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청설모, 고라니 뛰어노는 '비밀의 숲'
경기 구리 동구릉 왕릉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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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아시아투데이 글·사진 김성환 기자 = 경기도 구리 검암산(117m) 동쪽 기슭 동구릉 숲길이 개방됐다고 해 가봤다. 조선왕릉을 에두르는 숲길은 아무 때나 걷지 못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매년 봄, 가을 단 2차례만 한시적으로 개방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의 가치를 알리고 도심 속 힐링 공간을 제공하려는 취지에서다. 모든 숲길을 열지도 않는다. 안전, 환경 등을 고려해 일부만 공개한다. 이게 ‘왕릉숲길’이다. 때를 놓치면 애태우며 한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올봄 개방기간은 오는 6월 30일까지다. 모두 9곳의 왕릉숲길이 열렸다. 동구릉을 포함해 태릉~강릉 숲길, 의릉 천장산 숲길(이상 서울), 장릉 능침 북쪽 숲길(경기 파주), 광릉 복자기나무 숲길, 사릉 홍살문~능침 북쪽 숲길과 능침 둘레길(이상 경기 남양주), 융릉∼건릉 숲길(경기 수원), 삼릉 공릉 북쪽과 영릉~순릉 작은연못 숲길(경기 파주), 영릉 외곽 숲길(경기 여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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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은 ‘왕릉 박물관’이다. 조선왕릉은 현재 북한에 2기, 남한에 40기 등 총 42기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무려 9기가 동구릉에 있다. 해서 전국 18개 왕릉군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이들을 차례로 좇다보면 ‘조선왕조 500년’이 눈앞에 오롯이 펼쳐진다. 곰삭은 시간만큼 숲길의 운치도 깊었다. 요즘 오래된 나무마다 초록이 물이 올랐다. 한낮 볕발은 점점 날카로워지는데 숲은 아직 시원했다.
“일반 관람로처럼 주작대로가 아니라 두세 명이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산책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소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사무관은 왕릉 관리자나 관리용 경운기가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인공의 손길이 자주 미치지 않으니 풍경이 천연해요. 우리만 보기 아까워서 풍경이 가장 예쁜 시기에 맞춰 예쁜 구간을 선정해 개방하는 겁니다.” 동구릉 왕릉숲길은 휘릉~원릉~경릉~양묘장을 잇는다. 길이는 약 3.4km다. “동구릉 면적이 약 60만평이나 돼요. 경복궁보다 4.5배나 커요. 올봄 개방된 숲길 중 여기가 길이가 가장 길고 숲 생태도 잘 보존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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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왕릉숲길은 조붓했다. 길 폭은 일반 관람로의 절반에 불과했다. 왕릉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은데 숲길에는 참나무같은 활엽수가 많았다. 이러니 숲 그늘이 짙고 분위기가 아늑했다. 한낮에도 선선했다. 송시경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소장은 “숲에선 기온이 2~3도는 낮아진다”고 했다. 게다가 ‘깔딱고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걷기가 편했다. 약간 경사진 구간도 나타났지만 인상이 찌푸려질 수준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숨가쁨’이랄까. 나무향기가 싱싱했고 바람소리가 상쾌했다. 걷고 나면 사람이 참 순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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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미 동구릉역사문화관 해설사는 오래 전 동구릉 주변 숲이 아주 울창했단다. “검암산은 낮지만 조성왕조실록에 보면 호랑이가 수시로 나타나서 포수 50명을 차출해서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숲이 울창했답니다. 개방되기 전에도 돌아봤는데 왕릉에 이런 숲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시림이 따로 없었어요.” 지금은 조붓한 숲길로 정비가 됐지만 당시의 한갓진 분위기는 여전히 남았다. 찾아간 날은 평일이었지만 걷기에 나선 이들이 제법 있었다. 소풍(체험학습) 온 유치원 아이들이 걷고, 나들이 나온 가족이 걷고, 혈기 넘치는 ‘청춘’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걸었다. 스위스에서 여행 왔다는 20대 청년 토마스는 카메라 들고 홀로 일대를 누볐다. “베리 뷰티풀! 베리 익사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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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왕릉숲길엔 때죽나무와 쪽동백나무가 자생한다. 특히 때죽나무가 이 숲길의 테마다. 때죽나무는 열매를 빻아서 물에 뿌리면 물고기들이 떼로 죽는다고 붙은 이름이란다. 물고기 잡을 때 많이 썼다. 동백나무가 귀했던 탓에 서민들은 쪽동백나무의 씨앗으로 기름을 짜서 사용했다. 두 나무 모두 작고 하얀 꽃이 가지 아래 “작은 종(鐘)처럼 매달려” 핀다. 지금 피기 시작한 꽃은 6월까지 간다. 양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서어나무를 찾아봐야 한다. 군락 이룬 곳이 흔치 않은데 여기선 볼 수 있단다.
양묘장에선 하늘이 열렸다. 왕릉숲길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개방감에 가슴이 후련했다. 궁궐과 조선왕릉에 필요한 전통수목을 키우는 곳이 양묘장이다. 이 사무관은 동구릉에 필요한 수목들을 여기서 조달하기도 한다고 했다. 한쪽에는 야외 무대도 마련돼 있었는데 6월에는 여기서 음악회도 열릴 예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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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숲길만 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관람로나 능 주변도 나무가 좋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에서 공들여 관리하니 당연지사다. 숨 멎을 듯 경건한, 오래된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신비로운데 왕릉 곳곳에는 이런 나무들이 천지였다.
동구릉 9기의 능 구경은 또 다른 재미다. 류 해설사는 어느 것 하나 쉬이 지나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봐야 할 능으로 건원릉(태조), 목릉(선조), 원릉(영조)을 꼽았다. “동구릉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계속해서 능이 만들어졌어요. 건원릉, 목릉, 원릉을 보면 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왕릉을 보는 겁니다. 시대에 따라 능의 형태가 다르고 병풍석이나 석물도 차이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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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건원릉은 중요하다고 했다. 검암산 줄기의 중심이 되는 용맥(산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이 지나는 자리에 놓였다. 이게 중심이 돼 동, 서측에 각각 3기, 5기의 능이 자리를 잡았다. 건원릉 능침에는 억새가 자라는데 태조가 고향인 함흥의 억새와 흙을 올려달라고 했단다. “가을이 되면 바람을 타고 우는 억새 소리가 정릉(서울 성북구)에 묻힌 부인 신덕왕후에게 그리운 마음을 전하는 소리 같아요.” 1년에 단 한 번 가을 개방기간에 건원릉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하나 더 추가하면 3개의 능이 나란히 앉은 경릉(추존왕 덕종)도 이색적이다. “동구릉이라고 9분이 모셔져 있는 줄 아는데 총 17분이 모셔져 있어요. 합장릉, 동원 이강릉, 동원 삼강릉, 삼연릉 등 능의 형태가 다양해요.”
동구릉과 왕릉숲길은 한나절 머리 식히며 시간 보내기에 어울린다. 거긴 역사가 흐르고 수목원 못지 않은 상쾌함이 있다. 청설모가 뛰어다니고 가끔 고라니도 나타난다. “조선시대 왕릉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였죠. 효를 실천하는 모습이나 왕권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고. 요즘은 역사 학습의 장, 생태 교육의 장이에요. 알싸한 나무향 맡으며 숲길 걸으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참 편안해지는 걸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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