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by 서필훈

# 마리오

문

과야킬Guayaquil 공항 입국장 문이 열렸다. 이제 에콰도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비행기가 2시간이나 연착해 오래 기다렸을텐데도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그의 이름은 마리오.

멜버른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는데 커피가 너무 좋아 박봉에도 불구하고 커피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커피에 영혼을 사로잡힌 사람들 대개가 그러하듯 그는 본사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커피 얘기를, 사실은 자신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오는 자신이 일하는 곳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오래된 단층 건물 한 켠의 하얀색 문을 열자 자그마한 랩Lab이 나왔다. 그래봤자 설비라곤 한국에서는 이제 찾아보기도 힘든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라인더, 25년이나 되었다는 작은 샘플 로스터가 전부였다. 커핑을 위한 동그란 테이블과 커피 샘플들로 가득한 책장도 있었다. 

 

마리오는 다음 주 바리스타 대회에 출전한다며 프레젠테이션 대본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약간 쑥스러워 하더니 곧 신이 나서 대본에 대해 얘기했다. 에스프레소도 먹어봐 달라며 커피를 뽑아 주는데 긴장한 눈빛이 역력하다. 가끔 내가 도저히 맛 없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이 있다. 단순한 기대를 넘어 열정과 절실함이 순수함과 함께 배어 있는 드문 경우다.

 

대회용 원두 로스팅은 어떻게 준비하냐고 물으니 100그램 샘플 로스터로 30번 볶은 후 섞어 쓴다고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지만 그 말문 너머에서 그가 말한 희망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곧 커피 산지가 있는 내륙지방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의 대회 시연을 보지 못했다. 열흘 뒤 본사로 돌아오자 마리오는 대회에서 실수를 해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도 그는 마냥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힘차게 열렸던 문이 이내 닫히는 소리.

# 세르비시오

문

과야킬에서 커피 농장들이 있는 로하까지는 차로 8시간이 걸렸다. 오후 느즈막히 도착한 어느 산허리. 작고 마른 체구를 가진 세르비시오가 우리를 맞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가득했고 악수를 하는데 굳은 살 때문인지 유독 손이 크다고 느꼈다. 

 

그는 나무 막대 몇 개와 철조망을 엮어 만든 엉성한 문을 땅에서 뽑아 우리에게 들어오라 손짓 했다. 농장까지 그를 따라 가파른 산 길을 한참이나 올라가는데 도저히 그의 빠른 발걸음을 쫓아갈 수 없어 연거푸 가쁜 숨을 몰아 쉬어야 했다.

 

그의 커피밭은 처참할 정도로 로야(Roya, 커피 잎병) 피해가 심각했다.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마치 땅에 나무 막대기들을 마구 꽂아 놓은듯했다. 로야가 창궐하기 전에는 8헥타 농장에서 약 25 Bag 정도 커피를 생산해 가족들이 근근이 생활했는데 작년에는 7백, 올해는 5백을 수확했다고 한다. 

 

로야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냐고 세르비시오에게 물었다. 농약이나 비료 살 돈은 없고 동네 소문에 커피 나무 밑둥에 염소똥을 좀 뿌려 주면 좋다고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히 둘러보니 동글동글한 똥들이 이파리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막대기들 아래마다 한 움큼씩 놓여 있었다.

 

그가 새로운 희망이라며 나를 이끌어 보여준 묘목장은 그냥 농장 한켠 나무 그늘 아래였다. 이 묘목들이 좀 더 자라면 커피밭의 죽은 나무들을 베어 내고 옮겨 심을 예정이라고 한다. 품종은 뭐냐고 물었더니, 정부 관계자가 튼튼한 품종이라고 해서 심었는데 이름은 파카스Pacas라고 한다. 사실 파카스는 로야에 매우 취약한 품종으로 업계에 널리 알려진 품종이다. 차마 이 얘기를 그의 새로운 희망들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세르비시오는 외국 커피 회사가 새로 대여해 준 수동식 펄퍼(Pulper, 커피 체리 껍질 벗기는 가공 기계)를 보여주겠다며 낡은 창고 문을 열었다. 낮인데도 문 안쪽은 매우 어두웠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제서야 살림살이들을 드러냈다. 거긴 그의 집이었다. 방 한켠 매트리스 위에는 그의 아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 문

문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는 환영이 하나 있다. 이제 막 불이 꺼진 어두운 극장 안. 영화가 곧 시작하려는 찰나, 출입문이 살짝 덜 닫혔는지 빛이 새어나와 문의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아주 희미한 빛이어서 눈이 부시거나 영화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했지만 나는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에 집중하지 못했다. 실루엣으로 빛나는 문은 내게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언제나 영화의 설레임을 압도했다. 

 

나는 그 이후로 교실에 앉아서도, 내 방 침대에 누워서도 문 밖을 상상하며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어른들의 시간을 견뎌 나갔다. 이 세상이 만들어 내는 모든 기쁨과 슬픔, 의미와 무의미, 감각의 다발들이 극장 영화처럼 언젠가 끝날 것이라 믿으며 깊이 몰입하지 못했다. 그 때는 문을 열어도 열어도 끝없이 문으로 이어지는 현실로서의 세상에 대해서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매혹에 사로잡힌 손은 지금도 여전히 문고리를 쫓고 있다.  위로가 되는 한 마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요나단

호텔 방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Pil, vamos(가자!)”

 

문을 열고 서 있는 녀석의 그림자가 아침 햇살에 침대 맡까지 길게 걸려 있었다.

다음 농장은 어디였더라, 눈을 비볐다.

 

이곳은 위도 0도선, 적도가 지나는 곳, 에콰도르.

 

2015.10.30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큐그레이더 1호. 줌닷컴에 글을 연재중이며 '커피 리브레'의 대표로 활동중이다.
채널명
서필훈
소개글
대한민국 큐그레이더 1호. 줌닷컴에 글을 연재중이며 '커피 리브레'의 대표로 활동중이다.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Copyright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