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랠리' 끝에… 현대차 날개를 펴다

고성능차 후발주자 현대차의 질주

 

지난달 30일 경기도 화성시 현대차 남양연구소 내 시험 주행로. 고성능차인 i30 N 조수석에 올라타자, 장성윤 현대차 책임연구원이 시속 150~160㎞까지 고속 질주하다가 코너를 만나면 시속 60~70㎞로 급감속하는 식의 주행을 반복했다. 카레이서가 모는 차량의 조수석에 타보는 이른바 '택시 체험'이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도로에 착 붙는 차의 안정감이 확인되면서 짜릿함이 느껴졌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구현했다는 박력 넘치는 엔진 배기음, 한계 상황에 다다른 타이어의 마찰음도 듣기 좋았다. 장 연구원은 "이게 바로 운전의 재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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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월드랠리팀 경주차가 지난해 6월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열린 ‘2018 월드랠리챔피언십(WRC)’ 7차 대회에서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처음 출전한 WTCR(월드 투어링 카 레이싱)에서 고성능 레이싱카 i30N TCR로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올해는 WRC에서 종합 우승이 유력하다. /현대차

이날 체험한 i30 N은 지난해 세계 3대 자동차 경주 대회로 꼽히는 WTCR(월드 투어링 카 레이싱)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차(i30 N TCR)의 양산 모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처음 출전한 WTCR에서 1등을 하면서 모터스포츠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포뮬러원(F1)과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WRC(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선 올해 종합 우승이 유력하다. 현대차가 2014년 고성능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5년 만에 이룬 성과다.

정의선, 그리고 알버트 비어만… 고성능차를 향한 꿈

현대차는 그동안 합리적 가격에 품질이 꽤 좋은 차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14년 연 생산량 800만대를 돌파하며 '톱5'에도 올랐다.


하지만 2% 부족했다. '감성 품질'은 여전히 떨어진다는 자성도 나왔다.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고성능차다. 부품이나 구동 시스템이 훨씬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고성능차를 개발해 기술의 '디테일'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김무상 고성능차센터장은 "1990년대 양적 성장, 2000년대 품질 경영, 2010년 디자인 경영으로 이어진 현대차 역사에 '퍼포먼스 카(고성능차)'를 추가하는 것"이라며 "고객에게 RPM(엔진 회전수)이 아니라 BPM(심장박동수)을 올려주는 '감동적인 차'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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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비어만 현대차 사장이 고성능차 i30N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BMW에서 31년간 고성능 브랜드 M 기술 개발을 책임지던 비어만은 2015년 현대차로 이직해 고성능 브랜드 N을 만들었다.

고성능차 후발 주자인 현대차가 택한 카드는 전 세계 3대 고성능차 엔지니어로 꼽히던 알버트 비어만(현 연구개발본부장·사장)이었다. 31년간 BMW에서 고성능 브랜드 M 기술을 책임지던 고성능차 분야의 '영웅'인 비어만을 끈질긴 구애 끝에 영입했다. "현대차와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며 아내와 함께 한국에 정착한 비어만 사장은 고성능차센터를 이끌면서 2015년 고성능차 브랜드 N을 출범시켰다. 황인진 책임연구원은 "비어만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직원들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첫 양산차는 2017년 유럽에 출시된 2.0L 터보엔진의 i30 N이다. N은 현대차 남양연구소와 '죽음의 서킷'으로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의 첫 자를 딴 이름이다. 현대차는 뉘르부르크링에 테스트센터를 두고 N차량 양산 전 24시간을 최대 속도로 연속 주행하는 혹독한 내구 테스트를 거치고 있다.

"이 가격에 이런 차를… 판매량 목표의 5배"

당시 현대차 직원들조차 "과연 우리 고성능차가 팔릴까"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판매 목표도 200대로 잡았다. 그런데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비어만이 현대차에서 개발한 첫 번째 차" "타사 대비 반값에 나온 고성능차"라는 반응이 나오며 자동차 마니아들이 몰려들었다. 목표치의 5배인 1154대가 팔렸다. 고객들은 이후 현대차의 초청 행사에서 "정 안 되면 출퇴근용으로나 쓸 생각이었는데, 이 가격에 이런 차를…" 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지난달까지 i30 N은 유럽·호주에서 1만3260대가 팔렸다. 지난해 6월 국내와 북미에서 출시한 벨로스터 N은 2190대가 팔렸다. 황인진 연구원은 "고성능차에 필요한 부품·시스템을 수입하지 않고 대부분 자체 개발했기 때문에 합리적 가격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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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만 사장이 제시한 N의 방향성은 세 가지다. '코너링 악동' '매일 탈 수 있는 스포츠카' '충분한 서킷 주행 성능'이다. 코너링이 즐겁고, 서킷 주행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탈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조재성 고성능차 개발1팀장은 "유럽 고성능차들이 일반 도로에선 승차감이 거친 데 비해, N은 부드러운 일상 주행과 역동적인 서킷 주행이 모두 가능하게 설계됐다"고 말했다.

"피가 다르다"… 카레이서 연구원들 포진

이날 방문한 현대차 고성능차센터에는 연구원 13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황인진 연구원은 "고성능차 설계·시험을 담당하는 30여 명은 카레이서 수준의 운전 실력을 갖추고 있다"며 "일정한 조건에서의 주행을 반복하며, 자기 몸을 '센서'로 활용해 차를 테스트한다"고 말했다. 연구원들의 고성능차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현대차는 2017년 '주니어 드라이버 대회'를 열고 4명을 선발해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 레이스에도 참가시켰다. 김무상 센터장과 황 연구원, 장 연구원 역시 뉘르부르크링 주행 자격증을 갖고 있다. 김 센터장은 "매일 다른 브랜드 차를 바꿔 타보며 강·약점을 연구하고, 현대차가 더 공략할 부분이 있는지 힌트를 얻는다"고 말했다.


비어만 사장 역시 새로운 트랙을 두 번만 주행하면 모두 외워버리는 실력자다. 그는 주말 새벽 아내와 강릉·남해 등 지방 각지로 떠나 '모닝 커피'를 한잔하고 동이 트면 돌아오는 것으로 연구원들 사이에 유명하다. 차가 없는 한적한 도로에서 차량 성능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김무상 센터장은 "고성능차를 개발하는 사람들은 '피가 다르다'"며 "어렵더라도 끝까지 해내겠다는 열정과 의지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열정 넘치는 인재들과 현대차 유럽연구소에 영입된 고성능차 전문가 30여 명의 20~30년 경험이 합쳐져 성과를 내는 것 같다"며 "고성능차 개발을 통해 얻은 기술·노하우를 일반 차 개발에도 적용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능차(performance car)

일반적으로 '서킷(circuit·경주 트랙)'을 무리 없이 달릴 수 있는 성능을 갖춘 차를 일컬음. 일반 승용차에 비해 가속력이 좋고, 코너링이 안정적이며, 급가속·감속에도 흔들림 적음.

화성=류정 기자(well@chosun.com)

2019.06.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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