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힘과 거장의 힘
황석영의 『해질 무렵』(문학동네, 2015)
이른 바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행보는 대중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혼돈이나 위기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여곡절의 순간을 지나오며 믿을 만한 언행을 보여 왔기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며 그렇게 가다듬어졌을 혜안을 통해 신중하게 펼쳐지는 그들의 행보는 암중모색에 빠져있는 대중에게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기대와 주목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대중의 질타 속에 잊혀지는 ‘거장’들도 드물지 않다.
황석영 또한 문학판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문학적 도전과 실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원로작가의 대열에 서 있으면서도 ‘과거’라는 시간 뒤로 숨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늘 ‘현재’의 테제를 다루어 왔다. 물론 최근의 『해질 무렵』이나 『강남몽』 등 많은 작품들에 과거의 시간이 담겨 있긴 하지만(소설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과거’를 담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늘 ‘현재’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소환된 것이었다. 이는 바꿔 말해 그의 탁월한 현실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쳇말로 ‘촉이 있다’고 할까. 현재의 상황을 어떤 이야기로 풀어내야 하는지, 대중이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지를 짚어내는 감각이 있다는 것. ‘강남’이라는 핫한 기표를 활용하여 한국의 천민적 자본 형성사를 그린 『강남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작품에 그려진 ‘강남’은 과거의 그곳이지만 소설의 발화와 소통은 ‘강남’을 향해 끓어오르는 현재의 욕망을 겨냥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선망이든 질투이든, 냉소이든 비난이든 누구나 ‘강남’이라는 기표와 접속하는 순간 자신의 적나라한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어찌 『강남몽』과 소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탁월한 현실 감각이란 양날의 검이다. 늘 최전선에 서서 당대의 과제를 두고 대중과 소통하는 수행력을 지닐 수 있는 한편, ‘현실’에 대한 날선 감각을 잃고 ‘감각’적 현실의 표면 위에서 부유하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얼마 전 출간된 『해질 무렵』에서도 이러한 양날의 유효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청년 실업률을 기록하며 ‘헬조선’, ‘저옥불반도’라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현재의 젊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 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현실 인식은 시의적절하다. 극작가의 꿈을 안고 온갖 알바를 전전하며 반지하 월세방에 살고 있는 정우희의 삶은 청년 세대의 삶을 대변한다. “나는 우희씨처럼 하고 싶은 일이 없다구. 나는 그저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닥치는 대로 이 일 저 일 하고 있는 거 같아”(122쪽)라고 말하는 김민우의 삶도 다르지 않다. 전문대학을 나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철거지역에서 용역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포클레인의 쇠팔에 맞아 숨진 아이를 목격한 이후 동반자살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들의 상처와 고민, 아픔과 절망은 이 작품이 당대의 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질 무렵』은 이러한 청년들의 삶을 지난 세대의 삶과 겹쳐놓는다. 소설의 화자인 박민우는 가난한 산동네를 벗어나 유학까지 다녀온 성공한 건축가이다. 영산읍사무소 서기직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실직 후 온 가족이 서울에 올라와 산동네인 ‘달골’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류대에 합격하고 나서는 “다시는 달골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111쪽)을 하게 되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주인물을 건축가로 설정한 데에서, 폐허 위에 늘 새로운 것을 ‘높이’ 쌓아올려야 했던 근대화의 역사를 환기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별다른 기반 없이 이룬 박민우의 성공은 온갖 불의에 눈 감는 것은 물론이고 권력과 결탁하기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일 텐데, 이러한 과정은 고향 친구인 ‘윤회장’이란 인물을 통해 잠시 암시될 뿐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무조건적인 재개발을 통한 사업의 확장과는 거리를 두고 인간 중심의 건축론을 펼치는 선배 건축가 김기영과의 대조를 통해 박민우의 삶과 건축 철학에 우회적 비판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을 모델로 한 인물 김기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대가로 우리는 수많은 이웃들을 왜곡된 욕망의 공간으로 몰아넣거나 내쫓았습니다.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97쪽)
왜곡된 공간으로 내쫓긴 인물들은 다름 아닌 박민우의 이웃들이다. 박민우가 달골을 잊고 있는 동안 첫사랑 차순아는 성폭행을 당하고 그녀의 연인이 된 재명이형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그리고 달골의 옛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재개발을 거쳐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 이처럼 박민우의 성공한 삶은 누군가의 삶을 왜곡시킨 결과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젊은 세대의 삶을 왜곡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철거 현장에서 젊은 김민우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되고, 그 정황을 차순아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된 박민우는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히 재현되는 듯했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우리가 뭔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가냘프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176쪽)고 말한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노동개혁과 관련된 문제 등 산적한 현안들이 세대 간 대립으로 치환되어 논의되는 시점에서 이 또한 매우 논쟁적인 문제의식에 해당한다. 작가도 이를 의식했는지 “황석영은 "지난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더 나은 현재를 이룰 수 있다"며 "이는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잇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세대 간 갈등이든 화해든, 지난 세대에 속하는 작가가 젊은 세대의 아픔을 직시하면서 지난 세대의 과오를 지적한 점은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강남몽』이 작품 자체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발화와 소통의 지점에서 더 많은 논쟁이 오고갔던 것처럼, 『해질 무렵』 역시 작품 자체의 목소리를 통해 그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확인하기는 힘들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목소리나 “해질 무렵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거장이 건네는 도저한 질문”이라 띠지를 둘러 판매하는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해질 무렵』은 청년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되고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될 뿐, 정작 작품의 서사구조를 통해서 확인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작품에서, 지난 세대의 과오는 박민우의 과거를 통해 들춰지긴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구체적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서술 방식을 통해 독자는 오히려 박민우가 살아온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와 비슷한 세대에 속하는 독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달골에서 성장기를 보낸 시절에 대한 회상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아니라 ‘추억 코드’로 더 많이 소통될 것 같다. 온 동네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첫 사랑 순아와의 데이트, 동네 주먹계를 평정했던 재명이 형과의 에피소드 등은,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길지 않은 작품 중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면서 읽는 재미를 더해주지만 ‘응8’류의 추억담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박민우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잊고 있던 차순아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박민우와 차순아 사이의 연결고리가 바로 정우희이다. 차순아의 연락처를 박민우에게 전달하고, 차순아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를 가장하여 메일을 보냄으로써 둘 사이의 가상의 만남이 이어지도록 한다. 젊은 세대의 삶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지난 세대의 인물 박민우에게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는 계기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이는 지난 세대의 책임을 묻는 젊은 세대의 엄중한 문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중하다’고 하기엔 정우희의 의도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려져 있으며, 문책에 대한 대답이라 할 만한 박민우의 회고 또한 지나치게 개인적 회한에 치우쳐 있다.
