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기억을 기록으로, '1913송정역시장'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졸졸 따라다녔던 전통시장은 활기차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정이 가득 담긴 ‘덤’을 항상 듬뿍 담아 주셨고, 사소한 안부까지 물을 정도로 단골이었던 가게도 있었다. 소박하지만 시끄러운 전통시장은 오랜 시간 각각의 동네를 지켜왔다. 그러나 대기업의 대형마트가 우후죽순 생겨나자 점점 전통시장들은 쇠퇴했다. 동네의 역사는 이제 기억 저 편에 위치하게 되었다.
식재료와 생필품을 사며 대화와 웃음을 나누었던 전통시장은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이 어우러지는 공간이자, 상인들에겐 생존의 기회와 같은 곳이다. 공동체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전통시장”이라는 시공간적 공통 기억을 갖는다. 이로써 전통시장을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칭할 수 있다. 대형마트로 전통시장의 비중이 줄어드는 동시에, 문화자원으로서 전통시장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도 있다. 전통시장의 문화가치를 보존하고자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이 붐을 이루고 있다. 전통시장을 살려본답시고, 최신식 건물을 증축하거나 프랜차이즈를 떡하니 좁은 시장 골목에 위치시킨다. 고유의 가치를 오히려 잃는 셈이다. 전통시장을 자본화, 현대화하기만 하니 오히려 기존 상인층이 피해를 볼 뿐이다.
광주광역시의 광주송정역 근처에 위치한 <1913송정역시장>은 그렇지 않다. 오죽하면, 시장의 오랜 전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장이 시작되었던 연도인 ‘1913’을 새로운 명칭으로 사용했을까. <1913송정역시장>에선 기존 건물 형태를 유지하고, 가게 별 아이덴티티를 살려 간판이나 내부 인테리어를 살짝 수정할 뿐이다. 뭐랄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세련됨이 묻어난다. 오랫동안 쌓여온 기억들을 기록으로 이어나가는 <1913송정역시장>의 주요 컨셉은, “시간”이다. 상점마다 갖는 역사와 이야기를 가게 앞 스토리보드로 전달하는 것만 봐도 느낄 수 있다. 그동안 지나쳐온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지나칠 시간들을 가장 지켜야 할 유산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흐를 수 밖에 없는 시간을 지킨다는 아이러니에 <1913송정역시장>을 더 알고 싶어져서 직접 찾아가보았다.
모두가 도시로, 도심으로 이동하고, 점차 편리함만을 찾자 송정역 시장 역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13년에 매일송정역시장으로 시작해, 총 53개의 상가 중에 30여개 정도만 겨우 남아있었다.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와 함께 현대카드는 저물어가는 송정역매일시장을 소생시키고자 묘안을 찾아다녔다. 2014년에 현대카드는 강원도 평창의 봉평시장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경험이 있었지만, 매일송정역전시장과 달리 봉평시장은 5일장이고 원래 관광객들로 북적였다고 하니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결국, 상점과 상인들 고유의 스토리를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송정역전시장은 현대화된 건물 위주가 아닌,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1913송정역시장>이 되었다.
‘또 다른 대합실’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1913송정역시장>을 둘러보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떠오른다. 전통시장 고유의 투박하면서도 낡은 그 느낌을 간직한 동시에 상점 인테리어와 간판은 모던한 디자인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전달한다. 시장 골목 위에 노란색 망사 천을 군데군데 치고, 필라멘트 전구를 달아 밝고 활기찬 모습을 연출한다.
<1913송정역시장> 중앙에 나무판자들로 이루어진 공간은 쉼터의 역할을 한다. 구매한 먹거리를 여기서 먹기도 하고, 때로 버스킹을 하기도 한다. 편하게 머물렀다가 가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가까이에 공중화장실도 위치하고 있다. 이 공간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송정역 대합실이 있다. 기차역 근처에 위치한다는 입지적 특성을 고려해 열차 출발 시각 전광판을 설치했다고. 역의 전광판이 역사 외에 설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전광판 옆에는 물품보관함이 있어 더욱 편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이로써 <1913송정역시장>은 ‘광주송정역의 제2라운지’가 되었다. 광주송정역의 제2라운지인 <1913송정역시장>은 타 지역 관광객들까지 불러 모아, 이제는 광주광역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 중이다.
