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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채지형의 여행살롱 14화

마음을 누이고 싶을 때 찾는
안동 고택에서의 하룻밤

by채지형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될 때 말입니다. 빛나는 오월을 보내며,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들고났습니다. 

 

안동에 다녀왔습니다. 뭔가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어요. 안동에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줄 뭔가가 있을 것 같았거든요. 여행은 꼭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러 가는 길만이 아니니까요. 일상이 힘들고 삶을 돌아보고 싶을 때,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야 할 때도 여행은 훌륭한 처방전이 되지요.

 

이럴 때 안동은 참 좋은 곳입니다. 안동을 생각하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죠.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 병산서원과 탈춤, 이매탈과 각시탈, 간고등어와 헛제삿밥. 그래도 안동을 가장 인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전통을 품고 사는 모습들일 것입니다.

전통이 숨 쉬는 안동

마음을 누이고 싶을 때 찾는 안동 고

전통이 살아있는 안동의 고택들

지역 전체가 박물관이다 보니 안동 어디에 가더라도 선조들의 숨소리가 느껴지죠. 의(義)와 예(禮)를 중요시하며 대쪽 같은 절개로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의 정신들. 곧게 살아간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가짐도 생각도 조금씩 달라진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안동이었고, 고택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고택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속에 만들어 놓은 고택 속에 있다 보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더군요.

 

마치 선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맑디맑은 공기에 지저귀는 새소리,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의 별들,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방까지 안동이 고택은 '머무는 것' 자체로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대쪽처럼 곧은 치암고택

마음을 누이고 싶을 때 찾는 안동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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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치암고택

안동에서 묵은 곳은 치암고택(恥巖古宅)입니다. 안동시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안동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는데요. 정갈한 사랑채하며, 우뚝한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는 누마루, 담장 아래의 꽃들에서 주인의 정성이 느껴지더군요.

 

치암고택의 '치암'은 이 고택의 주인이셨던 이만현 선생의 호로, '부끄러움의 바위'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만현 선생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에 격분하여 세상을 떠난 안동의 선비인데요, 선비가 나라를 이 지경을 만들었으니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겠냐 하시며 아호를 '치암'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군요.

 

방마다 교훈이 될 만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올곧은 그분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더군요. 또 고택 오른편에는 군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잠룡담도 있었어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뜻이 참 좋죠?

 

치암고택은 안동시 시도민속자료 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고택 안에 들어가니 넓은 잔디밭이 눈에 먼저 들어오더군요. 잔디를 가로질러 가면 안채가 나오고요.

 

사랑채의 왼쪽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고, 오른쪽은 옆면이 여덟팔자인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었어요. 뒤로 돌아가 보니 옹기종기 장독대들이 이어져 있어 친구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더군요.

 

고택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고목의 결을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택의 아름다운 기와의 곡선과 수많은 세월을 견뎌왔을 나무 마루를 밟는 느낌도 그렇고요. 아무런 장식도 없고 못질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나 탄탄해 보일 수 없더라고요. 고택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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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치암주택

고택에서 누리는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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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고택의 시간들

밤에는 가야금을 배우러 온 학생들 덕분에 또 다른 낭만이 흘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갔었는데, 저녁에 안동소주가 한잔 들어가서 그런지, 별빛에 취해서 그런지 친구들이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숨겨놓았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써내더군요. 설마, 이런 생각을 했다니! 깜짝 놀랐지만, 그동안 그 친구들에게 신경을 그다지 쓰지 못한 것에 못내 미안해지더군요. 조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남은 안주까지 싹싹 비웠습니다.

 

마치 치유의 시간처럼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처받아온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고택은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문을 열면 한 폭의 풍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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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한 향산고택

치암고택 바로 앞에는 치암고택만큼 고개가 숙여지는 고택이 있는데요. 바로 3대에 이어진 독립운동 가문의 고택인 향산고택(響山古宅)입니다. 향산고택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에 단신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옛집이에요.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깔끔했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왼쪽 방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방은 아담했지만 결코 느낌은 작지 않더라고요. 안동에 대한 수많은 책들,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고서들이 작은 방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문을 열면 한 폭의 풍경화가 나타났어요. 담장과 나무,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가 등장하는 풍경화였습니다. 마침 바람이 불어 수국에서는 꽃이 수줍게 떨어지더군요. 바람에 날리는 꽃잎에 답답하고 힘든 마음들도 하나씩 떨어트려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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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즐거운 한 때

마당의 강아지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너무 귀엽죠? 이 강아지 줄이 매달려 있기는 한데, 마당 끝에서 끝으로 선을 만들어놓아서 그 안에서만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게 되어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차도 한잔 마셨습니다. 참 값진 하루였습니다. 언젠가 에너지가 다 빠져나갔다는 생각이 들면, 얼른 가방 챙겨서 안동에 다시 내려가야겠어요. 강아지도 보고 꽃도 보고 차도 마시고 말이지요.

마음을 누이고 싶을 때 찾는 안동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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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암고택에서의 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