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운동선수 가족들의 속 깊은 이야기

[트렌드]by 시스붐바

“앞으로도 열심히 지켜 봐줬으면 좋겠어요.”

여서정(수원시청)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대한민국 기계체조의 전설, 여홍철에게 전했다. 여서정은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기계체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여자 기계체조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여홍철-여서정 부녀는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부녀 메달리스트가 되는 기록도 세웠다.

스포츠에서 부모와 자식이 같은 길을 걷는 일은 흔하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운동을 시작하는 자식이 많고, 재능을 물려받아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둘 다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식이 부모의 명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 못 미치는 활약을 했던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서사는 스포츠를 보는 팬들에게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지금껏 많은 가족들이 때로는 슬픈, 때로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아버지의 그늘 : 차범근-차두리

“아버지가 너무 축구를 잘해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 근처도 못 갔다. 그래서 속상했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밉다.” - 차두리
2015년 은퇴경기를 마친 차두리가 남긴 말이다. 차두리는 대한민국의 축구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고려대학교 축구부 소속으로 월드컵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치룬 뒤에 거스 히딩크 감독의 주목을 받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독일과 스코틀랜드 등의 유럽 리그에서 활약했고, 은퇴 전에는 K리그로 돌아와 FC 서울에서 2014년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두리에게 아버지인 동시에 대한민국 축구 최고의 전설인 ‘차붐’ 차범근은 너무나도 높았다.

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차범근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평가받는다. 지금의 시선으로 차범근의 커리어만을 보면 차두리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차범근은 1980년대 축구 불모지였던 아시아 출신으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간판 공격수였다. 독일 언론 빌트와 키커에서 각각 1회(1979-80시즌), 2회(1979-80시즌, 1985-86시즌)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된 경험이 있다. 1980 UNICEF 세계 올스타, 킥AIDS88 세계 올스타 등에 선정되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던 차범근이다.

선수생활 평생을 ‘차두리’보다는 ‘차범근의 아들’로 살아온 차두리였다. 차두리는 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DFB-포칼 컵 준우승을 거뒀고, 국가대표팀에서도 늘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차범근은 아들과 같은 팀에서 같은 대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UEFA컵 우승도 2회 기록했고, 개인 기록에서도 압도적이다. 분데스리가 전문지 ‘키커’가 선정하는 선수 등급표인 ‘랑리스테’에서 최초로 WK(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은 아시아인이자, 같은 매체에서 80년대 최우수 외국인 선수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차범근은 엄청난 기록들을 세웠다. FIFA 공식 국가대표 경기에서 100경기 출전을 의미하는 FIFA 센추리 클럽의 최연소 가입자로 아직까지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하지만 차두리 또한 전설적인 선수라 기억될 자격이 충분하다. 차범근도 인터뷰에서 현역시절 동료들에게 아들이 국가대표라고 자랑하면 다들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언론사 ‘트란스퍼마르크트’는 차범근-차두리 부자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역대 부자 축구선수 3위로 평가했다. 아버지를 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축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차두리다.

함께 가는 코삼부자 : 허재-허훈·허웅

“농구인은 농구를 하며 평생 살아야 한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다른 걸 먹지 않는다. 운동 선수로 사는 건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이제 웅이, 훈이도 농구인이다.” - 허재
연세대학교 농구부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는 농구 형제, 허웅(스포츠레저학과 12, 이하 스레, 원주 DB 프로미, 이하 DB)과 허훈(스레 17, 부산-수원 KT 소닉붐, 이하 KT)은 차두리 못지않게 전설적인 아버지, ‘농구대통령’ 허재를 두고 있다. 허훈과 허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둘 다 농구에 두각을 드러냈다. 나란히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허웅과 허훈은 에이스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고, 무난하게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 무대로 진출했다.