광주송정역의 열차 출발 안내 전광판이 설치되었고, 그 옆엔 물품보관함이 있다. |
100년 간 이곳을 이끌어온 시간들
1913년에 이곳에서 처음 ‘매일송정역전시장’이 시작됐다. 103년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름을 <1913송정역시장>으로 바꿨고, 시장의 아이덴티티를 살려 리뉴얼했다. 누적된 시간이 많은 만큼, 송정역시장은 상인들에겐 삶의 터전이고 방문객들에겐 다양한 추억을 주고있다. 시장 곳곳에는 의외의 위치에 100년의 흔적이 숨어있다. 상인들의 앞치마, 비닐 봉투, 카페 트레이의 종이를 <1913송정역시장>의 정체성이 담긴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또, 송정역 시장 골목의 바닥에는 건물 연도가 쓰여져 있다. 숫자가 가리키는 방향에 있는 건물의 완공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나 오래 되었나 싶은 건물도 있고, 이제 막 시작하는 귀여운 건물도 있다.
100년 간 이곳을 이끌어온 상인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6개의 기존 상점을 리뉴얼하면서 간판의 글씨, 가게 형태, 가게 색상 중 하나는 꼭 남겨두었다고 한다. 옛 정취를 살리자는 취지로 건물 자체의 리모델링은 최소화하고, 간판의 디자인은 상인들의 추억을 담아 제작되었다. 바꾸기 위한 변화가 아닌, 지키기 위한 변화다. <1913송정역시장>이 새롭지만 오랜 세월의 느낌을 함께 주는 이유다.
리뉴얼 과정에서 두 달에 걸쳐 기존 상인 30여명을 심층 인터뷰해 스토리보드를 제작했다고 한다. 기존 상점들 앞에는 상인의 정겨운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가 적혀져 있다. 해당 장소의 변천사도 함께. 상인들이 상점을 운영하는 일상과 그들만의 장인 정신을 담은 스토리보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를 들어, “오며가며”는 돼지주물럭, 닭발볶음 등 식사와 함께 반주 걸치기 좋은 곳인데, 3남매에게 해주던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전달하는 ‘문턱 낮은’ 식당임을 강조한다.
송정역시장에선 상인들 개개인이 지켜온 누적된 시간을 시각화해, 방문객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구경할 수 있다. 저물어가고 버려지던 조촐한 공간이었지만, 100년의 기억을 기록으로 승화시키자 새로운 문화 가치로 재탄생한 것이다.
앞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들
기존 어르신 상인들은 “젊은 친구들처럼 후레시(fresh)하게” 바뀐 가게 자체와 시장 전체에서 활력을 얻으신다고 한다. <1913송정역시장>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청년 창업자들은 그들만의 감각으로 새로운 서사를 써가고 있다. 기존 상인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담아 가게를 구성했다면, 젊은 창업자들의 가게는 그들이 원하는 젊은 감각, 그대로를 반영했다.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위트가 넘치는 공간이다.
현대카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하루 약 200여 명이 방문하던 공간이 이젠 약 4300여 명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방문한다고 한다. 평일엔 약 3000명이, 주말에는 약 6000명이 <1913송정역시장>을 찾는다. 이전에 비하면, <1913송정역시장>의 ‘지키기 위한 변화’는 성공적이지 않은가! 심지어 4월 18일부터 5얼 6일까지 누적된 방문객 수는 약 8만 2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앞으로가 기대된다.
꼬지샵 강수훈 대표님이 만들어주신 바로 그 닭꼬치!!! |
현재 <1913송정역시장> 중 가장 히트를 치고 있는 “꼬지샵”에 방문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닭꼬치에 깻잎, 치즈, 매운 소스 등을 뿌려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손에는 닭꼬치를, 다른 손에는 뜨거운 토치를 들고 있는, 꼬지샵 강수훈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송정역 시장이 현재는 시작 단계’라고 말했다. 현대카드와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의 도움으로 발판을 삼았다면, 이젠 상인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새롭게 시작한지 이제 막 한달이 되는 <1913송정역시장>은 아직 아쉬운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먼저, 상점의 수를 늘려 점차 시장 규모를 키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SNS에서 인기를 얻는 청년 상점과 오히려 단골 손님마저 잃고 있는 기존 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꼬지샵에서 만난 강수훈 대표의 말처럼, 기존 상인과 청년 상인이 조화롭게 지혜를 모은다면 더 큰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라 믿는다. 상인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 <1913송정역시장>은 지역사회의 기록으로 확대해 문화도시 광주의 특성을 잘 살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황지현 기자 ctims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