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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논어 1장 학이學而편

증자의 3가지 반성

by윤홍식

증자曾子가 말하길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①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② 벗들과 사귐에 신뢰를 어겼는가? ③ 스승에게 전해 받은 학문을 익히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공자의 수제자는 안자(顔子)였는데, 안자가 30대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공자의 도는 증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논어를 보면 안자는 칭찬만 듣는 제자인 반면, 증자는 “노둔하다.” 하고 지적을 받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안자가 죽고 나서 증자가 공자의 학문을 계승했죠. 그 증자의 밑에서 자사가 나오고, 자사의 학문을 익혀서 맹자가 나오게 됩니다. 증자가 공자의 말을 모두 외우고 실천하여 전달해줌으로써, 공자와 자사ㆍ맹자 같은 성현들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자는 평소에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결국 공자의 학문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이것은 내가 남을 양심으로 대하는 것에 충성스러웠는지를 확인하는 질문으로, 결국 “양심을 실천함에 몰입했는가?”를 반성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양심을 실천할 때 몰입해서 하고 계시나요?

 

양심을 실천할 때에는 몰입해서 했는지, 진심이었는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양심 중 ① ‘사랑’의 덕목으로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② ‘정의’의 덕목으로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고, ③ ‘예절’의 덕목으로 남에게 무례하지 않게 행동하고, ④ ‘지혜’의 덕목으로 자명하게 판단하되, 이 모든 것을 충성스럽게 했는지를 반성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양심을 실천함에 충성스럽지 못했다는 것은, 양심의 실천에 제대로 몰입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증자는 이 부분을 반성했던 것입니다.

증자의 3가지 반성

'三省'이 아니라 '百省'도 모자랄 판... (삽화: 차망우인)

깨어있는 마음으로 몰입하는 것을 유교에서는 ‘경’(敬)이라고 하여 강조했는데, 이는 ‘충성’(忠)과 통합니다. 충성은 마음(心)이 하나의 과녁에 꽂혀있는 형상(中)입니다. 그러니 몰입과 같습니다. 만약 마음이 두 개의 과녁에 꽂히게 되면 몰입이 되지 않아 근심(患)에 빠지게 되죠. “나는 조국에 충성한다!”라고 하면, 마음이 조국 하나에 꽂혀 있다는 것이고, 조국에 몰입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나의 가족에게 충성한다!”라는 말도 가능한데, 오직 가족에게 내 마음이 꽂혀 있다는 것이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증자는 이를 기준으로 매일 스스로를 반성한 것입니다. “내가 오늘 남을 위해 양심을 실천할 때 정말로 진심으로 몰입하면서 했는가? 아니면 의무감으로 억지로 했는가?” 이것을 먼저 점검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자는 “벗들과 사귐에 신뢰를 어겼는가?”를 반성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벗들과 사귈 때 뭔가를 말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이 있나?”를 반성한 것이죠. ‘신용(信)’이란, 간단히 말해 남(亻)에게 말(言)을 했을 때, 그 말이 먹힌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 말한 대로 늘 실천하던 사람의 말은, 말만으로도 곧장 신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만 앞서고 실천이 부족했던 사람의 말은, 그 말만으로는 남을 설득할 힘이 없기 때문에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말만 해놓고 실천하지 안으면 ‘사기’가 되고, 신뢰가 깨져버리는 것이죠.

 

“벗들과 사귐에 신뢰를 어겼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말만 앞서고 실천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양심을 계발하는 학문’을 익혔던 군자입니다. 남에게 양심의 실천을 권하는 입장에서, 스스로가 한 말을 저버리고 양심을 함부로 어김으로써 친구들로부터 신용을 잃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자는 이를 심각하게 반성해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 반성은 “나는 양심의 실천에 늘 성실하였는가?”에 대한 증자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증자는 세 번째로 “스승에게 전해 받은 학문을 익히지 않았는가?”를 반성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스승에게 전해 받은 학문이란 무엇일까요? 공자는 평생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자!”는 ‘양심의 실천’에 몰입했습니다. 공자의 학문의 골자는 “자나깨나 양심 잘 지키자!” 이것 하나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그 제자인 증자가 반성할 것은 다름 아닌 ‘양심’이겠죠.

 

그래서 증자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양심을 실천하는 법을 내가 다 익혔는가?”라고 반성한 것입니다. ‘익히다’(習)의 의미를 한자를 통해 살펴보면, ‘習’자는 새의 날개를 의미하는 ‘깃 우’(羽)자 밑에 ‘흰 백’(白)자가 있는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백’(白)자는 본래 ‘날 일’(日)자였다가 전해오는 과정에서 글자가 변형된 것입니다. 따라서 ‘習’자는 새가 날마다(日) 날갯짓(羽)을 하면서 날기 위해 훈련하는 모습을 담은 글자인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이 본성인 새도 처음에는 잘 날지 못 하고, 날갯짓을 매일 익혀야만 제대로 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심의 본성을 갖추고 있지만, 매일 익히지 않으면 양심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면, 남의 마음을 공감하는 ‘측은지심’, 부끄러운 줄 아는 ‘수오지심’, 주변의 눈치를 보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훈련이 없이는 그런 능력이 계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증자도 “나는 매일 스승이 전해 준 양심의 실천법을 잘 익히고 있는가?” 하고 반성했던 것입니다.

 

증자가 품었던 이 3가지 반성을 삶에서 진지하게 실천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철학’에 대해 오해하여, “나는 철학과를 안 가서 철학을 못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철학지식이 많다고 해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된 것은 철학과를 나와서가 아니라, 평생 “무엇이 옳은 것(善)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살다 보니 자연히 세계적인 철학자가 된 것이죠.

 

따라서 “나는 더 올바르게 살고 싶다!”라는 진지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철학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철학지식이 남보다 더 있다고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철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작은 선택을 할 때에도 “나는 더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싶다! 무엇이 더 옳은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가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이 양심에 관한 바이블들입니다. 즉 ‘고전’을 통해 전해지는 역대 ‘양심의 달인’들의 정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양심에 있어서 세계적 레전드들의 저술인 고전의 정보를 삶에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고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고전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진지하게 하루하루 사소한 것이라도 올바르게 선택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가 되는 최고의 비법입니다. 그래서 증자는 하루를 살더라도 올바르게 살고자, 매일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남을 대할 때 양심적으로 대하려고 진심으로 몰입했는가?”, “친구들을 대할 때 양심에 성실했는가?”, “양심의 달인에게 배운 학문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가?” 이렇게 증자처럼 매일 반성하면서 1년이 가고 2년이 가면, 우리의 인격이 바뀌고 진정한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철학자가 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