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반도체, 꿈은 이루어진다

CEO's Spirit 7. 삼성전자와 월드컵 4강 신화의 평행이론

Keywords
-월드컵 4강: 평행이론의 재현
-엔비디아: 경이로운 사업
-ASML: 지금 우리 기술은
-TSMC: 반도체 사람들
-반도체 4강: 평행이론의 극복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태극전사가 4강 신화를 이루었을 때 우리나라 위로는 브라질, 독일, 터키가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은 4등이라는 성적에도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반도체 업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반도체 기업들의 2022년 실적 발표가 마무리됐는데 삼성전자, 인텔, 퀄컴 같은 기존 반도체 강자들이 연달아 부진한 실적을 발표한 반면 엔비디아, ASML, TSMC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반도체를 기준으로 시가총액 순위를 매겨보면 반도체 4강에는 이 기업들과 함께 삼성전자가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로 반도체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월드컵에서도 '이만하면 됐다' 하는 4강 신화의 평행이론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 엔비디아, 왕관은 생각보다 무겁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브라질은 삼바축구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브라질은 조별리그 3경기에 이어서 토너먼트까지 모두 승리하며 전승 우승을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3R'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나우지뉴로 구성된 쓰리톱은 그 어떤 팀도 막을 수 없었다. 호나우두는 마의 8골 경지에 도달하며 골든슈(최다득점)를 받았고, 히바우두 또한 공동 득점 2위로 실버슈를 받았다. 당시 22살에 불과했던 호나우지뉴는 2002년 월드컵에서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고 그 이후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양쪽 사이드백은 역대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카푸와 호베르투 카를루스였다. 이 둘은 수비수인지 공격수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위아래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3R의 파괴력을 강화했다.

 

엔비디아의 최대 경쟁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업 포트폴리오다. 브라질에서 히바우두,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를 차례대로 배출했듯이 엔비디아의 주력 사업도 게이밍, 데이터센터, 오토모티브로 이동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GeForce RTX'라는 AI 기반 칩셋과 'GeForce Now'라는 클라우드 기반 플랫폼이 조합된 그래픽 솔루션으로 주목을 받았고, 'Hopper-Grace-BlueField'라는 GPU-CPU-DPU가 결합된 데이터센터 솔루션으로 대세가 되었으며, 'DRIVE'라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인프라를 통합한 오토모티브 솔루션으로 미래를 외쳤다. 게다가 카푸와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공격 진영으로 올라와 어시스트를 했듯이 엔비디아는 'CUDA'나 'DOCA' 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사업부에 투입될 개발자 생태계를 자연스레 조성하고 있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엔비디아에게도 분명 리스크는 존재한다. 일단 자체 칩을 설계하는 빅테크의 위협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폴란드의 레반도프스키나 크로아티아의 모드리치 같은 슈퍼스타도 팀을 우승까지 이끌지는 못했듯이 CPU의 짐 켈러나 GPU의 라자 코두리 같은 외계인 엔지니어도 기업의 DNA를 바꾸지는 못했다. 즉, 주력 사업이 있는 빅테크가 엔비디아를 반도체 시장에서 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로직 반도체를 삼분하는 나머지 두 기업이 더 큰 위협으로 떠오를 수 있다. 남미 축구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번갈아 패권을 쥐었듯이 데이터센터와 AI 비전도 도전받을 것이다. 자일링스와 인스팅트로 반격을 노리는 AMD와 폰테베키오와 알케미스트로 부활을 알리는 인텔, 그리고 수성전을 펼치는 엔비디아의 재격돌이 기대된다.

 

|2. ASML, 누구나 속사정은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의 결승 진출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와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의 은퇴 이후 녹슨 전차군단이라며 조롱받던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는 격언처럼 독일의 암흑기에도 레전드가 탄생했다. 올리버 칸은 독일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자 수문장으로 창끝이 무딘 독일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골키퍼가 골든볼(최우수선수)에 선정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가장 고민이 많았던 중원은 미하엘 발락이라는 만능 미드필더가 나타나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 건씩 해주는 해결사다운 면모를 보였다. 한편 최전방에는 첫번째 월드컵부터 해트트릭을 기록한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골잡이가 등장하며 다음 대회 득점왕을 예고했다.

 

ASML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대체불가능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ASML은 오렌지군단으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기업이지만, 단순하면서도 막강한 기술은 마치 독일의 전차군단을 연상시킨다. 이번 실적 발표 시즌에도 램리서치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같은 다른 장비 기업들은 반도체 한파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칸처럼 굳건한 EUV 장비가 버티고 있는 ASML은 슈퍼세이브에 성공했다. 그러나 최고의 기술 하나만으로는 우승 경쟁을 할 수 없고 다음 대회의 성적도 약속할 수 없다. 오랫동안 강력한 팀이 되려면 발락처럼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와 클로제처럼 미래가 밝은 선수도 필요하다. 따라서 ASML은 EUV 외에도 범용성이 넓은 DUV 장비를 꾸준히 생산하고, 수익성이 높은 High NA-EUV 장비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다.

