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도 안 가보고 파타고니아를 걷기까지
70대 초보 여행자가 직접 남미 파타고니아를 걸으며 얻은 감동과 성찰. 마추픽추를 넘어 대자연 속 트레킹에서 경험한 특별한 여정을 전합니다.
70대 초보 트레커가 직접 걸어보고 느낀 것.
![]() ⓒ 조천홍 |
70대, 설렘을 찾아 떠나다
2017년 어느 날, 우연히 여행 사이트에서 짧은 기사를 발견했다. 멕시코 항공 취항 기념으로 남미 페루까지 특가 항공권이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왕복 700달러로, 당시 항공권 대비 세 배 정도 저렴했다. 남미는 긴 비행시간과 살인적인 경비 때문에 여행 마니아들조차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700달러라니. 게다가 페루에는 평생의 꿈인 마추픽추가 있었다. 큰 고민 없이 페루행을 결정했다.
막상 페루에 간다고 하니, 30여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면서 마추픽추만 보고 온다는 게 왠지 아쉬웠다. 페루 주변에 갈 만한 곳이 또 없을까 지도를 펼쳤다. 리마에서 남쪽으로 4600km 떨어진 곳에 있는 파타고니아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났다. 빙하와 설산, 끝없는 평원이 펼쳐진 남미 최남단. 항공권을 확인해 보니 리마에서 파타고니아까지 왕복 300달러였다.
총 1000달러로 남미 종단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고민 없이 바로 항공권을 끊었다. 항공권 결제를 마치고서야 실감했다. 제주 올레길 한 번 가본 적 없는 내가 혼자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다는 것. 그것도 70대 노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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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주는 경외감
30시간 비행은 예상대로 고행이었다. 좁은 이코노미석에 몸을 욱여넣은 채 버티다 보니 어느새 리마에 도착했다. 마추픽추의 감동을 뒤로하고 다시 경비행기에 올랐다. 아르헨티나 엘칼라파테 공항에 내리는 순간, 경이로운 광경에 압도됐다. 설산과 빙하, 끝없이 펼쳐진 평원. 미디어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풍경에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파타고니아는 페루의 마추픽추처럼 버스를 타고 올라가 사진만 찍고 내려오는 관광지가 아니다. 한반도 5배 크기의 광활한 대자연, 4000여m 높이의 설산과 빙하,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과 호수. 이 모든 것을 오직 걸어야만 볼 수 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일주일을 내리 걸어야 했다.
첫날 트레킹 코스는 20km였다. 출발선에 서면서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막상 걷기 시작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몸 어디선가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듯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에너지로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 빙하가 녹아 만든 에메랄드빛 호수, 콘도르가 날아오르는 하늘, 과나코 무리가 뛰노는 초원을 바라보며 걷는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걸음으로써 얻는 행복
트레킹을 ‘사서 고생하는 일’로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걷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트레킹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도심이든 자연이든, 장거리를 걷다 보면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 온다. 그 감각을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경험한다면 감탄과 경외로 온몸이 전율한다. 자연 깊숙이 숨은 비경(祕境)을 마주할 때면 그 감동은 배가된다. 간접경험으로는 겪을 수 없는, 오직 그 자리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 말이다.
죽기 전에 이런 곳을 볼 수 있다는 감사함. 당시 겪은 감동을 수식하려니 언어의 한계를 느낄 정도다. 차라리 말을 잃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과 자신감. 그 달콤함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세상에서 못할 게 없을 것 같은 느낌. 걷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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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길도 외롭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일종의 사치다. 물론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방심하면 길을 잃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숲속을 걸을 때면 마치 동물이 된 듯 오감이 곤두선다. 밟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느낌,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까지. 감각의 해상도가 선명하다.
길을 잃거나 날씨가 급변하는 등 위험한 순간도 찾아온다. 그러나 때로는 길에서 만난 낯선 이가 천사처럼 도움을 주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만남 역시 트레킹이 주는 선물이다.
트레킹이 준 삶의 기대
은퇴 이후 삶은 대개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간다. 단조롭고 무료하다. 노후에도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부분 사람은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나도 그랬다.
파타고니아에서 돌아온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나이와 경제력이 더 이상 핑계가 되지 않았다. 70대에도 도전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았다. 대자연 앞에서 느낀 겸허함은 일상의 사소한 욕망을 정화했다. 작은 일에 감사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 한두 시간씩 걷는 습관은 덤이다.
앞으로의 트레킹 계획은 특별히 정해 두지 않았다. 무계획이 계획이랄까. 항공 마일리지가 소멸되기 전에 슬로베니아 율리안알프스를 가볼까 생각 중이다. 하지만 가지 못한다 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 걸을 곳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조천홍(<나의 세계 트레킹 이야기> 저자) denmagazine@mcircle.biz
정지환 에디터 stop@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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