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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거장 주지아로, 동커볼케, 이상엽이 한 자리에...현대의 헤리티지 되찾기

by교통뉴스

양산 직전까지 갔던 포니 쿠페 실차는 어디로

주지아로, 포니 쿠페 복원 프로젝트 이끌기로

포니의 아버지 주지아로와 현대차의 루크 동커볼케, 이상엽 부사장이 포니 쿠페를 복원한다. 사진=현대자동차

포니의 아버지 주지아로와 현대차의 루크 동커볼케, 이상엽 부사장이 포니 쿠페를 복원한다. 사진=현대자동차

포니를 만든 유명한 사람이 몇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당시 현대차 회장이 한 명이고, 자동차 디자인계의 거장인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또 다른 한 명이다.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현대차 포니뿐만 아니라 폭스바겐 골프를 비롯한 다양한 라인업, 알파로메오, 마세라티, 사브, 란치아, 르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수만은 모델을 디자인했다. 우리나라도 포니를 비롯해 엑셀, 스텔라, 쏘나타 1~2세대, 대우 레간자, 마티즈, 매그너스, 칼로스, 라세티 해치백 등 인연이 깊다.


늘 오는 현대자동차 발신 문자 메시지에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현대차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루크 동커볼케, 이상엽 등 명 디자이너 3명이 모여 자동차 이야기를 할 예정이니 와달라는 초대장이 있었다. 이 문자를 확인하고 단 3초 만에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자생활 시작한 후 가장 빠른 답신이었다.


거장 주지아로와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차를 좋아하는 매니아에겐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할 것이다. 행사 당일 잠까지 설쳐가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행사장에 갔다. 기자가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당시 역시 엄청난 자동차광이셨던 기자의 부친은 일본에서 발행하는 자동차잡지를 남대문에서 구해 오셔서 읽으셨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속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자동차 사진이다. 그 수많은 자동차 중에서 날렵한 모습의 문 두 개 달린 ‘스포츠카’가 눈에 들어왔다.

현대자동차가 공개한 포니 쿠페 프로토타입 사진.

현대자동차가 공개한 포니 쿠페 프로토타입 사진.

당시 한글을 막 깨우친 초등학생이 한자와 일본어, 영어를 읽을 리가 없을 터. 부친에게 차 이름을 물어봤더니 현대 포니라는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덜컹거리고 시끄럽고 LPG 연료라인에서 가스가 새면서 차 안에 프로판 가스냄새가 많아 나 편치 않은 기억으로 남았던 당시 수많은 포니 택시가 이렇게 예뻐졌다고?


화려한 잡지 속 매끈한 몸매의 쿠페는 70년대 명차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그때부터 저 차의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건축 디자이너인 부친이 8살 어린이를 앞에 세워두고 조르제토 주지아로라는 디자이너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었다.


그렇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주지아로는 거물이었다.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피아트, 란치아, 사브 등 특이하고 눈에 띄는 차들이 다 그의 손을 거쳤다는 말을 들으며 존경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왜 이런 천재가 당시 ‘거지같던’ 승차감의 포니도 손을 댔을까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당시 ‘거지같던’ 자동차를 만들던 현대자동차는 지금 글로벌 메이커가 됐다. 그리고 그 성장과정에서 주지아로와 이탈디자인은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주지아로의 직선을 바탕으로 한 잘 정리된 선과 면에서 빚어지는 볼륨감은 ‘디자인만큼은 예쁘다’라는 평을 듣게 했다.


현대차가 21세기 들어 당대의 거물 디자이너인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했을 때 업계에는 작은 파장이 일었다. 여기에 그의 파트너라는 한국인 디자이너 이상엽도 함께 오면서 현대와 제네시스의 디자인이 완성됐다. 지금 현대차와 제네시스의 디자인을 보면 선과 면을 잘 정리하는 주지아로의 스타일과 궤를 함께 함을 알 수 있다.

루크 동커볼케와 이상엽은 지금 현대차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핵심인물이다. 사진=민준식

루크 동커볼케와 이상엽은 지금 현대차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핵심인물이다. 사진=민준식

50대의 ‘젊은’ 후배인 동커볼케와 이상엽은 거장 주지아로 앞에서 겸손한 학생처럼 두 손을 모으고 그의 열정적인 말을 들었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는 주지아로는 온갖 제스처와 열정적인 표정으로 그의 뜻을 표현했다. 통역을 통해 몇 초 후 뜻을 전달받았지만 그 전에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던 사실상 볼모지에서 백지부터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지만, 당시 잠도 자지 않는 일개미들이었던 현대차 엔지니어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고 1년 만에 양산준비를 완료해 주지아로를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84세의 거장 주지아로는 40대 이상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사진=현대자동차

84세의 거장 주지아로는 40대 이상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사진=현대자동차

처음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역사가 영어로 ‘Modern Speed'라고 오역했던 ’현대 스피드‘, 현대차의 빨리빨리 정신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면서 그를 탄복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주지아로는 90년대 초반까지 현대차 디자인을 도왔다.


