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망에서 재고 자산의 의미 "
반도체 패키징 소재를 종합 반도체 회사와 OSAT에 공급하다 보니 고객사의 재고 현황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그래서 업계 시황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반도체 시장 참여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고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일한 소재를 매번 언급하기 때문에 식상해 할 수 있으나 반도체 다운 사이클에서 재고의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이 가진 재고는 양날의 검과 같다. 제때 적절하게 잘 벼려진 재고는 기업에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과도한 재고는 무거워진 검과 같아 적기에 휘두를 수 없다. 즉, 건전한 재고는 전방 산업의 수요 변화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할 수 있게 한다. 악성 재고가 쌓일 경우, 기업의 실적 개선의 지연뿐만 아니라 기업이 속한 시장의 반등 시기를 늦추기도 한다.
2020년~2021년 코로나 펜더믹 기간 중, 기습적인 디지털화로 인해 반도체 산업은 전례 없는 성장을 했다. 일부 산업군의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인해 패닉 바잉이 한동안 이어졌다. 마치 성장이 지속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너도나도 재고 확보에 열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현재 반도체 공급망 안에 있는 종합 반도체 회사와 OSAT업체들 그리고 소재 업체들까지 상당량의 재고를 보유하게 됐다. 여전에 몇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되는 정기공시를 통해 업체의 현황을 파악한다. 즉, 최소 1.5개월 전의 실적을 보고 현재를 가늠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기업의 경우, 정기 공시 전에 실적 발표하는 자리를 갖기도 하지만 기간 차는 2주 정도로 큰 차이는 없다. 이렇다 보니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현시점에서의 반도체 기업들의 현황을 알기 어렵다. 3분기 들어서 여기저기서 재고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업계 사람이 아니고서야 재고 증가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과거부터 축적된 정보와 현시점에서의 업체 현황을 통해 미래 상황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업체들의 매출과 재고 자산 정보만을 활용하여 주관적으로 해석한 글이기 때문에 시장을 바라보는 여러 의견 중 하나로서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그럼 전자기업, Foundry 업체, 메모리 반도체 업체 현황 순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9월 말 애플발 증산 철회 이슈로 인해 애플뿐만 아니라 애플 생태계 안에 들어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휘청거리고 있다. 강달러, 고금리,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이슈로 인해 글로벌 자산 가치의 하락이 이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애플의 증산 철회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플 특수를 기대했던 반도체 업체들과 EMS업체들은 추가 감산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대표 전자 기업 4개사(삼성전자, SK hynix, LG전자, LG디스플레이)의 매출액 총합과 재고 자산 총합의 변화를 살펴보자. 4개사의 매출액은 2022년 4Q를 전후하여 정체하고 있지만 재고 자산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2020년 펜더믹의 초입 때, 4개사의 재고는 43.5조 원이었지만 2년이 지난 2022년 재고 자산은 78.4조 원으로 80%가 증가했다. 매출액은 48% 늘어난데 반해 재고가 대폭 증가했다. 삼성전자와 SK hynix 그리고 LG디스플레이는 반도체와 OLED 같이 1년 치 생산계획에 따라 운영되는 Fab. 을 가지고 있다. 생산 계획이 수립되면 어지간해서는 계획을 수정하지 않는다. 계획 수정에 의한 감산 혹은 증산은 이와 연계되어 있는 소재, 장비 기업들과의 광범위한 협업기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OLED Fab. 은 시장 변화에 따라 가동률을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장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라인의 생산량을 낮추기 위해서는 장기간이 소요된다. 전자 소재의 생산이 지속되는 와중에 전자 기업들이 생산한 IT기기가 팔리지 않는다면 악순환이 연속되어 재고는 빠르게 쌓여 간다.
대만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EMS 업계의 상황도 국내 업체들 상황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반도체와 OLED 같은 부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 변화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들은 2021년 4분기부터 산업 구조상 후방에 위치한 대만 OSAT업체들에게 지속적인 시장의 침체 시그널을 날렸다. 대만 OSAT업체들은 기존의 시스템에 따라 공급망 관리를 통해 생산량을 조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펜더믹으로 인해 급가속한 Wafer 생산으로 인해 지난 반도체 다운 사이클과 같은 수준의 재고를 줄이지 못했다. 이번 애플의 아이폰 14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기대했으나 아이폰이 흥행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불어난 재고의 극적인 감소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Fabless와 종합 반도체의 Wafer를 위탁 생산해 주는 Foundr업체들의 Wafer 생산량이 2022년 2Q에도 증가했다. 이미 중소형 Foundry에서는 Fabless의 Order Cut의 영향으로 매출액 감소가 이어지고 있지만 TSMC와 UMC, Global Foundry, SMIC와 같은 Top Tier 업체들의 Wafer 생산량은 줄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생산량 증가세가 다소 주춤하다는 것이다. 2022년 4Q, 늦어도 2023년 1Q면 생산량 그래프에서 의미 있는 하락세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7월 초 대만 지인을 통해 대만 반도체 업계 하이 레벨에서는 2022년 연말 혹은 2023년 연초, 자동차용 반도체의 수급 개선을 예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만 해도 차량용 반도체, 특히 MCU의 타이트한 수급으로 인해 완성차 업체들의 차량 인도가 늦어지고 있던 때였다. 어떤 연유로 수급이 풀린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달 대만의 반도체 업체들의 매출이 마감되고 실적을 살펴보니 대만 최대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설계 업체인 Novatek의 실적이 대폭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 Novatek의 8월 매출액은 연간(YoY) 변화가 -50%에 달하는 감소세를 보였다. 경기 변화로 인해 전자 기업들의 패널 발주가 대폭 줄어든 까닭에 이를 구동하기 위한 DDI의 수요가 동반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만에서 DDI용 Wafer를 가공하던 Foundry 업체는 Fabless업체들로부터 대량의 Order Cut이 몰렸다. Foundry 라인에 여유가 생기자 그 빈틈을 자동차용 반도체 업체들이 채웠다. 자동차용 반도체는 선단 공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Wafer가 생산될 수 있다. OSAT업체들의 역량에 따라 올해 말이면 시장에 MCU가 충분히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몇 수 앞을 내다본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2022년 하반기 들어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빠르게 하락하면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삼성전자와 SK hynix의 실적에 빨간불이 켜졌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외 가전, 모바일, 디스플레이 사업을 함께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SK hynix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업 구조가 유사한 Micron과 비교했다.
