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으므로, 충만한
베이징 도시 도서관부터 제주 애월한거까지, 사유와 몰입을 주제로 한 세계의 특별한 건축 여행지를 소개한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감상과 성찰이 흐른다.
들어서는 것만으로 몰입에 공명하는 전 세계의 공간.
베이징 도시 도서관 모든 사진 © Snøhetta |
감상과 사유로 향하는 책의 계곡
베이징 도시 도서관
중국 베이징
정보의 디지털화, 독서량 감소 등으로 종이책과 도서관의 위기를 논할 때 베이징은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건축 면적 7만5000m2, 장서 800만 권, 열람석 2400석 규모의 거대한 시립도서관을 세운 것이다. 이 대규모 도서관 프로젝트는 노르웨이의 유명 건축사무소 스뇌헤타(Snøhetta)가 맡았다.
스뇌헤타는 중국 전통과 지역 특색 반영, 저탄소·태양광 발전 시스템 등 지속 가능한 설계라는 임무 외에 도서관의 가치를 되살린다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졌다. 도서관을 단순한 책 저장고가 아니라 책에서 얻은 사유와 감정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이다.
도서관 건물을 관통하는 주요 동선인 ‘밸리’는 퉁후이강을 닮았다. 물길처럼 흐르고 때로 고이는 동선은 책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사람들을 다양한 책과 자료가 있는 공간으로 자연스레 이끈다. 밸리 양쪽에는 계단 언덕이 있다.
앉을 곳과 책장을 겸하는 이 언덕에서 사람들은 책장을 넘기고 때로 서로의 감상을 나눈다. 오롯이 책에만 집중하고 싶은 독서가들을 위한 열람실이 따로 있으니, 이곳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고 눈치 줄 이도 없다.
© SIMOSE ART MUSEUM |
물 위에 오롯이 작품과 나
시모세 미술관
일본 히로시마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화나 드라마 속 연인들의 데이트 장면에 뱃놀이(한강의 오리배 포함)가 흔히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물 위에 오롯이 그대와 나’라는 환경이 서로에게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의 시모세 미술관도 그러하다.
세계적인 건축가 반 시게루는 세토 내해의 섬에서 영감을 받아 물 위에 떠 있는 전시 공간을 설계했다. 바지선 위에 올린 8개의 이동식 갤러리는 전시 내용에 따라 일곱 가지 방식으로 재배치가 가능하며, 중장비 없이 두어 사람만 힘을 모으면 손쉽게 옮길 수 있다.
구조적 독창성에 더해 전시실의 외관 색채 또한 눈길을 끈다. 핑크, 오렌지, 바이올렛 등의 유리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자, 수면 위 잔물결에 반사되며 풍경을 배가한다. 시모세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 중 하나도 프랑스 작가 에밀 갈레의 유리공예 작품이다.
아울러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식물들을 세토우치의 기후에 맞게 심어놓은 정원은 건축과 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또 하나의 작품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 © 애월한거 |
물가의 달 속에 한가로이 머물러
애월한거
한국 제주
물가 ‘애(涯)’에 달(月)을 띄워 ‘물가의 달’이라 이름 붙은 동네. 제주시 서쪽 애월읍에 오래된 소나무를 벗 삼은 사색의 공간, 애월한거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이곳을 설계한 현대건축의 거장 승효상 건축가는 이 땅을 지켜온 소나무에 경의를 표하며 단 한 그루의 나무도 해치지 않도록 설계에 공을 들였다.
독채와 각 방마다 이름에 소나무 송(松) 자가 들어갈 정도로, 이 땅의 터줏대감에 대한 대접이 극진하다. 달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시간조차 느릿하게 흐르는 고요한 땅 위에 14채의 독채가 놓여 있고, 소나무 숲 사이 굽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색을 거들듯 개성 있는 공용 시설이 손님을 맞는다.
초지에서 말을 풀어 기르는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 목욕탕 ‘세월루’와 ‘세화루’에서는 세상의 시름을 씻어내고, 다실 ‘다암’에서는 찻잔을 들고 물 위에 뜬 마루에 앉으면 선경(仙境)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조용히 머물며 깊이 성찰하고 마음껏 사유하는 장소이기를 바란다”는 건축가의 바람이 곳곳에 스며 있다.
© Paul Hester(courtesy of the Rothko Chapel) |
오늘의 어린 왕자들을 위하여
로스코 채플
미국 휴스턴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비행사는 작은 구멍이 세 개 난 상자를 그려주었고, 어린 왕자는 그 안에서 자신이 찾던 예쁜 양을 만난다. 미국 휴스턴의 한적한 동네에 자리한 로스코 채플도 이 상자와 닮아 있다.
팔각형의 고요한 공간을 채운 것은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다. 회색과 짙은 남색 등으로 칠해진 커다란 캔버스는 언뜻 단조로워 보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미묘한 색의 층과 빛의 변화가 드러나고 보는 이의 마음이 투영되며 각자 다른 체험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또 어떤 이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다. 때로는 같은 고민을 품은 사람들이 이 공간에 모여 이웃과 사회를 위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름에 ‘채플’이 붙어 있다고 해서 특정 종교를 위한 시설은 아니다.
성경뿐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의 경전이 함께 놓여 있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 동네 주민부터 명상의 시간을 찾아온 방탄소년단 RM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몰입의 순간을 거쳐 자신만의 예쁜 양을 발견한다.
![]() © Nightingale Housing |
‘우리 집’에 대한 끈질긴 사유
나이팅게일 빌리지
호주 멜버른
‘이익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짓는 집.’ 투기로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서 ‘우리 집’의 본질에 집중한 6개 건축팀이 멜버른 브런즈윅에 집을 지어 올렸다. 한 팀이 하나씩 각자의 개성을 담아 설계했지만, 사람과 환경을 최우선에 둔다는 목표는 동일하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으며, 자전거 주차 공간을 충분히 마련하고, 옥상에는 정원을 조성했다. 각 건물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태양광발전, 빗물 재활용, 고효율 히트펌프 시스템 등으로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다. 살기 좋은 만큼 집값은 오르기 마련.
그런데 나이팅게일 빌리지 팀은 토지 구입, 설계와 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만 반영해 집값을 책정했다. 청년부터 노년까지, 1인 가구와 아이들이 있는 가정까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이 주거권을 보장받도록 돕기 위함이다.
나이팅게일 빌리지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실험이자 새로운 주거 형태의 선언이다. 이익보다 사람과 환경, 공동체를 먼저 세운 이곳은 집을 짓는 일이 곧 우리 삶을 짓는 일임을 증명한다.
전수아(객원에디터) denmagazine@mcircle.biz
박유리 에디터 abrazo@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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