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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티베트에 차를 전해준 당나라 문성공주는 누구

by매경이코노미

중국에서 차를 가장 많이 마시는 지역은? 중국 서남쪽 끝에 위치한 티베트다. 당나라 때 티베트는 독립국이었다. 이름은 토번. 당나라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했다.


당나라는 수많은 중국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왕조다. 외국에 나간 중국인이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을 중국 말로 당인가(唐人街)라고 하고, 중국 옛날 옷도 당장(唐裝)이라고 한다. 그들은 기상이 늠름하고 활기차고 포용력 넘쳤던 당나라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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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화감독 장이모우가 제작한 뮤지컬 ‘문성공주’의 한 장면.

그런 당나라도 티베트를 무력으로 짓누르지 못했다. 티베트는 종종 당나라 수도까지 쳐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가고는 했다. 당나라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티베트를 당나라에 고개 숙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차였다.


티베트 사람들은 평균 해발이 4000m 넘는 높은 고원에 산다. 여름이 짧은 그곳에서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목축을 하며 산다. 소와 양을 키우고 좋은 풀이 자라는 곳을 따라 이동한다. 먹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소와 양의 고기와 그 젖 그리고 짧은 여름 한철 급히 자라는 청보리가 전부다. 청보리를 미숫가루처럼 갈아 소젖으로 만든 버터에 뭉쳐 먹는다. 고기는 통째로 바람에 말렸다 칼로 베어 생으로 씹어 먹는다. 티베트에 가서 이렇게 먹어봤는데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맛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맛이 아니다. 심각하게 불균형한 식단은 곧 이런저런 질병으로 이어졌다.


고통받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차가 전해졌다. 처음 차가 어떻게 티베트에 들어갔는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병을 앓고 있던 티베트 왕에게 이름 모를 새가 찻잎을 물어다 줬다는 전설이 있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당나라 사람 문성공주가 처음으로 티베트에 차를 가져갔다고 믿는다.


문성공주는 당나라 황제의 친척이었다. 티베트가 너무 무력을 휘두르자 황제는 친척 여자아이를 한 명 골라 티베트 최초 통일왕국을 세운 송첸캄포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예전 중국 황실에서 강성한 유목민과 부드러운 관계를 만들어보고자 종종 썼던 방법이다. 문성공주는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 시아버지였던 송첸캄포 왕과 재혼해서 해로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충격적이지만, 과거 티베트를 포함한 유목민 사이에서는 흔한 전통이었다.


어쨌든 문성공주를 통해 차를 알게 된 티베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차를 마신 후 오래도록 그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차에 들어 있는 여러 화학 성분이 티베트 사람들에게 극도로 결핍됐던 영양분을 보충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곧 차 없이는 못 살게 됐다. “식량 없이는 3일을 살아도 차가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한다”고도 하고 “차는 우리의 피요, 살이요, 영혼이다”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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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가던 중 문성공주가 쉬어 갔다는 일월산에 세워진 문성공주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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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티베트로 가는 길은 험해서 말이나 사람이 차를 지고 운송했다. (우)원난성에서 만들어 티베트에 수출됐던 버섯 모양의 차(긴차).

그들은 당나라에 차를 공급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당나라가 차를 공급해주면 티베트는 말을 주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차마호시’의 시초다. 차와 말을 서로 교환한다는 의미다. ‘신당서’에 기록돼 있다. 731년의 일이었다.


당나라는 이제 티베트와의 관계에서 칼자루를 쥐게 됐다. 티베트 사람들이 차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데, 그 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당나라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티베트는 전처럼 당나라를 자주 공격하지 못했다. 당나라가 비위가 틀려 차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에서 보내온 가축이 너무나 많아 당나라 길거리에 유기 가축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차에 눈을 뜬 티베트 사람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차를 수입해 갔다. 이 틈을 타 천생 장사꾼 중국인들은 싸구려 차를 대거 만들어 티베트에 보내고 비싼 말을 헐값에 받아 왔다. 티베트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차라도 중국에서 공급을 끊어버리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식량 없이는 3일을 살아도 차가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해”


당나라 때는 쓰촨성에서 만든 차가 티베트로 들어갔다. 명나라 때는 후난성에서 만든 차가, 청나라 때부터는 원난성에서 만든 차도 추가됐다. 세 지역에서 만들어 티베트로 들어간 차는 모두 가장 거칠고 등급이 낮은 찻잎을 원료로 만들었다. 차는 어린잎으로 만들면 맛이 좋지만 가격이 비싸진다. 찻잎이 쇠고 거칠면 맛이 없는 대신 단가는 내려간다. (차의 맛을 내는 성분이 어린잎에 더 많이 들어 있다.) 심지어 쓰촨성에서 만들어 티베트로 보냈다는 차를 보면 “과연 이 사람들은 이것을 사람 마시라고 만들었단 말인가? 양심도 없다” 싶을 정도로 잎은 거의 없고 줄기뿐이다. 그나마 후난성에서 만든 차는 그보다 고급이어서 티베트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원난에서 만든 차도 모든 차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 너무 크고 거칠어서 골라낸 부산물로 만들었다.


중국 사람들은 최하등급 원료로 차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차 맛이 나게 하려고 애를 썼다. 원료에 물을 듬뿍 뿌려 습도를 높이면 미생물이 발생하고 이 미생물이 찻잎을 발효하는데 이때 찻잎 안의 여러 화학 성분이 변화를 일으켜 단맛이 증가하면서 차 맛이 좋아졌다.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차는 무조건 발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효를 거치지 않은 차는 그들에게는 차가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사람들이 인도에서 차나무를 심고 차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거대한 티베트 시장에 주목했다. 당시 티베트에서는 여러 차 중에서도 원난성에서 만든 버섯처럼 생긴 차(긴차)가 특히 인기가 많았다. 영국인은 긴차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산 잎으로 버섯 모양 차를 만들어 티베트에 팔았다. 하지만 티베트 사람들은 이 차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생물 발효가 되지 않은 차였기 때문이다. 그 비밀을 몰랐던 영국 사람들은 황금 시장인 티베트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요즘도 티베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차를 마신다. 티베트 사람이 다른 사람 집에 가면 집주인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를 들고 오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 집이라면 응당 난로 위 주전자에서 차가 끓고 있어야 한다. 손님은 앞섶에서 그릇을 꺼내 (이 사람들은 옷 앞섶에 그릇을 넣고 다닌다.) 차를 받고 한 잔 들이킨다. 주인이 또 차를 따라 준다. 이번에는 차에 청보리 가루를 넣어 준다. 여기에 버터를 넣고 뭉쳐서 먹는다. 다 먹고 나면 또 한 잔의 차를 따라 준다. 이렇게 끝없이 차를 마신다. 마침내 다 마시고 나면 설거지 대신 그릇을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서 다시 앞섶에 넣는다. (중간에 씻는지 확인해보지 못했다.)


호남농업대 진연 교수가 ‘다업통사’라는 책에 티베트 사람들이 얼마나 차를 많이 마시는지 썼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차는 생활 필수품이다. 기본적으로 하루에 5ℓ를 마셔야 갈증이 가신다고 한다. 평균 15~20잔을 마시지만 많이 마시는 사람은 70~80잔까지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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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현 죽로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