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이나 창작이나 똑같아… 중독이니까 – ‘미저리’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살인이나 창작이나 똑같아… 중독이니까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스티븐 킹의 《미저리》. 정말 이건 너무 완벽하게 재밌는 소설이다. 흔히 말하는 ‘장르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소설의 얼개와 재미가 너무나 완벽하다 보니 예술적인 성취마저 느껴진다. 장르소설이라고 그리고 스티븐 킹이 대중소설가라고 평가하기에 이 소설은 너무나도 예술적이었다. 거의 자폐 수준에 빠진 한국 소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미 소설을 읽었다는 전제 아래 쓴 글이미로 줄거리가 궁금하다면 여기를 참조)

 

같은 소재를 다룬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종의 기원》의 주인공인 한유진과 미저리의 주인공인 애니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 일명 사이코패스라는 공통된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묘사되는 한유진과 애니의 모습은 몹시 다르다. 어쩌면 서술의 차이일 수도 있다. 《종의 기원》이 정신 장애를 가진 한유진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반면, 《미저리》는 일반인 ‘폴’의 시선에서 3인칭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포식자’와 ‘희생자’의 서술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종의 기원》은 《미저리》의 서술을 능가한다거나 더 훌륭한 혹은 더 농밀한 묘사를 보여주지 못한다. 미저리가 발표된 이후 무려 30년 뒤에 나온 소설 임에도 말이다. 심지어 사이코패스를 묘사하는 방법에서도 미저리를 능가하지 못한다. 정유정은 사이코패스를 가진 사람을 진화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순수한 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사이코패스가 악일까? 물론 어쩌면 악일 수도 있다. 사실 미저리에서도 애니는 ‘악’이니까. 하지만 악이라는 의미 하나로 묘사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생각해보면, ‘악’이라고 인식되는 한유진의 캐릭터는 확실히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애니는 어떤가? 사실 《미저리》의 애니야말로 진정한 악이다. 소설에서 그녀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은 몇십 명이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단순히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복잡한 정신세계와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은 애니라는 사이코패스를 묘사하는 데 있어 더 효과적이다. 한유진이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의 사이코패스였다면 애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래, 사이코패스라면 이래야지.”

 

애니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유진처럼 ‘피 냄새’에 본능적으로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유가 확실하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불쌍하거나 개새끼니까. 불쌍하니까 죽여야 하고 개새끼니까 죽여야 하는 것이다. 애니의 이분법은 굉장히 선명하다. 한유진의 사이코패스적 살인은 피 냄새를 미치도록 갈망하는 내 본능에 의한 것이었고 멈출 수 없이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애니의 사이코패스적 살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한 것이었고 ‘잠시나마’ 중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살인은 끊을 수 없다는 것에서 사이코패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애니의 모습이 더 현실적이다. 실제로 나타나는 사이코패스들의 행태, 그러니까 몇 년간 살인을 중단하다가 다시 살인을 시작하는 사이코패스의 모습은 한유진의 이유가 아니라 애니의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논리적이고 침착하게 반응한다. ‘증거’를 쉽게 남기지 않는 모습이나 은폐하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능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살인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살인은 그 증거를 취약하게 만든다. 이것은 애니가 살인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애니의 모습은 실제로 중독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중독과 사이코패스의 심리상태가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사이코패스들은 끊임없는 무엇, 그러니까 애니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되었든 아니면 다른 사이코패스처럼 즐거움을 위한 것이 되었든 어떤 ‘하나’에 몰입하고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어떤 ‘하나’로 인해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자극이 미치도록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극에서 벗어나면 돌아오는 것은 다시 일상이다. 단순한 일상이 아니다. 아, 내가 또 그 일을 저질렀구나라는 후회와 좌절감. 그리고 일종의 우울증.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된다. 반복된 조증과 우울증은 사람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예민해진 와중에 일상의 스트레스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평상시라면 넘길 수 있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시 자극을 찾는다. 위험하니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자극에서 오는 행복감, 자극을 경험하는 그 시간에 오는 행복감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이코패스의 살인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중독의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신병원이 됐든 아니면 회복센터가 되었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중독자가 경험한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여 주는데 이 상황이 중독자가 가지고 있는 자극에의 욕망을 줄여준다. 실제로 많은 중독자들이 비일상적인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중독되었던 알콜이나 약물을 멈춘다. 소설에서 애니도 마찬가지였다. 애니가 모든 것을 그만둔 이후 선택한 곳은 전남편과 별장 비슷하게 사두었던 곳이었다. 이곳은 ‘동네’라는 일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사람이 드문 곳이었기에 일상의 부대낌이 적었고 사회와 괴리되어 혼자 있는 상태에서 자극을 받아 ‘살인’이라는 중독에 다시 빠질 일도 없었다. 최소한 폴이 오기 전까진 그랬다.

