 보는데, 다 읽고 난 신문 위에 붓으로 글씨 연습을 해요. 한문은 한문대로 천자문을 한석봉체로 7~8번 쓰고 있고요.


한 번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씨의 패션쇼에 초대를 받았는데 공연 일정과 겹쳐서 못 가게 되어 양해의 편지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제 글씨를 눈여겨본 이상봉 디자이너가 그 편지를 1년이나 가지고 있다가 옷에 프린팅해 준 덕분에 제 글씨가 패션쇼에서 선보인 적도 있습니다.


타계하신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 선생님은 평생 쌀알에 <반야심경>을 새기는 작업을 했어요. 그 작업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고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마디 하시더군요. “사익아, 너도 글씨 좀 써봐라.” 그 얘기를 듣고 딱 10년만 열심히 써보자 했는데, 제 음반과 콘서트는 물론 디자이너의 옷에도 쓰이게 되었네요.

딱 3년만, 딱 10년만이라고 목표를 정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은 것 같아요.

태평소를 불기 전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할 때는 제가 제법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착각이었죠. 그저 남들 앞에서 이런 일 한다고 폼 잡은 것에 불과했어요.


직장에 다녀도 ‘이 회사는 내거야, 내가 5년 후에는 이 회사를 이만큼 키우겠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잘 안 됐을 테고요.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를 태평소 연주를 하면서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래서 인생은 거울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찡그리면 거울 속의 나도 찡그리잖아요.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내 인생도 최선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무대에서도 제가 가진 것을 100% 쏟아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 역시 100%로 들어줍니다.


금방 승부를 내려고 한다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인생은 여전히 길고 기회는 많아요. 무엇을 하든 꾸준히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을 때, 삶은 비로소 그만큼의 답을 준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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