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에 인간의 무기는‘스토리텔링’이다 ① [인터뷰]
문장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일까지 AI가 해내는 시대다. AI시대의 서막을 써 내려가는 지금,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갖추는 것이 미래세대를 대비하는 유일한 무기라고, 웹툰 [닥터 프로스트] 작가 이종범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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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웹툰 [닥터 프로스트] 작가
•스토리텔링 교육자
•유튜브 [이종범의 스토리캠프] 운영
하루만 지나도 새로운 AI 기술이 등장한다. 특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기던 '창작' 분야에서도 AI의 활약이 예사롭지 않다. 최근 유명 작가의 그림체와 유사한 이미지를 만드는 AI 기술이 발표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제 AI만 있다면 꽤 그럴듯한 이미지를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손때 묻지 않은 것에 감동이 깃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최근 여러 미디어와 브랜드에서 부쩍 ‘스토리텔링’을 강조한다. 영화나 문학 등에서나 쓸 법한 용어가 일상에 녹아든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자 잔해다.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대체 가능성이 언급되는 요즘, 사람 냄새 나는 흔적이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과 스토리텔링에 대한 고찰을 나누고자, 이종범 작가를 찾았다.
웹툰 [닥터 프로스트]로 잘 알려진 이종범 작가는 스토리텔링 전문가다. 단순히 이야기를 잘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스토리텔링이 감동을 주는지 분석하고 그 방법을 가르친다. 손때를 입히는 법을 가장 정교하게 아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곳곳에서 만화책 냄새가 났다. 만화에 뿌리를 둔 그의 세계관이 인테리어 곳곳에 배었다.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대화로 시작했지만, 이내 ‘이렇게 되지 않을까?’라며 천진한 상상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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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에 앞서, 스토리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거의 모든 일을 의미 있는 하나의 세트로 엮은 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를 연구하는 전문가 사이에서는 스토리를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정도로 정의하기도 한다.
흔히 스토리를 ‘다른 사람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는 여정’이라고도 말한다. 현실의 삶은 너무 유한해서,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만나고 싶은 사람보다 만나야 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 훨씬 많다.
반면에 이야기를 볼 때만큼은 되고 싶었던 존재가 되고, 갖고 싶었던 물건을 갖고, 가고 싶었던 곳에 간다. 어떤 이는 이를 ‘대리 만족’ 혹은 ‘대리 체험’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결국 한정된 삶을 확장하고,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스토리텔링은 무엇인가?
여러 이야기를 어디에, 어떻게 담을지를 포함하는 기술이다. ‘서사’라는 말은 다들 알지 않나. 서사는 의도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얽혀 어떤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이런 서사와 어떤 대상을,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까지 의도하는 이야기다. 마치 소개팅 주선자 같은 역할이다. 어떤 서사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맥락에서 만나게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단순히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떻게 연결할지, 어떻게 전달할지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가 최근 부쩍 많이 언급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야기는 인간 역사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원시시대에 ‘저 버섯 먹으면 죽는다’는 정보를 모두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이야기 덕분이었다. 단순히 "저거 먹으면 죽어"라고 말하면 잊어버릴 수 있지만 "우리 동네 놀러 오던 옆 마을 아저씨가 저거 먹고 죽었잖아"라고 얘기하면 보다 강하게 기억된다. 이렇듯 이야기는 기억을 돕고, 정보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과거에는 이야기를 극장이나 책 등으로 소비하는 데 그쳤다. 이야기와 우리 일상은 분리돼 있다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다 인지과학이나 심리학, 뇌과학을 연구하면서 ‘인간은 대부분 정보를 이야기 형태로 기억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를 브랜드 기획자와 마케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비즈니스 목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SNS가 대중화되면서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예전에는 몇몇 사람에게만 마이크가 허락됐지만 지금은 스피커 크기는 다를지언정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내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가 보고, 듣고,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지금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술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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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AI를 활용해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능력인 줄
착각에 빠진 이들이 넘쳐날 거다.
그러나 결과물이 그 자체로 오래도록
사랑받긴 어렵다. 창작자의 스토리텔링이
부재한 결과물에서 우린 감동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착한 사람이 무엇인지 묻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좋은 사람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듯, 좋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정의도 간단치 않다. 스토리텔링을 업으로 삼는 전문가의 영역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원칙은 같다.
기본적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그리고 전달되는 내용, 이렇게 세 요소에 있다. 일상적인 스토리텔링에서는 듣는 사람과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오해 없이 잘 전해지는가. 둘째는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에서 관심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가 충족된다면 좋은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바로 ‘말하는 사람의 지문’을 남기는 것이다. 듣거나 보기만 해도 ‘이건 그 사람이 한 얘기구나’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미술로 예를 들자면, 기술이 뛰어나 잘 그린 그림도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지만, 보자마자 작가를 알 수 있는 그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창작이다.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다.
최근 AI가 만드는 '지브리풍 그림'이 이슈다. 이처럼 AI를 활용해 특정한 창작자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기술로 복제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본다. 한 창작가가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면 대중은 그 창작자의 아이덴티티를 빌리고 싶어 한다. 베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술계에선 이런 전례가 많다. 어떤 창작자의 화풍이 곧 하나의 사조가 되기도 한다. ‘사조’, ‘풍’, ‘아이덴티티’라는 말이 하나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창작가가 만들어낸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가 결국 하나의 ‘풍’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요소를 AI를 통해 누구나 쉽게 가져다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종이 한 장 차이로 창의성의 종말로 갈 수도 있고, 새로운 창작 방식의 서막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시점이 그 경계 어딘가라고 생각한다.
창작자 입장에서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의외다
그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지브리풍 AI 이미지 제작 유행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중이고, 그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때는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술이 신기한 거지, 그림 자체로 감동을 받는 일은 없었다. 반면에 지금 시점에라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신작을 내면 사람들은 여전히 감동받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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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에디터 stop@mcircle.biz
송승훈 포토그래퍼 denmagazine@mcircle.b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