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반한 계곡, 여인이 사랑한 폭포

[여행]by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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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 기암절벽. 창고천이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아 흘러간다. [사진/진성철 기자]

여름이 오면, 제주 선비들은 계곡에서 시를 읊었고, 제주 여인들은 폭포에서 물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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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돈내코 계곡의 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 추사 김정희가 좋아한 안덕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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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교 위에서 바라본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 서귀포에는 유배당한 선비들이 좋아하던 계곡이 있다. 계곡 자체가 천연물 제377호다. 기암절벽과 상록수림으로 숨겨져 있어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귀양 온 추사 김정희와 권진응, 임관주 등 조선 후기 선비들이 즐겨 찾아 글을 읽고 시를 읊었던 안덕계곡이다.


안덕면 감산리에 있는 이 계곡은 어쩌면 잊혀 가는 명소일 수도 있다. 안덕면 사계리 포구의 식당 직원에게 말을 거니 "뭐 볼 게 없어서 안 가봤어요"란 답이 돌아왔다. 한때는 유료관광지였으나 방문객이 줄어 무료 개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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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는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안덕계곡은 직접 들어가 봐야 그 멋을 알 수 있다. 한라산 남서쪽으로 흐르는 창고천이 기암절벽을 끼고 돌아 나오는 지점이 가장 멋지다. 주차장에서 걸어 10여 분이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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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면 감산리 해안에 있는 박수기정. 대평리 포구에서 잘 보인다. [사진/진성철 기자]

감산리 해안에 있는 박수기정이 잘 보이는, 대평리 포구 가는 길 초입에 주차장이 있다. 박수기정은 바가지로 마실 샘물(박수)이 솟는 절벽(기정)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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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 입구의 돌하르방(왼쪽)과 용천수인 조배남송이. [사진/진성철 기자]

안덕계곡 입구로 걸어가면 돌하르방이 서 있다. 그곳에서 길은 돌로 포장된 안덕계곡 가는 방향과 나무 데크로 된 샛소다리 쪽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샛소다리로 향했다. 짧은 나무 데크 길이 끝나는 곳에 우물이 하나 보였다. 용천수가 솟는 '조배남송이'다. '조배남'은 구실잣밤나무를 말하고 '송이'는 샘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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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 아래 바위 그늘 집터 [사진/진성철 기자]

길을 되돌아 안덕계곡으로 갔다. 바위 절벽 아래와 주상절리 아래 언덕에 동굴이 하나씩 보였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바위 그늘 집터다. 집터 샘물도 두 곳이 있다. 여기서는 토기와 곡물을 빻는 데 사용한 공잇돌이 발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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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유료관광지 개발 때 장식용으로 가져다 둔 연자매를 지나면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게 된다. 계곡은 암반이 넓게 펼쳐있고, 절벽이 양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암벽 위와 계곡 언덕에는 나무들이 울창하다. 물길은 크지 않지만 물장난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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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계곡 바닥 가운데 섰다. 눈은 절로 앞에 보이는 절벽 사이의 검은 곳에 닿았다. 계곡 양쪽의 깎아지른 두 절벽과 울창한 푸른 나뭇잎들이 빛을 가려버린 공간이다. 검은 어둠에서부터 물길이 흘러 내려오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안덕계곡 기암절벽 [사진/진성철 기자]

때마침 검은 공간 바로 앞에 선 여인의 붉은 원피스가 눈에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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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 기암절벽 [사진/진성철 기자]

기암절벽에 이르니, 이번엔 어두운 기암절벽을 가운데 두고 양쪽 계곡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눈 부셨다. 우뚝 솟은 절벽과 그 아래 넓은 못에 담긴 신록, 절벽을 휘감아 돌아 나가는 창고천, 협곡으로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강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안덕계곡이었다.


계곡 안에서 본 풍경에 감탄해 계곡 바로 위를 지나는 안덕교에 섰다. 그냥 지나칠 때 알 수 없었던 계곡이 더 깊어 보였다. 글 읽는 선비들이 반할 만한 계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 여인들이 사랑하는 원앙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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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 돈내코 계곡에는 여자들이 사랑하는 폭포가 있다. 높이는 5m 정도로 낮지만, 크고 작은 물줄기 한 쌍이 양 갈래로 떨어지는 원앙폭포다. 금실 좋은 원앙 한 쌍이 살았다고 '원앙폭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큰 물줄기 옆으로는 원앙 새끼들 마냥 조그만 물줄기도 흘러내린다. 매년 백중날이면 제주 여인들이 여름철 물맞이를 했던 곳으로 이름난 폭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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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폭포가 떨어지는 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가물었던 제주에 며칠간 비가 내려 원앙폭포는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원앙폭포를 찾은 이 날도 흐리고 부슬비가 내렸다. 기온은 20℃ 초반으로 서늘했다. 폭포 아래에는 물놀이할 수 있는 제법 넓은 소(沼)가 있다. 주변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 계곡의 바위들 위엔 현무암으로 쌓은 돌탑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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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폭포 아래 소에 수영하러 가는 여성들 [사진/진성철 기자]