일기랄까, 수기랄까. 어쭙잖은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그래도 잘 견디었다, 잘 살아왔다 격려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
박선생님과 함께했던 날들이 내겐 소중한 추억이었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추억할 만한 존재이길 바란다면 욕심일까요? 첨부파일을 읽고 싶지 않으면 그냥 지워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100~101쪽)
나로서는 형편없는 산동네의 가난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그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의 내면은 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해주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여러 장치와 인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 속에서 가까스로 안도하고 있던 하나의 작은 부속품이었다.(143~144쪽)
김민우와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가깝게 지내던 우희는 그의 어머니인 차순아의 회고 기록을 읽으며 그 글의 첫 독자가 박민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들의 이름을 ‘민우’라고 지을 만큼 박민우의 존재가 그녀의 삶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차순아와 그의 아들 김민우, 그리고 정우희까지 이들은 모두 박민우가 외면하고 밀어냈던 존재들이다. 그러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박민우에게는 충분히 성찰의 계기가 되리라 여겼던 것일까. 위와 같은 ‘차순아-정우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힘이 없다.
차순아는 글을 쓰는 시간을 위로이자 꾸짖음, 격려의 시간이라 쓰고 있다. 실제로는 정우희가 쓴 글이지만 이는 차순아가 직접 우희에게 건넨 말이며, 우희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희는 순아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박민우에게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한 듯하다. 순아의 목소리를 빌려 박민우에게 전달된 우희의 글은 그저 자신의 지난 삶을 압축해 놓은 ‘사실’의 나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는 삶의 중요한 매 순간마다의 고뇌나 선택의 내적 동기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다. 위로이자 꾸짖음, 격려이고자 했지만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추억담’에 그치고 말았다는 말이다. 하여 ‘차순아-정우희’의 글은 젊은 세대가 지난 세대에게 던지는 문책으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단순한 전달자로서의 역할만 남는다. 이것이 황석영이 생각하는 작가의 역할인 것일까.
지난 세대 삶의 한 전형을 제시하기 위해 굵직한 흐름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며 그것을 꾸짖거나 격려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 뿐이라는 것? 황석영은 한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작품을 경장편으로 낸 이유를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라고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역시 작가의 현실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인데, 소통을 위해 삶의 생생한 구체성이 생략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꾸짖든 격려하든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세밀한 근거 자료라도 제시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박민우나 차순아의 회고적 진술에는 삶의 구체적 세목들이 빠져 있다.
“현대인들은 긴 소설을 느긋하게 못 읽는다. 이를테면 주말 아이들과 캠핑 가서 첫날 실컷 놀고 다음 날 오후 돌아올 정리 다 해놓고 부부가 각자 한 권씩 책을 읽자고 해서 읽을 수 있는 분량이 딱 좋을 것 같다. 서사를 해체하고 압축하면서 100여 장을 과감하게 쳐냈다. <해질 무렵>은 원고지 560장 정도 된다. 독자들이 단숨에 책을 읽으며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이전 세대의 업보가 젊은 세대를 힘들게 한다”―시대와 삶의 회한 담은 장편 <해질 무렵> 펴낸 소설가 황석영」, 《시사저널》, 2015. 11. 26.
젊은 세대의 아픔을 바라보며 지금이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을 내린 작가의 현실 감각은 정확하지만, 그것이 삶의 구체적 실체를 통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다만 ‘감각적’ 판단에 그치게 된다. 극단에서 퇴근한 후 밤새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정우희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린 2장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의 삶, 특히 지난 세대에 해당하는 박민우나 차순아의 삶은 개성적 인물로서의 생생한 구체성이 소거되어 지나치게 일반화된 양상으로 압축되어 있다. 『강남몽』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러한 지적이 있었다. “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인물에게서 의지와 감정, 갈등과 고뇌를 비롯한 일상적 삶의 내면질료들을 삭제한다. (…) 그러나 『강남몽』은 사실적인 재현과 서사적 흡인력을 확보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물의 개성적인 질감과 소설적 역능을 희생했다.”(권채린, 「강남은 꿈꿀 수 있는가」, 《(내일을 여는) 작가》, 2010. 겨울) 이러한 평가는 『해질 무렵』에 대해서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이것이 세대마다의 전형을 제시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독자는 반성이나 격려가 아닌 ‘추억’을 하게 된다.
추억은 힘이 세다. 추억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추억의 힘은 현재의 모순에 눈감고 현실에 순응하는 데 더 크게 작용한다. 회고의 서사가 추억보다는 성찰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과오’의 내용이 좀 더 분명해야 하고 현재와의 끈이 더 치밀해져야 한다. 거장의 작품이기 때문에 기대하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현실 ‘감각’이 아니라 현실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글 차성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