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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여행] '거리 두기'의 즐거움...선비들 은거한 자연 속 정원

by아시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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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김성환 기자 = 볕이 잘 드는 마당과 소박하지만 예쁜 정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담장을 넘어 흘러드는 바깥의 ‘요란한’ 소식을 무심히 외면할 수 있는 신비의 공간, 세속에서 한발 물러나 있더라도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보이는 것의 화려함을 좇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릴 수 있는 은밀한 장소 말이다. 이런 곳에서는 마음이 봄바람처럼 순해지고 그리운 것은 더욱 그리워질 거다. 이게 ‘힐링’이다. 타인과 또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일이 가끔은 필요하다. ‘거리 두기’가 외롭고 불편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집 가까운 곳에 별서를 짓고 정갈한 정원을 꾸민 후 자연을 벗 삼아 은거했던 옛 선비들이 많다. 별서는 오늘날 별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볕이 잘 드는 남도 땅에는 이들의 발자취가 제법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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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소쇄원


전남 담양 가사문학면에 있는 소쇄원이 있다. 우리나라 별서정원의 백미다. 별서는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은거하려던 선비들이 지었다. 소쇄원은 조선 전기 개혁주의자였던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1503~1557)가 1530년에 조성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1519)에 연루돼 유배를 당한 후 나중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다. 스승의 죽음으로 벼슬길에 회의를 느낀 양산보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꾸미고 은거한다.


소쇄원은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광풍각, 제월당 등의 건물이 튀지 않게 들어 앉았다. 건물은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됐다. 들머리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연못도 운치를 더한다. 궁궐정원의 으뜸으로 꼽히는 서울 경복궁 후원이 화려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반면 민간정원을 대표하는 소쇄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소박한 멋이 있다. 조선시대 특유의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자박자박 걷는 재미가 있다. ‘ㄱ’자로 꺾인 담장, 소담한 정자,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나무다리 등 정이 가는 것들이 참 많다. 건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광풍각이다. 사랑방으로 쓰인 공간이다. 건물 사방으로 문이 나 있다. 눈 돌리는 곳마다 천연한 자연이 펼쳐진다. 발 아래로 물길도 지난다. 주인이 머물던 제월당도 잘 알려졌다. 주변에는 ‘선비의 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집안의 결속을 의미하는 석류나무, 자손의 번창을 뜻하는 산수유나무 등이 자란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자연에 귀의한 선비들이 이곳에서 수많은 가사문학을 남겼다. 김인후,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이상을 토로하고 사유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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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운림산방


전남 진도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조선 시대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이 머물던 곳이다. 남종화는 꾸밈없는 감흥을 존중하는 화풍으로 산과 바위 표면의 질감과 입체감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소치는 어릴 때 전남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통해 화풍을 익혔다. 또 대흥사의 초의선사 밑에서 그림을 익히다 나중에는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공부했다. 소치는 시·서·화에 뛰어났다. 추사는 나중에 소치를 두고 “압록강 이남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소치는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등지자 모든 것을 버리고 1856년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여생을 보낸다.


‘운림’은 ‘구름 숲’이다. 산방 앞에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이 우뚝 솟았는데 아침저녁으로 이 산자락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구름이 숲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산방에서 이 풍경이 잘 보인다. 소치는 집 앞에 널찍한 연못을 만들고 ‘운림지’라고 이름 붙였다. 운림지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고 여기다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여름이면 연못 가득 수련과 함께 붉은 배롱나무꽃이 피는데 이를 보기 위해 멀리서 찾는 이들이 제법 많다. 물론 여름이 아니어도 산방의 풍경은 운치가 있다. 산방 뒤에는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이 펼쳐진다. 넓이가 약 62만㎡에 달한다. 소치는 이 숲을 산책하며 사유하며 내면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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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 보길도 부용동정원


전남 완도에 속하는 작은 섬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어부사시사’로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가 이 섬에 발을 들인 이유는 이렇다.


고산은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고향인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왕을 돕기 위해 강화도로 향하던 중 ‘삼전도의 치욕’ 소식을 들었다. 통분해서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제주도로 향하는 길에 보길도에 들렀다. 울창한 원시림과 올망졸망한 섬들이 떠 있는 바다 등 수려한 풍광에 반해 아예 눌러 앉는다. 곳곳에 집과 정자 등 모두 25채의 건물을 지었단다. 무릉도원과 같은 명소가 숱하게 생겼다. 보길도를 ‘윤선도의 섬’으로 부르는 이유다. 최근에는 해안을 따라 걸으며 고산의 발자취를 음미하는 5.16km의 ‘어부사시사 명상길’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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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동은 고산이 터를 잡고 정착한 동네다. 당쟁에서 벗어나 사색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했던 터전이다. 부용동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부용동정원’이다. 담양 소쇄원, 강진 백운동정원과 함께 전남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어쨌든 고산은 계곡의 물을 막아 연못(세연지)을 만들고 이 가운데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예쁜 다리도 놓고 동백나무, 소나무, 대나무도 심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원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이 조화를 이룬, 전통 별서정원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등에도 고산의 흔적이 오롯하다. 낙서재는 고산이 생활하던 곳, 곡수당은 그의 아들이 휴식을 취한던 곳으로 알려졌다. 낙서재 반대편 산중턱에 세워진 정자인 동천석실은 부용동 최고의 전망대다.


보길도까지 가려면 큰마음 먹고 길을 나서야 한다. 전남 완도 화흥포항이나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노화도행 배를 타고 노화도까지 간후 노화도에서 보길대교를 건너면 보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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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백운동정원


전남 강진 성전면 월출산 남쪽 기슭에 백운동정원이 있다. 조선 중기의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조성한 별서정원이다. 그는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를 뒤로 하고 숲이 울창한 이곳에 예쁜 별서와 정원을 꾸몄다. 별장으로 사용되던 백운동 원림은 증손자 이의권이 가족과 거주하며 주거형 별서로 변했고 이후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됐다. 정원 들머리에는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이 울창하다. 오솔길 지나고 계곡을 건너면 은밀하게 자리잡은 안뜰과 건물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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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고요하고 숲이 울창한 백운동은 오랫동안 시인묵객들의 애를 태웠다. 숱한 이들이 시와 그림으로 백운동을 남긴 후 오랫동안 여운을 즐겼다. 조선 시대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제자들과 이곳을 다녀갔다. 그리고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12개의 멋진 풍경을 담은 시도 짓게 했다. 이를 엮어 ‘백운첩’이라는 시첩을 만들었다.


백운동의 명성은 더 오래됐다. 이담로보다 약 100년이나 앞선 조선 광해군 때 인물인 해암 김응정은 계곡 옆에 ‘신선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의 정선대를 짓고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했다. 고려 시대에는 백운동 계곡에 백운암이란 암자가 있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백운동정원의 가치를 인정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했다.


어쨌든 백운동정원에서는 안뜰에 남아 있는 ‘유상곡수’의 유구를 봐야 한다. 시냇물을 끌어 마당을 돌아 나가게 만들어 놓은 시설인데 민간정원에서 유상곡수가 남아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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