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아닌 소시민에게, 영화 '택시운전사'

[컬처]by 웹진 <문화 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2017)

 

제19대 대선이 치러졌던 때가 3개월 남짓 지났다. 급작스럽게 치러진 19대 대선은 최순실 게이트로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가능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한 언론사의 태블릿 PC에 관한 보도로 시작되었다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국민들의 촛불시위로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데, 그 중 한 번 고민해볼 관점은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다. 박정희 시대의 정립은 소위 한국적 근대화에 맞춰져 있었다. 잘 사는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앞서기 보다는 경제적 발전이 우선된 시기였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그 열망은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관심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개념에 대한 인식을 고정한 채, 경제적 부유함을 욕망하며 그에 맞게 살아왔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 영화가 어쩌면 <택시운전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에 놓여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소시민의 삶에 박수를 보내는 이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김만섭이라는 택시운전사와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기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두고 보면 두 사람은 묘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진다. 먼저 유사점은 두 사람 다 역사적인 사건의 당사자라기보다는 그것을 목격하는 외부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광주라는 공간에 있었던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광주로 향했으며 처음 광주의 실상을 확인했을 때 반응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광주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고초를 겪으면서 두 사람은 단순히 외부자가 아닌 당사자, 즉 주체로 변화한다. 두 사람이 큰 흐름에서 변화의 공통점을 가진다면, 그에 따른 차이도 명확하다. 해외에서 노동을 하고 온 김만섭이 한국을 좋은 나라로 이해하고 대학생의 시위가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위르겐 힌츠페터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알고 5.18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둘의 삶에 대한 가치도 확연히 다르게 표현된다. 김만섭이 돈 때문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로 간다면,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의 진실을 기자로서 알리기 위해 광주로 향한다.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면서도 초반 두 인물의 갈등을 통해 재미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유사점과 차이점 때문이라고 하겠다.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게, 영화 '택시

물론 <택시운전사>가 김만섭과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고 해도, 그 초점은 보다 김만섭에게 가있다. 영화는 독일 출생의 위르겐 힌츠페터가 어떻게 기자가 되었고, 이후 어떻게 아시아 특파원으로서 일본에 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한 김만섭의 도움으로 한국을 떠난 그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2003년 언론상을 받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그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이 장면 또한 김만섭을 찾기 위한 상황으로 놓여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김만섭이라는 인물의 성장 영화에 가깝다. 아내 없이 딸아이를 키우는 그에게 있어 삶은 경제적인 척도로 좌우된다. 영화 초반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나 광주에서 재식에게 훈계하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어딘가 낯설지 않다. 그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발전에 집중한 한국의 근대화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따라서 만섭은 그러한 가치관을 가진 우리 주변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광주에 도착해서 그가 재빨리 돌아오려고 했던 이유도, 광주의 상황에 대해 의심하는 이유도 그러한 그의 가치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런 그도 사복경찰에게 쫓기고 빨갱이로 몰리면서 인식의 변화를 보인다. 언제나 한국을 잘 사는 나라로 인식했고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욕했던 그에게 있어 빨갱이라는 수식은 그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따라서 만섭은 국가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했으면서도 그 삶을 부정당할 수 있는 소시민에 가깝다.

 

만섭이라는 인물의 소시민으로서의 의미와 성장에 가까운 변화가 단순히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극적으로 그에게 부여된 개인사가 결합됨으로써 캐릭터의 매력과 그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하겠다. 사복경찰에게 쫓기고 재식을 놓쳐버린 만섭과 위르겐 힌츠페터는, 자신들이 머물렀던 황태술의 집에 돌아온다.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리고 누운 장면에서 만섭은 자신의 개인사를 들려준다.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돈을 벌었다는 그는, 아내가 병에 걸리면서 모았던 돈을 써버렸고 가망이 없었던 아내가 마지막으로 권유해서 산 것이 그의 택시라고 말한다. 혼자 남겨져있을 딸을 유난히 걱정했던 이유도, 60만km나 탄 택시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위르겐 힌츠페터를 남겨두고 태술의 도움으로 광주를 빠져나온 만섭은, 광주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다른 지역 사람들을 만난다. 태술은 딸에게 줄 구두를 사고도 괴로움에 오열한다. 광주를 외면하고 위르겐 힌츠페터를 그곳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딸에게 하는 손님을 두고 왔다는 고백은 그래서 무겁다. 한국말을 모르는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고, 딸에게 전화해서 손님을 태워줘야 한다고 하는 말하는 방식은 스스로에 대한 독백이며 성장의 증거이다.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게, 영화 '택시

영화는 만섭을 중심으로 소위 영웅을 내세우지 않는다. 두 사람을 도와주는 태식이나 재식 혹은 최기자는 이념이나 대의를 통해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인물들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소시민이다. 영화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지 않는 방식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 물론 출발점은 있었겠지만, 실제적으로 소시민들의 입장에서 정치역사에 대한 이해나 거대담론에 대한 열망이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과 가까운 누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죽어갔을 때 그들은 더 분노했을지 모른다. 광주에서 총을 들고 싸운 이들이 아니라, 부상자들을 나르는 택시운전사들과 주먹밥을 나누어주는 이들이 만섭을 통해 기억되는 방식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마지막 검문소에서 중사가 숨겨진 서울 번호판을 확인하고도 두 사람을 통과시켜주는 장면은, 그 누구나 소시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소시민을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해도, 다소 아쉬운 장면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은 상구 엄마라는 인물의 설정이 아쉽다. 영화의 마지막에 만섭의 딸을 대하는 태도에서 상구 엄마의 애틋함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상구 엄마라는 인물만을 두고 본다면 영화 전체가 보여주는 소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찾아보기 어렵다. 상구를 중심으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거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구 엄마라는 인물이 너무 과하게 설정된 것이 아닌가 싶다. 더 아쉬운 부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다. 현실성을 가미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흐름상 보다 앞쪽에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건 전개상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택시운전사들이 등장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 장면이 하나의 이미지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해도 택시운전사들이 너무 영웅적으로 그려져 영화 전체의 관점과도 동떨어져 보인다.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게, 영화 '택시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고 해도 영화 <택시운전사>는 대중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역사와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위르겐 힌츠페터는 만섭의 연락처를 묻는다. 그런 만섭은 김사복이라는 거짓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이기자에게 김사복의 행방을 묻는 장면에 이들을 주시하는 공권력의 눈은 여전히 삼엄하다. 그 속에서 영웅이 아닌 소시민 만섭은 여전히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섭이야말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앞에 자신을 던지고도 자신을 일상을 위해 영웅이 될 수 없는 소시민일지 모른다. 이처럼 만섭이 소시민으로 돌아가는 설정은 우리 사회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 만섭과 같은 소시민에게 바쳐진 찬사일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의미는 오늘날로 확장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만섭의 택시를 탄 손님은 광화문을 향한다. 광화문에서 오늘날의 소시민들이 촛불만으로 부정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다면,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 만섭과 같은 경험을 우리에게 안겨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며 만섭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웃고 슬퍼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가 보내는 찬사는 당신에게도 유효하다.

 

 별점

 대중성

 ★★★★★ 10

 평균

 최종 별점

 예술성

 ★★★★☆ 8

9.0

10.0

 

이승현(영화평론가)

2017.08.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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