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된 세계 혹은 시계
초고가 럭셔리 시계와 초저가 가성비 시계로 양극화된 시계 시장. 시계가 시간을 넘어 지위와 취향, 자기표현의 기호로 변해가는 흐름을 살펴본다.
아주 싸거나 아주 비싸거나. 시계 시장이 양극단으로 갈라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양극화로 치닫는 추세다. 유동성과 희소성이 있는 자산은 가치가 더욱 치솟고,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이들은 아예 자산 취득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 이런 부의 불균형은 부동산이나 주식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손목 위 작은 물건에도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시계 시장은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한편에서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초고가 럭셔리 워치가 리세일 마켓에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몇만 원대의 초저가 시계가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우리가 사는(living) 세계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buying) 시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손목 위 성공의 척도
ⓒ롤렉스 |
ⓒ오데마 피게 |
사실 손목에 착용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초고가 시계와 초저가 시계는 전혀 다른 시장에 놓여 있다. 시계는 본래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로 출발했지만 롤렉스,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리차드 밀 같은 럭셔리 브랜드 시계는 단순히 기능이나 기술적 완성도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와, 타인과 구별되고자 하는 사회적 욕망이 함께 담겨 있다. 오래전부터 초고가 시계는 성공과 지위를 상징하는 기호이자, 일정한 자산가치를 보전하는 금융상품으로 기능해 왔다.
초고가 시계의 금융상품화는 경제구조의 불균형과도 맞닿아 있다. 희소성이 가격을 끌어올리고, 리세일 마켓은 그 희소성을 자산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이던 시계가 이제는 부를 측정하는 도구가 된 셈이다.
가성비 시계의 대표 주자, 카시오
카시오 ‘A158W’. ⓒ카시오 |
지샥(G-SHOCK). ⓒ카시오 |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범접할 수 없는 시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편 극단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수만 원에서 수십만 원대의 저렴한 손목시계가, 스마트워치 시대에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카시오의 디지털 시계 A158W다. 1989년 출시된 이후 오리지널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해 온 스테디셀러로, 매우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품질과 사용성을 제공한다. 최근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오히려 과거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인 손석희 씨가 착용한 시계로 잘 알려져 있다.
카시오의 MDV-106도 가성비 좋은 다이버 워치 중 하나다. 빌 게이츠가 착용하는 시계로 유명하다. 약 10만원에 다이버 워치의 핵심 디자인을 고품질로 담아냈다. 특히 다이얼에 새겨진 흑새치 문양 때문에 ‘흑새치’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같은 브랜드의 툴 워치 지샥(G-SHOCK) 역시 빼놓을 수 없다. DW-5600은 오리지널 디자인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일명 ‘지얄오크’라 불리는 GA-2100은 로열 오크 스타일의 팔각 디자인으로 지샥의 매출을 견인하는 중이다.
이 밖에 세이코, 시티즌 등 다른 일본 브랜드에도 가성비 좋은 인기 모델이 대거 포진해 있다. 카시오가 워낙 저렴할 뿐, 이들 시계도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대다.
레트로 열풍과 함께 돌아온 타이맥스
ⓒ타이맥스 |
일본에 카시오가 있다면, 미국에는 타이맥스가 있다. 타이맥스는 1800년대 중반부터 대중을 위한 시계를 만들어온 브랜드다. 그런데 오늘날 레트로 열풍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특히 2019년 출시한 Q 타이맥스는 1979년 모델의 복각판으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1960년대 스타일의 멀린, 필드 워치 익스페디션 등이 사랑받고 있다.
광활한 우주를 품은 문스와치
문스와치 ‘미션 투 주피터’. ⓒ스와치 |
문스와치 ‘미션 투 마스’. ⓒ스와치 |
스위스 시계 중 가성비를 꼽자면, 역시 스와치다. 그중에서도 같은 그룹의 오메가와 협업한 ‘문스와치’는 코로나19 시기, 전 세계 스와치 매장에 오픈런을 일으킨 히트작이다. 바이오세라믹 소재를 활용해 저렴한 가격에 문워치 디자인을 재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성비로만 승부하는 시계는 아니다. 우주와 문워치의 헤리티지를 기반으로 한 재밌는 스토리텔링과 기능적 변주도 흥미롭다. 과거 알래스카 프로젝트를 오마주한 ‘미션 투 마스’, 19시간 65초를 계측하는 ‘문스와치 1965’, 달에서 바라본 지구를 표시하는 ‘미션 투 어스페이즈’ 모델이 대표적이다.
무게감에 맞선 경쾌한 반동
재밌는 점은, 값비싼 럭셔리 시계를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최근에는 이런 저렴한 시계를 즐긴다고 한다. SNS에는 명품 옷에 문스와치를 매치한 인플루언서가 넘쳐나고, 빌 게이츠를 비롯한 갑부들이 착용한 저렴한 시계가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다.
지위와 충돌하는 시계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이른바 ‘Anti-Status Watch’ 현상이다. 그들은 저렴한 시계를 착용함으로써 ‘비싼 시계를 차지 않아도 충분히 멋있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저가 시계의 매력은 단순히 가성비에 머물지 않는다. 진정한 무기는 ‘가벼움’과 ‘경쾌함’에 있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히 시계를 착용하고, 흠집이 나거나 심지어 잃어버려도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움 말이다. 가볍고 키치한 시계는 고급 시계의 긴장감과 무게감에 대한 유쾌한 반동이다. 저가 시계는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우리 삶을 가볍게 돌려놓는다.
과시가 아닌 자기표현의 수단
최근 저가 시계의 유행에는 대중의 심리도 반영되어 있다. 명품 시계는 여전히 지위를 상징하지만, 그 상징성이 너무나 흔하고 지루해졌다. 자산이 넘쳐나는 시대, 양극화가 심화돼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시대에 ‘돈이 많다’는 것은 더 이상 내세울 만한 가치가 아니다. 워런 버핏이 마지막 편지에 적었듯, 진정한 위대함은 돈이나 권력으로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급 시계가 선사하는 상징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제 다른 언어로 마감된 새로운 시계를 찾는다. 경제적 능력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관점과 취향으로 멋을 드러내고 싶다는 것. 카시오, 타이맥스, 문스와치 같은 시계는 이런 시대적 욕망을 반영하는 아이템이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과시보다 자기 위로가,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현재를 즐기는 소비가 늘고 있다. 저가 시계의 유행에는 이런 심리 역시 발현되어 있다. 10만원 안팎의 소소한 사치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감정이 각인되어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
결국 시계 시장의 양극화는 가격의 양극화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프랑스 사회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가 말했듯, 현대 소비는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의 문제다. 초고가 럭셔리 시계가 ‘지위의 기호’로 작동한다면,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 저가 시계는 그 기호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역기호(anti-sign)’로서 존재한다.
저가 시계의 가벼움은 어쩌면 경제적 양극화 시대에 누구나 시계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문스와치 같은 시계가 양극단을 오가며 서로의 장벽을 낮춰 주는 것이다. 사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가격에 관계없이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시계에 관심 없는 군중 사이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결국 양극화는 시장을 갈라놓았지만, 취향은 우리를 다시 이어줄 것이다.
이상우([클로카 매거진] 에디터) denmagazine@mcircle.biz
조윤주 에디터 yunjj@mcircle.biz
추천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