 

더욱 재미있는 건 《미저리》에서 중독에 빠져 있는 것은 애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다른 주인공, 소설가 폴 역시 중독에 빠져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약 빤 소설이다. 폴의 중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치료과정에서 생긴 약물 중독이고 하나는 작가로서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것, 곧 창작에서의 열정이다. 실제로 창작과정에서 겪는 열정이나 희열은 중독에서 겪는 열정이나 희열과 굉장히 유사하다.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 상황에만 몰입하고 있는 것도 유사하며, 작품을 끝낸 뒤 밀려오는 무기력감과 패배감 약간의 우울증도. 맨정신이 되었을 때 아, 이건 다시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결국 다시 하고 마는 것도 비슷하다.

 

결국 창작자 더 좁게 소설가가 가지고 있는 창작의 열정은 어쩌면 중독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광기다. 그리고 그 광기는 애니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자기파괴적이며 동시에 상호파괴적이다. ‘폴’이 소설 집필에 가장 몰두했을 때, 가장 훌륭한 작품이 나왔고 《미저리》에서 클라이막스에 다다랐을 때, 그는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애니를 죽이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이게 일상의 폴이라면 가능했을까?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영화 〈위플래쉬〉다.

 

〈위플래쉬〉의 주인공들 역시 열정과 광기로 충만하다. 그것은 음악이라는 또 하나의 창작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열정과 광기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주인공들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앤드류’의 경우 완벽하게 드럼을 치기 위해 점차 편집증적으로 변해갔고 다른 것에 정신을 쏟는 것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여자친구와도 헤어진다(미친 거 맞다). 또 다른 주인공 플렛처는 어떤가? 그는 음악현장에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악귀에 가깝다. 그 완벽함에 질려 자살한 제자까지 있으니까. 하지만 음악현장이 아닌 또 다른 일상에서 그는 평범한 남성일 뿐이다.

 

결국 〈위플래쉬〉의 주인공들은 음악이라는 예술에 중독되어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의 광기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광기는 자기를 파괴하고 상대방마저 파괴한다. 손톱이 빠지고 피가 나도록 몰입하던 것은 자기파괴다. 또한 교통사고로 인해 연주를 하지 못하고 쫓겨난 ‘앤드류’와 제자를 학대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플렛처’의 모습은 모두 자기파괴다. 하지만 그 일이 발생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는 것은 상호파괴에 가깝다. ‘너 때문에 내가 그걸 즐기질 못하잖아!’가 그들의 심리다. 그로 인해 둘은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그 둘은 그 세계에 서로를 끊임없이 파괴하며 끊임없이 연주를 했지만.

 

다시 《미저리》로 돌아가서 ‘폴’이 애니를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한 것은 곧 자기 역시 파괴되겠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중독의 끝은 파멸이다. 극한의 중독에 다다랐을 때, 사람은 그 이상의 중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폴은 지금까지 썼던 것 중 가장 완벽한 작품을 썼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그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돌아온 미저리’를 쓸 때의 희열은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은 작품을 더 이상 쓰기 어려우니 새로운 작품을 쓰면서 더 훌륭한 자극을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의 집필은 일종의 슬럼프에 빠질 것이고 지독한 우울증에 빠질 것이다. 어쩌면 자살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책임은 누구한테 있나? 새로운 소설을 쓰게 만든 건,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애니’다. 그녀 때문에 ‘돌아온 미저리’를 썼다. 잘못은 그녀에게 있고 더 이상 그 희열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준 애니는 죽어야 마땅하다. 폴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저리는 스티븐 킹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기서 자전적이라는 것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광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스티븐 킹이 중독의 과정에서 경험했던 경험이 이 소설 안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일상의 경험이 아닌 비일상의 느낌이 담겨 있는 자전소설인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설정된 작가로서 ‘폴’의 위치나 지형은 스티븐 킹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소설에서 ‘폴’이 내뱉는 독백들은 그의 목소리를 가장한 스티븐 킹의 목소리 그리고 엄살과 불만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저리》를 읽는 우리는 나 요새 이렇게 힘들었어요! 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엄살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재밌고 완벽하게. 한 마디로 스티븐 킹은 나쁜 새끼다.

 

글 서군
편집 박성표

2018.03.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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