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사이에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전 세계 가든 호텔 5선을 소개합니다. 싱가포르 파크로열부터 교토 호시노야까지, 정원이 만든 쉼과 위안의 여행을 만나보세요.
“정원은 가장 순수한 즐거움이자 최고의 위안”이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가르침을 경험해 보자. 쉼에 기쁨과 위로를 더할 정원을 품은 아름다운 호텔들.
Pan Pacific Hotels Group, PARKROYAL COLLECTION Pickering, Singapore © Patrick Bingham Hall |
오늘의 정원이 만든 도시의 내일
파크로열 컬렉션 피커링
싱가포르 싱가포르섬
자연을 담은 정원의 도시 싱가포르. 도시와 자연의 경계가 희미한 여러 장소 중에서 파크로열 컬렉션 피커링은 유독 특별하다. 별다른 수사 없이도 이곳이 지니는 매력은 시선을 직관적으로 모은다. 자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면 위로 올라와 하늘로 솟은 곳.
도시의 녹지를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꿔 공공성을 확장하는 작업으로 국제 무대에서 꾸준히 주목받는 WOHA가 설계한 16층 호텔로, 367개 객실과 1만5000m2 규모의 가든과 테라스를 갖추고 있다. 대지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녹지를 수직으로 쌓아 올려 파도처럼 겹친 테라스가 바람의 길을 만들고 그 사이를 녹음이 가득 메운다.
복도를 걸으면 창이 아니라 하늘이 열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빗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서면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분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호텔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지는 이곳의 즐거움은 휴식이 아니라 리듬에 있다.
걷고 멈추고 시야가 닿는 고도를 바꾸는 동안 도시는 여전히 바쁘지만 마음은 초록 박자에 맞춰 느리게 전환된다. 수림이 디자인이 되고, 디자인이 곧 초록빛 환대가 되는 호텔. 수직으로 자라는 숲. 그 앞에 잠시 멈춰 선 뒤 안으로 들어간다.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입장하는 순간. 내일의 도시가 이런 얼굴이라면 매일 보는 풍경이 늘 반가울 것만 같다.
© 메이필드호텔 |
© 메이필드호텔 |
작은 숨이 오래 머무는 곳
메이필드호텔 서울
대한민국 서울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이토록 완벽한 자연의 안식처를 발견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메이필드호텔은 1958년부터 손수 돌봐 온 숲, 약 10만m2의 초록을 바탕으로 ‘도심 속 자연 공간’을 표방하며 들어섰다.
2003년 10월 7일 그랜드 오픈 첫날부터 이곳의 방향은 분명했다. 건물을 세우고 나무를 더한 호텔이 아니라 오래 가꾼 숲 안으로 건물이 조심스레 들어선 호텔. 이곳에서는 조경이 건축을 따라가는 대신 숲이 중심이 되고, 건물이 그 옆으로 비킨다.
덕분에 메이필드호텔은 녹지를 장식이 아니라 일상의 무대로 보여 준다. 놓쳐서는 안 될 장면은 전통 정자와 현대식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 너머로 우뚝 솟은 벨타워. 독일 쾰른 수도원에서 주조된 종은 매일 정오와 오후 6시에 울려 방문객을 환영한다.
가을 단풍에 둘러싸인 여유를 그린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완만한 곡선을 따라 벨타워 가든으로 가는 길, 나뭇가지가 액자가 되어 탑과 자연이 한 프레임에 담기고 산책하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작은 숨이 오래 머무는 곳. 마음이 맑아지고 같이 이곳을 찾은 상대의 얼굴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Four Seasons © Seet, Ken |
Four Seasons © Seet, Ken |
안개 속에서 천천히 흐르는 것들
포시즌스 호텔 항저우 앳 웨스트 레이크
중국 항저우
고요한 호수가 피워 올린 물안개가 정원으로 스며든다.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신비로움을 덧입는 이곳, 포시즌스 호텔 항저우 앳 웨스트 레이크는 수백 년을 머물러온 풍경을 닮아 있다.
