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이 가득한 집

온갖 유용하고 무용한 것이 벌이는 취향의 각축전,

디뮤지엄 <취향가옥 2: Art in Life, Life in Art 2>.

첫 번째 집
스플릿 하우스

M2, 스플릿 하우스에 들어서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분명 전시장인데 어딘가 생활감이 묻어난다. 거대한 작품이 공간을 채우고 파티션은 빛을 절제해 화면으로 시선을 모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분위기’다. 


컬렉터의 소장품은 그 자체로 강력하지만 진짜 볼거리는 서로 다른 것이 같은 공간에서 빚어내는 조화다.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지는 공간 전체를 시야에 두고,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편안함 속에서 ‘안목’을 즐겨보자.

©디뮤지엄<p>

©디뮤지엄

첫 장면은 좁은 복도에서 시작된다. 바둑판처럼 배열된 노란 정사각형 아홉 개, 토리 베그의 ‘노랗게 보이는 9’가 정면에 선다. 발치에는 윤상현의 도자기 작품이 놓여 유백색과 노랑이 은근한 대비를 만든다. 지나가는 복도조차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되는 이유. ‘노랗게 보이는 9’는 멀리서 보면 한 가지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여러 색이 층을 이루고 칠의 높낮이가 겹쳐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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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진 실내로 들어오면 베이지 톤의 대형 캔버스, 김창열의 ‘물방울 ENS 204’가 시선을 끈다. 조도에 따라 물방울이 가진 생생한 볼륨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원목 프레임과 낮은 테이블이 그 변화를 담담하게 받친다. 작품 앞 크림색 암체어는 감상석이 아니라 생활의 자리다. 이 의자는 세련된 간결함의 대명사가 된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폴랑의 ‘알파 클럽 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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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보여주는 것은 컬렉터의 ‘편집 감각’이다. 김창열, 이우환 같은 거장의 작업뿐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의 ‘정사각형 속 얼굴’처럼 예상 밖의 작품도 신성시되지 않는다. 오리지널 가구와 오브제가 자연스럽게 합류하며 회화, 도자, 사진의 경계가 낮아진다. 이 방에서는 작품의 이력보다 맡은 역할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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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돌면 템포가 바뀐다. 이우환의 ‘바람과 함께’와 ‘조응’이 화면을 양쪽에서 지휘한다. 두툼하게 올린 흰 스트로크에서는 손끝의 압력이 먼저 느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품의 설치 높이다. 눈높이가 아니라 생활 높이에 맞춰 걸어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물렀다가 동선을 따라 넘어간다.

두 번째 집
테라스 하우스

한 층 올라선 M3, 테라스 하우스에 들어서면 빛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개성이 뚜렷한 조명들이 서로 다른 어조로 공간을 채우며 시선에 리듬을 만든다. 흐린 날이나 해가 진 뒤에도 이곳이 여전히 또렷한 이유는 빛이 공간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방마다 달리 쓰인 빛을 하나씩 대조해 보는 일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감상거리가 된다. 빛의 반사는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고 의도적으로 만든 차광은 시선이 쉬어가는 고요함이 된다. 작품보다 더욱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 사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명암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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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룸의 빛은 작품의 질감을 끌어올린다. 하종현의 ‘접합 93-024’(왼쪽)와 ‘접합 93-011’(오른쪽)이 마주 선 방. 단색화적 매력을 지닌 두 작품은 캔버스 뒷면에서 안료를 전면으로 밀어내는 ‘배압법’으로 탄생했다.


멀리서 보면 굵게 보이는 선도 가까이 다가서면 작은 틈을 뚫고 나온 만큼 가늘고 섬세하게 드러난다. 두툼한 물감의 결이 마치 파도처럼 솟아 있다. 바닥의 이재하 ‘ORB’ 시리즈는 어두운 톤으로 주변 밝기를 낮춰 화면의 밀도를 차분히 올린다. 웅장함 속에 숨은 섬세함이 이곳의 매력이다. 고요한 집중에 잠시 머물며 작품과 마주하는 몰입에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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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룸에선 빛의 반사가 장면을 주도한다. 금속 디스크가 무리 지어 엮인 샹들리에 ‘미러 브랜치’가 천장에 걸려 작은 원형 면들이 사방에서 빛을 튕긴다. 벽과 천장에 비늘 같은 반짝임이 생기고 낮은 소파와 러그는 그 반짝임을 누르듯 매트를 깔아준다. 벽면의 그래픽한 연작은 선명한 하이라이트를 만든다. 마블 벽난로와 스테레오 옆 작은 테이블은 공간의 시선을 빼앗는 리듬 포인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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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코너에서는 차광의 미학이 드러난다. ‘PH Artichoke’는 국내에도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루이스 폴센의 인기작이자 대표작. 식물의 이름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명처럼 금속 잎으로 겹겹이 쌓아 만든 펜던트가 눈부심을 차단하고 아래쪽으로만 부드럽게 빛을 흘린다. 직접광을 숨기고 간접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유연한 명암이 테이블의 경계를 흐린다. 아름다움은 형태에서 시작되지만 머무르게 하는 힘은 눈부심 없는 빛, 그 조용한 배려에서 온다.