 

무엇이든 이겨낼 것만 같은 ASML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갖고 있다. 먼저 DUV 점유율이 하락할 위험이 있다. 사실 매출의 절반은 여전히 DUV의 몫이다. DUV는 성숙공정에 계속 필요한데, 전통적인 노광 장비업체였던 캐논과 니콘이 이 시장을 뺏어가려고 한다. 다음으로 EUV 생산이 차질을 빚을 위험이 있다. EUV의 핵심 부품인 레이저와 렌즈를 납품하는 사이머와 자이스는 각각 미국과 독일 기업이다. 물론 국적 때문에 협조를 안 하지는 않겠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EUV 생산량을 늘리기는 어렵다. 마지막으로 High NA-EUV 수요가 둔화될 위험이 있다. 아직 High NA-EUV가 출시되지도 않았다. TSMC와 삼성전자가 3나노를 넘어 옹스트롬 시대를 바라보지만, 공정 미세화가 언젠가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 High NA-EUV 발주도 지연될 수 있다.

 

|3. TSMC, 고질병은 고치기 어렵다.

2002년 월드컵 3위가 터키였다고 말하면 어린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터키는 축구 강국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고 터키의 유명한 축구선수가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터키의 3등 신화는 감독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팀워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FC서울의 감독으로도 익숙한 세놀 귀네슈 감독은 수비적인 전술을 펼치면서도 전방에서는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스트라이커와 발 빠른 윙어를 배치함으로써 역습의 정석을 보여줬다. 이 당시 터키의 공격진에는 피지컬로 압도하는 하칸 쉬퀴르와 스피드와 테크닉을 겸비한 하산 사슈와 일한 만시즈가 있었다. 월드컵 최단시간 득점을 기록한 쉬퀴르, 올스타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사슈, 그리고 호베르투 카를루스를 사포로 제쳐버린 만시즈의 활약에 터키는 한일 월드컵의 다크호스로 역사에 남았다.

 

TSMC라는 기업을 얘기할 때 몇몇 사람들을 빼고 논할 수는 없다. 반중국 성향의 차이잉원이 총통이 된 이후, 그는 중국에 맞설 무기로 반도체를 선택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조직력을 끌어올린 귀네슈 감독처럼 그는 과감한 반도체 기업 지원과 인재 육성 정책으로 대만의 경제를 살리고 안보를 지켰다. 그리고 터키의 최전방에 쉬퀴르, 사슈, 만시즈의 삼각편대가 있었다면 TSMC에도 세 명의 반도체 거장이 있다. 미국에서 반도체를 공부하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반도체 부문 부사장까지 역임했던 장중머우 창업자는 대만 반도체 산업에 위닝 멘탈리티를 불어넣었다. 그의 뒤를 이어 류더인 회장이 외부 행정을 책임지고 웨이저자 CEO가 내부 경영을 담당하며 TSMC를 함께 이끌고 가고 있는데, 이 둘 역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기술 전문가다.

 

이렇게 두려울 게 없을 법한 TSMC에게는 만성적인 리스크가 존재한다. 바로 중국이다. 시진핑은 3연임에 성공한 뒤 2027년까지 대만 통일을 최대 과제로 제시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얼마든지 빨라질 수 있다. 중국이 침공하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웃는 얼굴로 우리 집에 들어오라는 미국이 갑자기 돌변할 수 있다. 미국에 공장이 모두 지어지면 더 이상 대만을 지켜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장이 완공되기 전에 중국이 대만을 침략하면 미국이 대만에 있는 반도체 공장을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쉽게 말해 '내가 먹지 못하면 너도 먹지 못한다'는 발상이다. 이처럼 세상은 그렇게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팽팽한 신경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TSMC가 언제 고꾸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반도체 산업은 챔피언스리그가 아니라 월드컵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떠올려보면 대한민국은 거스 히딩크라는 훌륭한 감독의 지도 하에 홍명보, 유상철 같은 주축 선수부터 박지성, 이영표 같은 신예 선수까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팀으로 싸웠다. 삼성전자 반도체도 DX부문의 품 안에서 DRAM과 NAND라는 현재의 주력 사업과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라는 미래의 신규 사업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삼성으로 싸워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2002년 4강 신화의 평행이론을 극복하고 반도체 월드컵에서는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하기를 바란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의 최고 명언을 인용하자면 반도체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가 되면 정말로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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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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