2015년 3Q부터 시작된 메모리 업계의 매출 하락세는 2016년 3Q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국 금리 인상이 시작되면서 메모리 업계에 한해서만 1년 동안 매출이 하락했다.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가 동반 하락을 겪었던 시기는 2018년 말에서 2019년 사이였다. 2016년 4Q부터 시작된 데이터 센터發 메모리 반도체의 슈퍼 사이클은 2018년 3Q까지 2년 동안 이어졌다. 이동안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Big 3 삼성전자, SK hynix, Micron의 매출은 기존의 틀을 깨고 한 단계 도약했으며 이 기세로 삼성전자는 2017년 글로벌 No.1 반도체 기업이 되었다.
2018년 3Q를 정점으로 반도체 산업은 다운 사이클에 들어섰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매출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재고가 불어 났다. 매출액은 줄었지만 재고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모리 반도체 공장은 생산량을 조절하고 싶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가동률을 낮출 수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산량을 줄이고 재고 증가세가 멈출 때까지 근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미 늘어나 버린 재고를 소진하기도 전에 코로나 펜더믹에 접어들었다. 2020년 하반기부터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21년 생산 계획을 대폭 늘려 잡았다. 2021년 내내 이어진 생산량 증가는 2022년 들어 매출이 주춤했을 때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2022년 3Q부터는 분기별 매출액보다 보유 재고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現솔리다임)을 인수했기 때문에 재고가 증가했다는 의견이 있다. 대련에 있는 솔리다임의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의 월 생산 Capa. 는 9만 장으로 SK hynix의 1/7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재고 증가에 일부 기여는 했을 수 있으나 대세를 결정지을 만큼의 영향력은 없다.
2018년 3Q 매출 정점 이후, 재고 증가세가 안정될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이 공식을 그대로 대입해 2022년 2Q가 매출 정점이라고 가정했을 때, 2023년 2Q까지 재고 증가세가 이어질 수 있다. 이를 우려한 SK hynix는 내부적으로 감산에 대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SK hynix의 경쟁사 인 Micron의 변화를 살펴보면 2018년 정점까지는 SK hynix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인다. 다만 2018년 메모리 슈퍼사이클 이후, 미중 무역 분쟁으로 인해 중국 업체들의 Micron 메모리 탑재율이 감소했다. 갑작스러운 국제 정세 변화와 반도체 다운 사이클로 인해 Micron은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과재고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 이후 혹독한 재고 조정을 통해 2021년 슈퍼 사이클 중에도 재고 증가세를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Micron은 국내 업체들보다 앞서 투자 계획 보류를 발표하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때문에 매는 먼저 맞았지만 재고 관리로 인해 경쟁업체들보다 조금 더 유리한 상황에서 반도체 다운 사이클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D램과 낸드 사업을 모두 영위하고 있는 SK hynix와 Micron을 비교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 상황을 설명했다. 낸드 사업만을 가지고 있는 Kioxia(舊Toshiba)와 Western Digital(SanDisk)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사업이 낸드플래시에 편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재고 상황이 D램보다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낸드플래시 가격이 더 빨리 붕괴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D램의 경우, Big 3의 황금 분할로 시장이 유지될 수 있지만, 다자 경쟁 체제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적자를 보던 업체에서 낮은 가격으로 재고를 시장에 풀어버리면 다른 업체의 제품 가격 역시 덩달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Kioxia와 Western Digital같이 사업 구조가 단조로운 업체들이 궁지에 몰려 예상치 못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매년 9월 마지막 주가 되면 10월 첫째 주에 있는 중국 국경절에 사용할 제품을 미리 보내기 위해 난리법석을 떨었다. 올해는 국경절 이전에 물건을 빨리 선적해 달라는 요청도, 국경절 이후 긴급 선적이 필요하다는 다급함도 없다. 반도체 소재 업계에 발을 디딘 지 10년이 넘었지만 올해처럼 적막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현재 반도체 시장이 얼마나 얼어붙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동안 반도체 다운 사이클은 업체들의 최대 분기 매출 달성 후, 최소 1년간 이어졌다. 다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다운 사이클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과 규모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마치 질주하던 트레일러가 급제동 후, 출발하는 것처럼 재고의 증가를 멈추고 매출이 반등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반도체 다운 사이클의 위기 때마다, Killer Application이 등장하여 시장을 성장시켰다.
-. 18~19년(코로나 펜더믹), 15~16년(Data Center), 08~09년(스마트폰), 01~02년(인터넷)
마땅한 Killier Application이 없는 상황에서 과거 위기 탈출의 방법을 현재의 다운 사이클에 그대로 대입한다면 더 큰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반도체 시장이 악화일로에 있지만 재고가 줄거나 증가세가 멈출 때까지 반도체 업계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반도체 시장이 조기에 안정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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