프라이빗 컬렉션 룸 키치 유니버스

개인 컬렉터들의 프라이빗 소장품을 만나는 공간 ‘키치 유니버스’는 네 개의 방으로 열린다. 연출이 아니라 실제 수집의 결과물, 그것도 오랜 시간 한 사람의 호흡으로 축적된 것이다. 귀엽고 가벼워 보이는 물건일수록 애정과 집요함이 더 많이 쌓인다. 이곳에서 키치는 과장이 아니라 애정의 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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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 컬렉터의 집 — 고기환 컬렉터


피카츄와 스누피가 등장하는 그라플렉스의 판화가 벽을 따라 이어지고 빈티지 오디오와 모듈 선반, 푹신한 1인용 체어가 생활의 높이를 만든다. ‘HUMAN MADE’와 ‘KAWS’를 좋아하는 이 공간의 주인 고기환은 만화, 게임, 스트리트 그래픽 같은 대중 이미지에서 에너지를 채집해 온 서브컬처 컬렉터다. 


장르 구분 대신 ‘좋아하는 것들이 함께 놓였을 때 생기는 분위기’를 중시한 덕분에 그의 방은 작품과 오브제가 경쟁하지 않고 같은 문장 안에서 호흡한다.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옥승철 작가의 작품. 개성이 뚜렷한 오브제가 욕실의 수전과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닫힌 눈의 고요가 물소리를 듣는 표정이 되어 편안한 몰입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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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카 갤러리 — 컬렉터 K


사방이 유리 장으로 둘러싸인 방. 트럭, 버스, 레이싱카, 크레인까지 스케일 모델이 카테고리별로 줄을 맞춘다. 한눈에 보기 좋게 배열하고, 빠르게 찾아 꺼낼 수 있게 정리한 ‘보는 수납’의 교과서. 차종, 바퀴 크기, 연식의 변주가 방 전체를 거대한 데이터로 만든다. 뉴 엘란트라와 그라나다를 보고 반가움에 ‘앗!’ 소리치지 말자. 애써 숨긴 나이를 들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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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서핑 룸 — 이종호 컬렉터


체커보드 타일 위에 보드가 수평으로 걸리고, 벽면에는 핀과 덱이 모여 작은 역사관을 이룬다. 사용감이 남은 각기 다른 곡선의 핀과 스케이트보드 덱이 한 벽을 채운다. 컬렉터 이종호는 파도와 거리를 누빈 보드의 시간까지 모으는 사람이다. ‘타던 것’의 흔적을 그대로 수집하고 스크래치와 수리 자국을 가리지 않는 태도가 수집의 미학을 정한다. 


파도를 타는 서핑보드와 거리를 활개한 스케이트보드의 곡선처럼 그의 컬렉션도 완만한 둥근 선을 그리며 오래도록 축적된다. 거리의 예술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배리 맥기의 레트로 향 짙은 작품이 빈티지 보드 위를 장식해 서로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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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캐비닛 — 컬렉터 K


파이프 선반에 넥타이가 층층이 걸렸다. 캐릭터, 도트, 스트라이프, 기하학 패턴까지 넓은 넥타이 속 그림으로 1990년대 감성이 벽을 가득 메운다. 이곳에서 넥타이는 남성의 무게를 나타내거나 멋을 표현하는 상징이 아니라 ‘반복의 기록’이 된다. 디즈니와 루니툰에서 활약한 여러 캐릭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넥타이 속에서 인사하는 각자의 추억 속 캐릭터를 찾아 컬렉터 K의 시간 여행에 동참해 보자.

세 번째 집
듀플렉스 하우스

전시의 마지막 층 M4, 듀플렉스 하우스는 기술과 예술, 과거와 미래가 유쾌하게 부딪히는 공간이다. 백남준의 작업이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을 열고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적 문법이 일상의 경계를 가볍게 흔든다. 이곳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걸지만  ‘레트로 퓨처’라는 하나의 풍경으로 수렴된다. 이제 시간을 가로지르는 체험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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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 듀플렉스 하우스로 들어서는 순간 몰입의 템포가 바뀐다. 마치 정글처럼 우거진 나무 사이로 쌓아 올린 33대의 TV가 보인다. 백남준의 ‘사과나무’다. 작가는 TV 불빛과 나무가 광합성해 생긴 산소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그렸다. 나무 모양 TV에 오래된 신호가 점멸할 때마다 시야가 자연스레 화면에 모인다. 가벼운 몰입의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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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복도를 지나 만난 방은 원과 선, 빛과 각이 공존한다. 세라 모리스의 ‘1952(고리)’가 도시의 연결성과 순환성을 나타내는 화려한 색감의 고리로 겹쳐진 ‘원’의 리듬을 터뜨리고 ‘각’을 세운 블랙 암체어는 ‘앉아서 보라’는 감상의 자세로 차분한 절제감을 더한다. 세라 모리스의 작품과 독일 가구 브랜드 무어만의 의자 ‘부키니스트’는 강한 색과 절제된 여백, 곡선과 직선, 앉음과 시선 등 상반된 요소를 끊임없이 교차하지만 그럴수록 집중은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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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은 몰입의 속도를 올린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불완전한 회화’ 속 강렬한 네온 컬러 라인이 공중을 채우면, 아트 퍼니처의 틀을 닦은 웬델 캐슬의 목재 체어 ‘Prophet’과 우발트 클루그의 ‘DS-1025, Terrazza’가 묵직한 베이스를 깐다. 여기에 통통 튀는 듯한 양승진의 ‘블로잉 시리즈’까지 공존해 서로 다른 성격의 의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앉으면 안 될 것 같은 의자’와 ‘앉아도 될 것 같은 조형 작품’이 한 프레임에 담긴다.  

취향가옥 2: Art in Life, Life in Art 2

· 기간: 2025년 6월 28일~2026년 2월 22일

· 장소: 디뮤지엄

· 문의: 02-6233-7200

윤영준(객원에디터) denmagazine@mcircle.biz

박유리 에디터 abrazo@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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