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반도체하기 참 어렵다

[투자]by 자본주늬

CEO's Spirit 3. 갈 길 바쁜 삼성전자 발목 잡는 규제

 

Keywords
-미국의 대중국 압박, TSMC부터 인텔까지
-대만, 토사구팽 딜레마
-일본, 소부장 패러독스
-유럽, 헤게모니 트라우마
-돌아온 K-칩스법, 가로막는 최저한세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짓밟기 위해 광폭 행보에 나섰다. 지난 주 금요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바로 이어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일본에는 세계 3대 반도체 전공정 장비 회사 중 하나인 TEL이 있고, 네덜란드에는 EUV 노광 장비를 독점하고 있는 ASML이 있다. 중국으로 가는 반도체 장비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편 TSMC는 미국, 일본, 유럽으로 생산기지를 다변화하고 인텔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 걸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치 '칩4 동맹'의 멤버가 미국, 대만, 일본, 유럽이라 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대한민국은 소외되어 가는 듯 하다. 하지만 각 국가들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아직 대한민국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 대만,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잡겠다.

대만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이 대만을 이끌면서 중국을 도발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만을 통일시키려고 하는데, 미국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치면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특히 2022년 중국의 거센 반발에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사령부는 사실상 대만 해역을 포위해서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고, 군용기로 대만 해협 중간선을 침범했다. 지속되는 미중 갈등에 애플마저 중국을 탈출하여 인도로 이동을 시도하고 있고, 대만의 TSMC와 폭스콘도 함께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2022년 대만의 1인당 GDP가 대한민국과 일본을 추월했다. 또한 2022년 반도체 기업 매출액 1위는 대한민국의 삼성전자와 미국의 인텔이 아닌 대만의 TSMC가 차지했다. 이렇게 다소 충격적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리더십과 장중머우 TSMC 회장의 인사이트가 빛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직접 개발부터 생산까지 하면서 신화를 만들어가는 사이, 대만은 제품을 자체 개발하지 않고 타국의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위탁 생산하는 것으로 단숨에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게다가 중국의 지속되는 압력에도 대만은 TSMC라는 기업 덕분에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 미국이 패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대만은 반도체라는 부품 하나로 경제와 안보를 한꺼번에 해결한 셈이다.

 

앞으로 대만과 미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질 것으로 보인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세워질 공장 두 곳에 무려 4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 팀 쿡 CEO, 젠슨 황 CEO, 리사 수 CEO는 공장이 가동되지도 않았는데 장비 반입식에 참석하며 TSMC와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대만에게도 걱정거리가 있다. 만약 미국에 TSMC 공장이 완공되면 더 이상 미국이 대만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실제로 사우디는 산유국의 입지가 약해지자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소원해졌고, 대만 내에서도 미국을 전적으로 믿다가 큰 코 다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토사구팽 딜레마'에 빠졌다. 따라서 TSMC도 미국에는 5nm 공정을 짓는 한편 3nm 최첨단 공정은 자국에 지으면서 마지막 패를 꺼내지 않고 있다.

 

|2. 일본, 잃어버린 30년을 되찾겠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도, 1985년 플라자합의를 주도하며 일본을 장기 침체에 빠트린 것도 미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의 논리에 따라 일본은 미국에게 대들지 못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미일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서로를 진정한 친구, 소중한 친구라며 양국이 최대 동맹임을 강조했다. 특히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 때문에 미국에게 안보 보장을 요청했고, 미국은 흔들림 없는 약속을 재확인시켰다. 게다가 세계대전 이후 자위권만 있었던 일본은 작년 말 적의 기지를 타격할 수 있도록 안보전략문서를 수정하고, 2027년까지 방위 예산을 현재의 2배 수준으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무기를 안겨주고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를 얻으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1980년대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곳(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마쓰시타)이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일본 GDP가 미국의 60% 정도에 이르자 미국은 무역과 환율 제재로 일본의 날개를 꺾어버렸다. 주저앉은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국가가 미국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와신상담의 자세로 얄미운 미국의 손을 잡았다. 도요타, 소니 등 일본을 대표하는 8개 기업은 '라피더스'라는 반도체 합작 기업을 설립하고 IBM과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실리콘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구마모토에는 일본 정부가 투자금의 절반 가량을 부담하며 TSMC 공장을 유치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거점 학교를 지정했다. 일본 역시 잃어버린 30년을 되찾기 위한 기회를 반도체에서 찾았다.

 

일본 역시 미국이 제안한 반도체 동맹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기업들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과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도 섣부르게 미국에 모든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분명 미일정상회담은 분위기 좋게 끝났는데, 회담 직후 주미일본대사는 산업계와의 긴밀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겠다며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이유가 중국 의존도 때문인데, 사실 일본 반도체도 중국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2021년 기준 일본 반도체 장비 수출의 38.8%가 중국에서 발생했다. 대한민국이 '아베 소부장' 사태로 얼마나 큰 위기를 겪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일본은 '소부장 패러독스'에 빠진 상태다.

 

3. 유럽, 산업화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

유럽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르네상스를 바탕으로 문화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다가, 18세기에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현대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유럽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가 유행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모두 한때 잘나가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미국이 독립 이후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 되고 중국이 인구를 앞세워 G2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는 원자재 대란이 발생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잡기에도 급급했던 유럽마저 2022년 430억 유로 규모의 반도체법에 합의했다. 유럽은 '칩4 동맹'에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유럽의 반도체라고 하면 설계 IP를 제공하는 ARM(영국), 노광 장비를 제조하는 ASML(네덜란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연구하는 IMEC(벨기에)이 떠오른다. 또한 인피니언(독일), NXP(네덜란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본사는 스위스에 있으나 사업장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있음) 같은 차량용반도체 기업들도 유명하다. 차량용반도체 공급 차질은 여전하고 수요 기대는 모바일과 서버 이상이기 때문에 유럽 정부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벤츠, BMW, 아우디가 차량용반도체를 필요로 하면서 엔비디아, 퀄컴, 삼성전자 등 글로벌 칩메이커도 유럽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유럽은 반도체를 자급자족하는 것을 넘어 산업화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부활의 신호탄으로서 반도체를 택한 것이다.

 

대만과 일본, 대한민국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미국 편에 붙었지만 유럽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는 불확실하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미국의 중국 견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기업 사절단을 꾸려 시진핑을 만나 세일즈 외교를 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의 IRA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유럽 기업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네덜란드도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즉각 협조할 수 없다며 찬물을 끼얹었다. 이는 유럽 역시 중국향 매출 비중이 높으며, 장기간 지속된 세계화가 한순간에 디커플링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ASML의 레이저 장비 자회사 사이머가 미국 기업이므로 미국에 굴복할 가능성이 높지만, '헤게모니 트라우마'가 있는 유럽은 G2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며 미국에 반격할 날을 기다릴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전략산업을 야금야금 뺏어가고 있다. 정치는 매우 냉정하다. 오일머니의 시대가 끝나고 사우디가 처한 상황을 보면 반도체를 놓친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K-칩스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의지로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해서 돌아온 K-칩스법마저 최저한세율이라는 규제에 가로막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역대급 바닥을 치고 있는데, 불난 집에 소방차를 쓸 건지 소화기를 쓸 건지 고민하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에서 기업 경영하기 참 어렵다는 생각에 몹시 답답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압박에 주저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반도체 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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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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