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포세대도 꿈을 꾼다

[컬처]by 웹진 <문화 다>

이나정 연출의 <쌈, 마이웨이> (2017)

 

얼마 전 종강한 수업에서의 일이다. 조별로 영상 콘텐츠를 제작해 발표하는 것이 학기말 과제였다. 주제나 소재가 정해져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20대 대학생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그렸다. 너무 많은 과제로 인한 부담, 조별 발표의 악몽,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현실, 뜻대로 되지 않는 연애, 졸업에 대한 두려움, 막막한 취업과 취업 이후의 또 다른 고충 등등. 학생들의 작품은 예상보다 더,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청년 세대의 현실보다 더 우울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마지막 조가 만든 페이크 다큐였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나 대학 생활에서의 눈치싸움 같은 부정적인 내용을 어둡게 그리지 않고 발랄하고 경쾌한 톤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그렇다. 흔히 지금의 20~30대를 N포 세대라고 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더 이상 포기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뜻에서 무포(無抛)세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밤낮 힘들다고 한탄만 해서야 뭐가 바뀌겠는가? 무포세대라고 해서 꿈이 없겠는가? 그들의 삶이 언제나 불행하기만 할까? 

 

 최근 가장 화제인 텔레비전드라마는 단연 <쌈, 마이웨이>(임상춘 극본, 이나정 연출)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네 명의 청춘이 등장한다. 학창시절 태권도 국가대표를 꿈꿨던 고동만(박서준), 동만의 여사친이자 아나운서를 꿈꿨던 최애라(김지원), 동만의 절친이자 지금은 홈쇼핑 회사 직원이 된 김주만(안재홍), 주만과 6년째 연애 중인 홈쇼핑 회사 계약직 상담원 백설희(송하윤)가 그들이다.

 

첫 회에서는 이들의 고등학교 시절이 간단하게 그려진다. 네 사람은 소위 ‘잘 나가는’ 10대였다. 일진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만의 꿈이 있었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패기 넘치는 청소년이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현실은 비루하기만 하다. 동만은 선수생활을 접고 방역회사 직원으로 살며 내세울 것이라고는 잘나갔던 학창시절뿐이다. 애라는 백화점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면서 고시생 남자친구를 몇 년째 뒷바라지했지만 그는 나이 많은 부잣집 여자와 바람이 나버렸다. 주만은 남들에게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는 회사원이 되었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늘 안고 있다. 상담원으로서 24시간 내내 인격 모독에 시달리는 설희는 주만에게 기대고 싶지만 남자친구에게는 젊고 돈 많은 여자가 접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뭐 하나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 살다보니 어린 시절에 지녔던 꿈은 어느 순간 저 멀리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가난과 불안정한 삶에 지친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일까.

무포세대도 꿈을 꾼다

 그동안 20~30대 청춘들의 삶을 그린 텔레비전드라마는 많지는 않았어도 종종 있어왔다. 가장 최근에는 <청춘시대>가 대표적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주인공을 통해 실제 현실에서의 청년세대가 겪는 고충을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작품의 분위기나 톤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2017년 현재 청년세대가 처한 실제 현실이 매우 암울하기 때문이다. <쌈, 마이웨이>도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작품을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비관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애라를 보자. 없는 살림에 애써 뒷바라지한 남자친구는 바람이 나버렸고, 백화점 VIP로부터 인격 모독을 당하며, 대학 동기는 청첩장을 건네며 속을 박박 긁는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고 가끔은 동만과 신세한탄을 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밝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애라는 기죽지 않는다. 자신이 힘든 것을 알고 있고, 실제로도 힘들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애라에게 꿈이 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애라는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마이크만 손에 쥐면 이 세상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다. 대학 동기의 결혼식장에서도, 동만을 보러 간 지역 축제에서도 마이크를 잡은 애라는 천하무적이다. 이루지 못한 꿈이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과 진정성은 배신하지 않는다.

 

<쌈, 마이웨이>에서 꿈은 이중적이다. 애라가 힘들어하는 이유도 꿈 때문이고, 힘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꿈이 있어서이다. 아나운서라는 꿈을 떠올릴 때마다 애라가 보는 것은 안내 데스크에 서있는 초라한 자신, 20대에 하지정맥류에 시달리는 불쌍한 자신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꿈을 좇으면서 다리의 아픔과 주위의 비웃음을 이겨낼 수 있다. 그 꿈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애라 자신만의 꿈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 지금의 청년세대가 역사상 최악의 세대라고 말해지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저당 잡혔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누구나 꾸었던 꿈이 사회에 나오면서 포기를 종용받게 되고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꿈을 잊고 생존에 목을 매게 된다. 지금은 힘들지만 참고 견디면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희망조차 사라진 절망의 시대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무포세대도 꿈을 꾼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매순간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만 채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힘들다고 한탄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SM 취향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하필 이 시기, 이곳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 비록 내가 선택한 고통은 아닐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고통을 인정하되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야만 하는 때다. 꿈을 좇으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지금 청년세대가 겪는 고통은 결코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는다. 꿈조차 포기한다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할 것이기에 꿈만이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쌈, 마이웨이>. ‘쌈마이’스러운 청년의 길, 혹은 ‘싸움’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가는 청년. 중의적인 제목처럼 이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기성세대를 원망하며 화를 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축 쳐진 어깨로 말없이 고통을 삭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떻게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라는 것이고, 행복과 불행 모두 나에게 닥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나의 삶까지 고통에 내맡길 수는 없다.

 

청년세대의 현실이 힘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만 한다면 텔레비전드라마는 온통 ‘죽겠다’하는 곡소리만 넘칠 것이다. 그런 텔레비전드라마가 과연 좋은 것일까? 가끔은 힘들어도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도 필요하지 않을까? 당신의 오늘을 되돌아보라.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아마도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다. 매일 매일이 반복됨에도 어떤 날은 행복했고 어떤 날은 우울했다. 당신이 처한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의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만약 당신에게 꿈이 있다면 지금이 힘들어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힘들지라도 당신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쌈, 마이웨이>는 이 힘든 현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유를 알아도 힘듦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1980년대 청년세대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업이었고, 그들은 그 질문에 훌륭히 대답했다. 대신 <쌈, 마이웨이>는 ‘어떻게’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 질문과 대답으로서 <쌈, 마이웨이>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청년세대의 삶을 대변하는 척하며 불가능한 희망을 그리는 작품들보다 꾸역꾸역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을 위무하는 <쌈, 마이웨이>가 좋은 것도 그래서이다.

 

 별점

 대중성

 ★★★★☆ 8

 평균

 최종 별점

 예술성

 ★★★★☆ 8

8.0

8.0

 

박상완(드라마 칼럼니스트)

2017.07.1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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