주지아로가 현대와 함께한지 거의 50년이 됐다. 반세기가 지났으니 어느 정도 헤리티지가 쌓였을 것이다. 포니에서 시작된 현대차의 수많은 모델은 수백만대씩 팔리며 오늘날 글로벌 자이언트의 모태가 됐다. 그런데 그 당시 디자인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포니 쿠페 컨셉트. 그 차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당시 작은 회사였던 현대차는 비싸고 돈 안 되는 쿠페형 자동차를 만들 형편이 안됐다. 한 대라도 싸게 만들어 많이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마세라티같은 스포츠 쿠페를 만든다고 팔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사장됐다고 한다.


프로젝트는 취소될 수 있지만 그 기록은 영원해야 한다. 그런데 양산 프로토타입, 즉 달릴 수도 있는 양산 직전의 차까지 만들었는데 그 차가 사라졌다. 현대차는 24일 배포한 자료를 통해 포니쿠페가 유실됐다고 확인했다. 두고두고 아쉬울 일이다. 이런 기록과 증거물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것이 참 중요한데 어떻게 유실됐는지 궁금하다.


이날 자동차 디자인계의 세 거장이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포니쿠페 얘기로 화제가 모아졌다. 이 디자인을 기반으로 영화 백 투더 퓨처의 타임머신 ‘드로리안 DMC 12’를 디자인했다고 주지아로는 확인해줬다. 그리고 84세의 거장 디자이너는 이 차를 현대자동차와 함께 복원하겠다고 현장에서 밝혔다.

이 아름다운 차를 다시 볼 수 있게됐다. 사진=현대자동차

이 아름다운 차를 다시 볼 수 있게됐다. 사진=현대자동차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기자가 이 업계에 뛰어들기 전 냉철한 분석과 깔끔한 구성의 리뷰와 컬럼을 써 존경했던 나윤석 칼럼니스트와 이 장면을 함께 지켜봤다. 옆에서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하던 그는 박수를 치고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글썽였다.


자동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자동차임이 분명한 포니의 역사를 다시 되살리겠다는 얘기에 감동을 한 것이다. 어렸을 때 ‘거지같은’ 차라고 놀렸지만 분명 당시 우리의 충실한 발이 되어주었던 포니. 신발과도 같았던 포니도 스포츠카로 나올 수 있었다는 그 역사를 다시 찾아 복원하겠다고 하니 기자도 눈 주변이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포니 쿠페의 헤리티지는 이미 현대차가 미래의 자동차로 되살린 바 있다. 포니 쿠페를 오마주한 투도어 쿠페 디자인의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 ‘N 비전 74’는 우리나라보다 해외의 반응이 더 뜨거웠다. 현대차를 아직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이 차는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당장 생산하라는 댓글도 많았다.


이 작품을 디자인한 동커볼케는 현대차의 최고 크리에이터인 CCO 부사장, 이상엽은 현대차의 양산 디자인을 이끄는 디자인 센터장이자 부사장을 맡고 있는 핵심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뜨거운 해외 반응을 못 알아챘을 리가 없을 터. 내친김에 잃어버린 오리지널 포니쿠페를 되살려보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포니쿠페를 디자인 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이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많은 차를 디자인했지만 이 차만큼은 직접 시작단계부터 끝까지 참여했다고 하고, 그의 기억력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70년대 엔지니어링의 올드카를 부품 하나 없이 어떻게 복원할지가 관심이 간다. 이날 자리는 디자인 토크쇼였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포니쿠페가 기존에 도로를 달리던 4도어 포니의 차체를 기반으로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현재 남아있는 포니의 차체를 가지고 겉모습을 새로 만들어 씌우는 복원방식이 유력해 보인다.

현대차의 미래 50년의 시작이라는 아이오닉 5와 세 디자인 거장. 사진=현대자동차

현대차의 미래 50년의 시작이라는 아이오닉 5와 세 디자인 거장. 사진=현대자동차

동커볼케 CCO는 현대차의 첫 50년을 포니가 시작했다면 앞으로의 50년은 미래 전기차인 아이오닉 5가 시작하는 것이라며 아이오닉 5가 왜 포니 디자인의 오마주였는지 설명했다. 현대 브랜드의 아이콘인 포니, 그 중 더 상징적인 포니쿠페, 이 차를 되살리는 작업을 포니쿠페의 아버지인 주지아로와 함께 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세 거장의 이야기보따리는 두 시간 가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그 시간이 10초도 안 걸린 느낌이었다. 너무 짧았다. 이런 차 이야기는 커피 가져다놓고 밤 새워가며 해야 제 맛이다.

이런 토크쇼는 밤을 새워 들어도 좋다. 사진=민준식

이런 토크쇼는 밤을 새워 들어도 좋다. 사진=민준식

현대차는 포니쿠페를 복원해 내년 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멋 옛날 일본 자동차 잡지에서 볼 수 있었던 차를 조금만 있으면 실제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초대 안내장이 오면 1초 안에 답장을 보낼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과 로비에서 잠깐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훌륭한 토크쇼에 감사드린다고 했더니 히딩크 감독도 구사하는 듣기 편한 플랜더스(벨기에·네덜란드어) 억양의 영어로 “My pleasure!"라고 대답했다. 기자와 눈을 마주친 그의 표정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교통뉴스 민준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