젊은 여성 두 명이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영복 차림이다. "물에 들어가실 거예요"라고 물으니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물은 허리께에 닿았고, 맑고 투명한 초록 물속에 여인의 하얀 발이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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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폭포 폭포수를 맞는 여성과 사진 촬영하는 친구 [사진/진성철 기자]

그들은 "아! 차가워"를 외치면서도 두어 차례 연못에서 헤엄을 쳤다. 그리곤 한 명은 큰 물줄기의 원앙폭포까지 걸어가 여름날의 폭포수를 맞았다. 친구는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하나 건졌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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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폭포에서 물멍을 즐기는 여인들 [사진/진성철 기자]

중년의 두 여인은 짙푸른 이끼가 뒤덮은 바위들 사이에 조용히 앉았다. 핑크빛 우산을 받쳐 들고 20여 분가량 속칭 '물멍'을 즐겼다.


물멍을 끝내고 일어서며 "생각이 끊어져서 좋아요"라고 한 여인이 근사한 답을 남겼다. 또 "걸어 걸어 어디론가 가겠죠"라고 했다. 친구는 "맑은 날에 오면 더 예뻐요"라고 귀띔했다. 원앙폭포의 소가 흐린 날엔 무채색이지만 맑은 날엔 영롱한 에메랄드빛이 나는 까닭이다.

◇ 지나치면 섭섭한 제주바당과 사계리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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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면 사계리 해변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에 왔으니 바다를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다. 요즘 인기 있는 사계 해변과 포구, 설쿰바당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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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해변의 바다로 뻗어있는 넓은 바위 터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해변은 넓게 펼쳐진 평평한 바위, 바다로 길게 뻗어있는 현무암 덩어리들, 모래 해변의 순비기나무 등이 바다와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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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리 앞바다 형제섬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해변 형제섬 쉼터에 앉으니 종 모양을 닮은 산방산, 용머리 해안, 감산리 박수기정 등이 왼쪽으로 보였고, 앞바다에는 형제섬이, 그리고 송악산이 오른쪽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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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리 해변, 사계 포구, 용머리 해안, 한라산이 앞에서부터 차례로 보인다. [사진/진성철 기자]

상모리로 넘어가는 해변 끝에는 사람, 사슴, 말 발자국 등 화석 흔적이 남은 넓은 바위 터가 있다. 이곳 화석 산지는 출입 금지라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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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기나무들이 자라는 사계리 해변 언덕과 산방산 [사진/진성철 기자]

해변을 따라 있는 낮은 언덕에는 발목 높이로 순비기나무가 빼곡히 자랐다. 사계 포구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순비기나무를 순베기, 순북이라고 했다. 열매를 따 베개를 만들면 아이들 건강과 두통에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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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리 해변 현무암에 부딪히는 파도 [사진/진성철 기자]

모래 해변 곳곳에는 파도에 아랫부분이 패이고 위에는 큰 구멍들이 군데군데 난 바위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의 검은 현무암들 사이사이로 부딪치는 파도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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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포구에 있는 해녀 동상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포구는 해녀로 널리 알려졌다. 포구에는 현무암으로 벽을 장식한 해녀 탈의실과 해녀의 물질 장비들이 보관된 곳이 있다. 해녀 동상도 있고, 1991년 러시아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동행한 라이사 여사가 해녀들과 정겹게 얘기하는 조형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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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쿰바당 용암언덕에서 바라본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포구에서 용머리 해안 쪽 해변은 설쿰바당이란 이름이 가졌다. 설쿰은 '바람 때문에 쌓인 눈에 구멍이 뚫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설쿰바당 용암 언덕에는 현무암이 덩어리로 뭉쳐 바위 언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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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쿰바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자들 [사진/진성철 기자]

바람이 세찬 날 설쿰바당에선 바람을 맞다 기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듣다 하늘로 불쑥 솟은 산방산 한번 보고, 파도 소리를 듣다 바다로 튀어나온 용머리 해안 한번 바라보니 기분이 오히려 웅장해졌다. 한 청년도 그렇게 한 시간여 바람과 맞서다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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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쿰바당 용암 언덕에서 한 청년이 거센 바람을 맞고 있다. [사진/진성철 기자]

(서귀포=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zjin@yna.co.kr

2022.08.0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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