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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Opinion

1980년 광주의 봄, '오월의 청춘'들의 선택

by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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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드라마 <오월의 청춘>이 얼마 전 종영했다.


‘1980년 봄 광주, 다가올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지 못한 채 저마다의 운명을 향해 뜨겁게 달려가는 청춘들의 휴먼 멜로드라마’라는 소개처럼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건이나 영웅적인 인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월의 청춘>은 1980년 5월이 어떤 의미가 될지 짐작조차 못 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드라마는 총 12회 중 8회 동안 그저 울고, 웃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청춘의 모습을 그린다. 서울대 의대에 수석 입학해놓고 대학가요제에 나가려고 졸업은 뒷전에 둔 황희태,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단 있게 살아가는 광주 평화병원의 간호사 김명희. <오월의 청춘>은 이 두 청춘의 사랑에 조금 더 주목한다.


누군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했다. 명희는 희태에게 ‘우리는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며 ‘결정은 신이 하고, 우리는 신이 그어 놓은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연, 혹은 운명은 두 사람을 만나게도 하고 예기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 놓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치열하게 고민하며 최선의 선택을 찾는다.


독일 유학에 합격했지만 비행기 푯값이 없었던 명희는 수련의 맞선에 대신 나가기로 선택했고, 희태는 수련인 척 맞선에 나온 명희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 또 약혼식에서 함께 손을 잡고 도망치기를 선택했고, 서울에서 다시 광주로 내려오기를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연속을 통해 쌓여가는 인물들의 풋풋한 사랑과 인생을 지켜보며 시청자들은 함께 울고 웃고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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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0년 광주라는 배경을 알고 있는 이상, 청춘들의 사랑에 함께 설렐수록 은은한 불안과 슬픔이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광주로 가는 군대의 모습으로 8회의 막이 내리고, 남은 4회 동안 인물들은 거대한 비극을 견뎌내야 했다. 명희와 희태가 첫 데이트를 하던 거리는 군인들로 가득 찼고,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던 발랄한 고등학생 진아는 군인에게 맞아 쓰러진다. 이런 감당하기 힘든 비극 속에서도 인물들을 계속해서 선택해야만 했다.


수련은 ‘우리가 뭘 바꿀 순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은 있’다고 말한다. 명희와 희태는 병원에 남아 환자들을 치료하기를 선택했고, 수련과 수찬은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돕기로 선택했다. 그건 엄청난 대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병원 혹은 거리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내가 될 수도,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택들이 상황을 다 바꿔놓을 순 없다.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신이 그어 놓은 선’,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로 선택한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명희와 희태는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주례도 예물도 없는 결혼식을 위해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한 기도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누구의 기도빨이 더 좋은가 시험해보자고 말한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희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우리 앞에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어렵게 맞잡은 이 두 손 놓지 않고 함께 이겨낼 수 있기를

무엇보다도 더 힘든 시련은 명희 씨 말고 저에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희태의 기도가 끝나고 명희가 기도하려는 순간, 명희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지고 두 사람은 다시금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다. 그 와중에 명희의 동생 명수가 사라지고, 두 사람은 명수를 찾아 헤매다 갈림길 앞에 선다. 그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로 향한 명희와 희태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명희는 명수 대신 총을 맞아 숲속에 버려졌고, 목숨을 건진 희태는 41년 동안 명희를 찾아 헤맨다. 명희의 유골은 2021년에 이르러 비로소 발견된다. 그리고 사망 당시 명희의 소지품을 빼앗아 버리지 않았던 한 군인의 선택에 의해, 명희의 기도는 41년 만에 희태에게 전해진다.

주님 예기치 못하게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 슬픔에 남은 이의 삶이 잠기지 않게 하소서

혼자되어 흘린 눈물이 목 밑까지 차올라도

거기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소서

명희의 기도는 이러했다. 희태는 명희의 기도를 듣고서야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깨닫는다. 희태는 남겨진 자의 삶이 끔찍하게도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한다. 남겨진 자는 함부로 공감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크나큰 고통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희태는 죽어보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야속한 운명을 원망했고, 자신의 선택을 많이 후회했노라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힘든 시련은 자신에게 달라’는 희태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혼자된 이가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가게 해달라는 명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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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희태는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오롯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겨진 자로서의 지독한 삶과 사랑하는 이의 삶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다. 그해 오월, 그 수많은 선택들은 곧 그들의 사랑이자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제 희태는 남은 인생을 명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앞으로도 희태는 명희를 그리워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겠지만, 이제는 ‘그 눈물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갈 힘과 용기’가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진다. 명희와 희태의 기도빨은 누가 더 좋다 할 것 없이 둘 다 강력했던 것 같다.


<오월의 청춘>은 시민들을 진압하는 장면의 직접적인 묘사를 최소한으로 한다. 그럼에도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또 남은 자의 삶은 마지막 화 뒷부분에서 잠시 동안만 그려졌지만, 그 인상은 아마 오랜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나와 비슷한 청춘들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랑과 아픔을 내내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또다시 그 오월로’ 돌아간다는 희태의 아픈 고백이 가슴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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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청춘>은 희생된 이들의 고통과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함부로 전시하거나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애도의 윤리를 보여준다. 이것이 그들의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오월의 청춘>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한다. <오월의 청춘>은 그들의 고통을 잊지 않고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고 애도하자고 이야기한다.


또 세상엔 바꿀 수 없는 일투성이고, 인생은 보잘것없이 느껴지겠지만, 최선을 다해 무언가 선택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자고 말한다. 그리하여 지난 시간들과 앞으로의 시간들은 모두 우리의 선택이자 간절한 기도, 그리고 사랑임을, 그 모든 것들은 삶을 헤쳐 나갈 힘과 용기가 될 것이라는 위로를 전한다.

어김없이 오월이 왔습니다.

올해는 명희 씨를 잃고 맞은 마흔한 번째 오월이에요.

그간의 제 삶은 마치 밀물에서 치는 헤엄 같았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빠져 죽어보려고도 해봤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또다시 그 오월로 나를 돌려보내는 그 밀물이 

어찌나 야속하고 원망스럽던지요.


참 오랜 시간을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로 살았습니다.

그해 오월에 광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 광주에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갈림길에서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살지 않았을까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명희 씨가 돌아와 준 마흔한 번째 오월을 맞고서야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해 오월 광주로 내려가길 택했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좀 더 힘든 시련은 당신이 아닌 내게 달라 매일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았더라면

내가 겪은 밀물을 고스란히 당신이 겪었겠지요. 남은 자의 삶을요.

그리하여 이제 와 깨닫습니다.

지나온 나의 날들은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음을,

41년간의 그 지독한 시간들이 오롯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었음을.


내게 주어진 나머지 삶은 당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거센 밀물이 또 나를 그 오월로 돌려보내더라도 

이곳엔 이제 명희 씨가 있으니

다시 만날 그날까지 열심히 헤엄쳐 볼게요.


2021년 첫 번째 오월에 황희태

정다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