설계는 미국과 홍콩을 거점으로 해 호텔, 리조트에 특화된 BLD에서 맡았다. 건축과 인테리어를 한 호흡으로 묶어 물가 길을 깔끔하게 잇고 건물 층수를 낮춰 걸음과 시야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했다.
정원 디자인은 인터컨티넨탈 다낭을 비롯해 여러 리조트 설계에서 진가를 드러낸 벤즐리(Bensley)의 작품이다. 열대와 온난 기후 식재를 정교하게 배열하고 그늘과 바람, 물소리를 동선을 따라 단계적으로 겹치도록 배치해 걷는 동안 장면이 자연스레 바뀐다.
동양적인 매력을 한껏 품은 정원은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걷는 속도를 천천히 낮춘다. 중국 정원이 지닌 여백의 미학. 물과 돌, 바람과 그늘이 차례로 말을 건네면 사람은 말 대신 숨으로 대답하게 된다. 천년 전 시인이 찾아 헤맸을 그 고요가 지금 여기 머문다. 물결처럼 잔잔하게.
© Cliveden House(Iconic Luxury Hotels) |
© Cliveden House(Iconic Luxury Hotels) |
© Cliveden House(Iconic Luxury Hotels) |
강의 곡선과 정원의 직선이 만나
클리브던 하우스
영국 메이든헤드
절벽 끝에 선 저택 앞, 템스강은 변함없는 리듬으로 흐른다. 17세기부터 이 자리를 지켜 온 클리브던 하우스의 정원은 왕과 귀족의 발걸음이 남긴 질서를 오늘까지 전한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약 6에이커 규모의 그랜드 파르테르가 삼각과 마름모 문양으로 잔디를 엮어 강 쪽으로 길게 뻗는다. 물의 곡선과 정원의 직선이 맞물리며 풍경의 축이 또렷해진다. 본관 47개 객실과 템스강 변 스프링 코티지까지, 역사의 무대가 오늘의 숙소로 이어진다.
이곳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정원이 가진 표정을 극명하게 달리한다. 봄엔 새순이 선을 따라 오르고 여름엔 수영장 가장자리에 보랏빛 물결이 번진다. 가을엔 낙엽이 잔디에 금빛 융단을 깔고 겨울이 오면 자연은 화려함을 줄이고 절벽 아래 강물은 묵묵히 흐른다.
물론 변함을 모르는 것도 있다. 정문 앞 ‘러브 분수’(1897)는 로마에서 활동한 미국계 조각가 토머스 월도 스토리의 작품이다. 세기를 품은 땅 위에서 오늘도 누군가 천천히 걷는다. 역사는 풍경이 되고, 풍경은 다시 시간이 된다.
© Hoshino Resorts |
© Hoshino Resorts |
천년 도시가 지킨 고요
호시노야 교토
일본 교토
천년 도성이 지켜온 산과 물 사이, 아라시야마의 오이강 바로 곁에 호시노야 교토가 자리한다. 인파로 가득한 도게쓰교의 소란을 등지고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숲길을 따라 오이강을 거슬러 오르면 닿는 곳. 100년 된 료칸의 결을 살려 손본 목조건축은 25개 객실을 두고, 창은 어디서나 강과 산을 그대로 들인다.
자연에 군림하는 대신 가장 가까이에서 동화하는 위치로 객실을 배치해 숲과 강을 품고 자연의 규칙을 따른다. 객실 사이 마당은 돌길과 흙길을 교차해 걸음의 속도를 절로 늦추게 한다. 가장 안에 마련한 히든 가든은 그을린 기와와 흰 모래로 물길을 그려 넣어 물을 쓰지 않고 물길의 흐름을 표현했다.
빛은 높게 두지 않는다. 낮에는 처마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밤에는 발밑 조명이 돌의 결만 드러낸다. 사람 손을 탓지만 자연에 순응하는 미학. 강이 풍경의 축을 만들고 실내를 채운 종이와 나무가 그 호흡을 잇는다. 이곳에서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속도에 있다. 오래된 방식으로 천천히 머무는 법을 배우는 일, 그 자체가 가장 넉넉한 대접이 된다.
윤영준(객원에디터) denmagazine@mcircle.biz
박유리 에디터 abrazo@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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