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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한여름 밤, 맥주와 팝콘에 곁들일 코미디 영화

by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그리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좋아하는 내게 영화는 최고의 안주이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날의 안주는 다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한여름 밤엔 시원한 맥주와 마른안주, 바닷가 앞에선 소주와 회, 분위기를 내고 싶은 날엔 레드 와인에 스테이크, 비가 오는 날이면 막걸리에 전이 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걸스나잇을 보내는 밤이면 데낄라와 혼자서는 차마 보지 못하는 공포 영화를, 우울한 날이면 소주와 영화를 핑계로 눈물을 한바탕 쏟을 수 있는 슬픈 영화를 보곤 한다. 그날의 기분, 상황, 주종과 어울리는 영화를 보고자 하는 나름의 철칙(?)이랄까.


요즘같이 무덥고 습해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면, 특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쉬이 지쳐버리고 만다. 유일한 낙이라면, 캔맥주와 전자레인지용 팝콘이 들은 봉지를 흔들며 퇴근하는 것인데, 이때 가장 애정하는 궁합은 킬링타임용 코미디 영화이다.


이런 날은 영상미, 예술성, 심오함 같은 건 필요 없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정신적 체력적 여유조차 없다. 반쯤 누워서 시원한 맥주에 팝콘 와그작거리며 킥킥거릴 수 있는 가벼운 영화를 보다 잠드는 것이 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아닐까. 요 며칠 그런 생활을 반복했기에 몇 가지 영화를 추천해보려 한다.


스포일러 일부 포함

베케이션 (Vacation / 2015 / 미국)

여성스럽고 내향적인 첫째 아들, 형을 이겨 먹으려 하는 어린 둘째 아들, 어느 순간부터 휴가 때 웃음기가 사라진 아내를 보며 가장인 러스티는 가정의 변화를 꿈꾼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10년 만에 새로운 장소로 여름 휴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결코 쉽지 않은, 끝날 것 같지 않은 4,120km 거리의 다사다난한 로드트립을 보여준다.

러스티가 여행을 위해 빌려온 기이한 자동차와 알 수 없는 기능들이 내재된 리모콘, 여행 내내 그들을 뒤쫓는 사이코 트럭 운전사, 원효대사 해골 물 뺨치는 온천수부터 갑자기 등장한 크리스 헴스워스의 난데없는 망치(?)와 내내 우리의 한국어로 부르짖는 내비게이션까지. 막장이 따로 없다. 웃길 것 같은 건 죄다 때려 넣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개드립과 섹드립 또한 난무한다. 더럽고 추잡하지만 유쾌하다.


결과적으로 네 식구는 여행을 통해 산전수전을 함께 겪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 두터워지는 전형적인 가족 코미디스러운 엔딩을 맞는다. 너무나도 뻔한, 이미 수차례는 보았을 법한 레퍼토리의 영화이지만 때로는 이런 영화가 절실할 때도 있다. 그런 날, 이들의 휴가에 함께 해보길 추천한다.

더 히트 (The heat / 2013 / 미국)

보자마자 시골 쥐와 도시 쥐가 떠오르는, 주먹과 협박이 전부인 와일드한 촌구석 멀린스 형사와 세상 잘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은근히 빈틈이 많은 완벽주의자 FBI 요원 애쉬번의 이야기다.

멀린스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애쉬번은 자신의 승진을 위해서 마약 조직 보스 라킨을 잡아야 한다. 비록 그들의 동기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얼떨결에 공조수사를 하게 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그들의 협업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끊임없이 다투고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하지만 미운 정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그새 미운 정부터 고운 정까지 나눠버린 그녀들은 베스트프렌즈를 넘어 자매가 되고 환상의 팀워크로 라킨을 검거한다.

캐스팅이 다 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치트키인 산드라블록과 멜리사 맥카시 캐미가 멱살 잡고 끌고 간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들의 조합과 연기가 좋았고 두 주인공의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에서 나오는 티키타카가 웃음 포인트로써 적절했다. 그리고 사실, 살면서 나와 비슷한 성격의, 잘 맞는 이랑만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와 맞지 않는, 결이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일 또한 종종 겪게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나는 멀린스와 애쉬번 정도면 꽤나 현명하게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우정으로 감싸 안았으니 말이다. 완벽하지 않은 이들이 만나 성장해가는 과정은 언제 보아도 따뜻하다. 멋진 여자들의 우정을 미국식 코미디와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스파이 (Spy / 2015 / 미국)

첫인상은 비장하다. 깔리는 BGM부터 웬만한 첩보 영화 저리가라다. 장르가 코미디인 걸 모르고 봤다면 킹스맨 같은 영화라고 잠시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착각은 5분도 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익히 접하던 것과는 달리 천장에 박쥐가 가득한, 엉성하기 짝이 없는 CIA 사무실과 진중한 카리스마보다는 푼수기 가득한 내근 요원 수잔 쿠퍼가 등장하니 말이다.

수잔 쿠퍼는 자신이 돕는 현장 요원 파인을 오랜 시간 짝사랑해왔다. 하지만 임무를 수행하던 중 파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수잔은 복수를 위해 자신이 현장에 나가겠다고 한다. 수잔은 현장 경험이 없었지만, 현장 요원들의 신분이 테러범들에게 전부 발각된 상황에서 CIA에 다른 선택권은 없다. 하지만 CIA의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장 요원 릭 포드는 자신이 홀로 조국을 지키겠다며 떠난다. 그런 릭과 동선이 겹치고 꼬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수잔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목표물에 가까워져 간다.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거칠고 위험한 순간들이 닥친다. 그녀를 호위하는 부하 요원은 물론 없으며 작고 뚱뚱한 몸으로는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홀로 헤쳐나가면서 소심했던 수잔은 점차 자신감을 갖고 대담해지고 당당해지며 여유까지 부릴 수 있게 된다.


익히 보던 스파이 영화와는 다른 구석이 많다. 스파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의 인물이 주인공이며 히어로 같은 완벽한 요원은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들 어딘가 어설프다. 악당 또한 나쁜 짓 흉내 내보려는 바보 같아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최첨단 비밀무기도 쥐어지지 않는다. 변비약, 치질용 물티슈 등의 외관을 가진 무기들 뿐. 블랙코미디로 점철된 영화지만 주인공 수잔의 변화와 그녀의 조력자들을 보면 이를 관통하는 교훈이 존재함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는 사실 추천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가벼운 마음으로 봤기에 나조차도 느낀 것이 그리 많지 않고 그렇기에 긴말할 것도 없고 재밌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재밌다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 나는 킥킥거리며 봤을지언정 누군가는 정색하고 볼 수도 있으니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미국 영화 특유의 개그 코드는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던가. 그러니, 부디 기대 않고 굳이 시간을 내서가 아닌, 시간이 남아 할 것이 없을 때 보는 것을 추천한다.


강안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