허웅은 201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순위로 DB에 입단했다. 허웅은 드래프트에서부터 아버지와 엮였다. 당시 허재는 전주 KCC 이지스(이하 KCC) 감독으로 있었고, 1라운드 4순위로 허웅을 지목할 수 있었다. 마침 KCC의 슈팅가드 포지션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허재가 아들을 지목할지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허재는 결국 김지후를 지명하면서 부자의 만남은 무산됐다. 허재는 훗날 방송에서 “팀에 아들인 웅이가 들어왔을 때 팀 분위기가 망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라며 당시의 감정을 설명했다. 허웅 또한 방송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 농구를 그만두겠다고까지 했었다.”며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부자지간의 농구계에서의 만남은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허웅은 좌절하지 않았다. 데뷔 첫 해인 2014-15시즌에는 식스맨으로 활약하면서, 주전 못지않은 기여도를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부터 기량이 만개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군복무를 위해 신협 상무를 거쳐 돌아온 허웅은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구선수로 성장했다. 몇 번의 큰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번시즌 DB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허훈은 2017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KT의 지명을 받았다. 허훈은 프로 무대에 입성하자마자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KT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신인상 유력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KT의 간판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허훈은 2019-2020시즌을 기점으로 KBL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아버지인 허재조차 달성하지 못했던 KBL 최초 어시스트 포함 20-20을 달성한 허훈은 대한민국 최고의 농구선수로 우뚝 섰다.

자랑스러운 두 아들을 둔 허재이지만, 더욱 주목받는 건 그의 선수시절 기록이다. 허재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농구 재능을 드러내며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농구부에 입단한 허재는 첫 시즌부터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두 휩쓸며 전설의 등장을 알렸다. 허재는 대학 농구를 재패한 후 기아자동차 농구단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첫 해부터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시대를 시작한 허재는 수차례의 우승과 수차례의 MVP를 획득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허재다.

허재와 허웅·허훈 부자는 차범근과는 다른 허재의 행보로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허재가 선수 은퇴 후 이어오던 감독 생활을 정리하고 방송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허재가 예능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덩달아 허웅과 허훈도 주목받았고,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팽팽한 경쟁 구도에 돌입할 수도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들이 방송에서 하나 되는 모습은 차범근-차두리 부자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허웅과 허웅에게 아버지는 전설적인 농구선수임과 동시에 재미있는 방송인이 됐다.

'바람의 손자’의 등장 : 이종범-이정후

“아버지처럼만 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만 사실 아버지의 야구 명성은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바람의 손자’가 아닌 ‘야구 선수 이정후’로 한 번 당당히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 이정후
축구, 농구를 지나 야구계에도 전설적인 아버지를 둔 스타가 탄생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키움 히어로즈, 이하 키움)가 2017년 1차지명을 받아 키움에 입단했다. KBO 최초의 부자 1차지명 사례가 되며 주목을 받은 이정후는 첫 시즌부터 아버지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며 신인상을 획득했다. 배트 컨트롤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주목받는 신인에서 괴물 신인으로 성장한 이정후는 KBO 최연소 800안타, KBO 단일시즌 최다 2루타 등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KBO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현대 야구에서 요하는 능력을 고루 갖췄다고 평가받는 이정후는 메이저리그가 주목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정후도 꽤 높은 아버지의 벽을 가지고 있다. 이종범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야구를 잘했다는 평을 받는 전설적인 선수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기아 타이거즈에 이르기까지 선수생활을 이어오며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통산 정규시즌 MVP 1회, 한국시리즈 MVP 2회, 골든글러브 6회 등의 개인 수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끈 이종범은 ‘종범신’, ‘야구천재’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정후는 선수 생활 목표로 아버지의 기록을 뛰어넘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종범의 KBO 기록은 통산 1797안타 194홈런 510도루 1100득점 730타점이다. 이정후는 KBO에서 주목받는 스타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기록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정후의 도전은 계속된다.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는 스포츠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앞에서 소개한 가족 외에도 유도 메달리스트 김미정&김병주 부부의 아들 김유철(용인시 직장운동경기부), 야구의 이순철-이성곤(체육교육학과 10, 한화 이글스) 부자, 배구의 홍지연-이예담(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모녀 등도 운동 집안으로 거듭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될 스포츠에서의 부모와 자식 서사를 주목하는 것도 스포츠를 접하는 재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시스붐바=글 서서빈 수습기자, 사진 KFA, MK스포츠 제공, 시스붐바 DB]​​

2022.08.0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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