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글보다 더 기억에 남는 책 속 그림들

책 속 세계를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는 삽화가들

그림이 예뻐서 좋아했던 동화책

누구나 안데르센의 동화는 굳이 읽지 않아도 내용을 줄줄 꿰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도 어릴 적의 내가 심심할 때마다 책장에서 찾아 들었던 안데르센 동화집이 있었다. 내용이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책을 펼쳤던 이유는 책 속의 그림이 너무나도 예뻤기 때문이었다. 큰 크기의 묵직한 양장본인 데다 두꺼운 종이에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던 낭만적인 그림들은 책의 내용보다도 더 눈길을 끌었다.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출판된 <인어 공주>

그 책은 이제 어린아이가 있는 다른 집에 줘버린 탓에 우리 집에는 없지만 아직도 그 삽화들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뒤늦게 검색해 보니 그 책은 2005년 맞이한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출판된 책이었다. 그래서 안데르센 상 일러스트 부문 수상자 후보에 올랐던 삽화가 보리스 디오도로프의 그림을 실어 소장가치를 높인 책이었다. 초등학생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림이 예사롭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삽화의 교육적 가치, 알브레히트 뒤러

이렇듯 책에 실린 삽화는 그저 책의 내용을 뒷받침한다고만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끔은 책 속 삽화는 글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삽화의 중요성은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시로 성경의 삽화를 들 수 있겠다.

 

종교개혁이 휘몰아쳤던 16세기~17세기에는 성스러운 종교적 이미지를 뜻하는 ‘성상’을 둘러싸고 찬반론이 격하게 오갔다. 이는 십계명의 제2계명에 해당하는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나 혹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성경의 내용을 담은 그림은 당시 문맹률이 높았던 유럽 사회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알릴 수 있기에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최후의 만찬>, 알브레히트 뒤러, 1523, 목판, 21.3cm x 14.6cm

그리고 이 시기 대표적인 성경 삽화를 이야기하려면 알브레히트 뒤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판화로 제작된 성경 삽화 또한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중에서도 뒤러의 <최후의 만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최후의 만찬 속 장면 - 제자들 사이에 오가는 의심과 분노 – 과는 달리 가룟 유다가 자리를 뜬 뒤 남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구원을 약속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것은 바로 뒤러가 요한복음 13장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의 구절을 바탕으로 판화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즉 이 그림 속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말은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속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인 셈이다. 그렇기에 뒤러의 <최후의 만찬>은 분노와 배신감이 아닌 제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신뢰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 서성록 외 6명, <종교개혁과 미술>, 예경, 2011)

신비로운 꿈의 세계, 윌리엄 블레이크

이제 18세기로 넘어가 보자. 윌리엄 블레이크는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 삽화가로 판화 기법 중 하나인 릴리프 에칭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화를 멀리하고 수채화로 많은 그림들을 그렸는데, 유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의 그림들이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이고 꿈결 같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춤추는 요정들과 오베론, 티타니아와 퍽(Oberon, Titania and Puck with Fairies Dancing) 윌리엄 블레이크, 1786, 종이에 연필과 수채화, 48cm x 68cm

그는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성서의 <욥기>, 단테의 <신곡> 등에도 시화를 그렸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그린 작품은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작가 특유의 감성이 듬뿍 묻어난다.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은 8명의 아테네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요정 왕 오베론은 시종 퍽에게 사랑의 묘약으로 장난을 치도록 해 이들의 사랑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속에는 모든 사건이 해결된 뒤 결혼하게 된 세 쌍의 연인이 잠자리에 들자 요정들이 그들을 축복하며 춤추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림 좌측에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는 각각 요정 왕 오베론과 요정 왕비 티타니아로, 갈등이 해소된 뒤 마치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소년은 장난꾸러기 요정 퍽으로 수많은 남녀들을 사랑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익살스러운 미소와 자세는 가볍고 재빠른 퍽의 장난기 어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림 우측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는 인물들은 숲 속을 거니는 요정들이다. 이들은 마치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속 삼미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럽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프랑스 삽화의 1인자, 귀스타브 도레

다음으로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사랑받았던 삽화가 중 한 명인 귀스타브 도레는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그림에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 그는 평생 1만 점 이상의 판화를 그렸을 정도로 다작한 작가인데, 그중에서도 <푸른 수염>에 실린 삽화는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이다.

<푸른 수염> 속 삽화, 귀스타브 도레, 1862, 33cm x 27cm

<푸른 수염>은 1697년에 발간된 샤를 페로의 동화로 여러 차례 결혼했지만 아내들이 모두 실종된 귀족 푸른 수염에 관한 이야기다. 푸른 수염은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 한 작은 방만은 열지 말라고 하지만 아내는 그 약속을 어긴다. 그런데 그 방에는 지금까지 결혼한 아내들의 시체가 있었고, 그것을 보고 놀란 아내는 방 열쇠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열쇠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아 푸른 수염에게 들통이 난다. 그녀는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결국 오빠들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는 결말이다.

 

삽화 속 장면은 푸른 수염이 아내에게 집을 비우기 전 아내에게 열쇠 꾸러미를 맡기는 장면이다. 색감이 없는 흑백의 그림이지만 '작은 방만은 열어보지 말라'라고 신신당부하는 푸른 수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생생하다. 모자 밑에 드러난 푸른 수염의 이글대는 눈과 치켜든 검지손가락, 나이 많은 남편 앞에서 움츠러든 아내의 자세와 손끝이 서로 대조를 이루며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낭만주의의 특성이 묻어나 두 인물의 감정 표현이 강렬하게 드러나며 푸른 수염이 서 있는 벽 부분을 유독 어둡게 표현해 오싹함을 더해 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동화책 속 그림, 가스 윌리엄즈

마지막으로 소개할 20세기의 삽화가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가스 윌리엄즈의 작품은 아마 우리들에게 <샬롯의 거미줄>로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 동물 삽화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동화에 걸맞는 동물들의 감정 묘사에 능했다. 간결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사랑스러운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은 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동화 <샬롯의 거미줄(1952)> 속 가스 윌리엄즈의 삽화

가스 윌리엄즈는 돼지와 거미의 우정을 주제로 하는 <샬롯의 거미줄>뿐만 아니라 뉴욕 생활에 적응하는 귀뚜라미의 이야기를 담은 <뉴욕에 간 귀뚜라미 체스터>, 작은 생쥐의 모험을 담은 <스튜어트 리틀> 등에서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삽화로 사랑받았다. 그의 삽화 속에서 모든 동물들은 각자의 특징에 충실하면서도 마치 동물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생생한 감정을 품고 있다. 이러한 그의 그림들은 이제 성인이 된 독자들에게 순수했던 어릴 적을 떠올리게 해 주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삽화가들은 활자로만 펼쳐진 책 속의 세계를 상상력만으로 표현해 낸다. 책 속의 삽화들은 때로는 책의 내용보다도 기억 속에 남아 이제껏 잊고 살았던 책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최근에 삽화가 들어간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항상 읽는 책들 속 유일한 그림은 표지뿐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가끔은 e-북을 다운받아 화면 속 텍스트로만 책을 읽는 오늘날이지만, 가끔은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예쁘고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기만을 기대했던 어릴 적처럼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수현 에디터

2019.09.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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