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터질 듯하지만 홍게 라면은 먹고 싶어

[푸드]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고깃집 라면

서울 성내동 '다람'의 홍게된장라면. 돼지고기만큼이나 김치와 라면으로도 이름난 집이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고기를 얼마나 사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대학 1학년 강촌으로 떠난 첫 MT였다. 어머니 품을 막 벗어난 신입생들은 웃자란 중병아리처럼 행색도 표정도 어색했다. 먹을 고기 사는 것도 일이었다. 시켜주는 대로 먹었지 스스로 고기양을 가늠해본 것은 대부분 처음이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날 밤 돼지고기는 한참 남았다. 자취생들은 도둑고양이처럼 남은 고기에 눈독을 들였다. 배가 부른 이들은 방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그들을 불러모은 건 라면 냄새였다. 큼지막한 양은 냄비에 물을 가득 부었다. 남은 마늘, 고추도 뭉텅뭉텅 물속에 던졌다. 익숙한 냄새가 방 안에 흩어졌다. 곧이어 떡밥에 물고기가 달려들 듯 하나둘 냄비 앞으로 모였다. 한국인의 배 속에는 언제나 라면을 위한 공간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남이 끓인 라면’을 두고 ‘한 젓가락만’을 부르짖었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이 아니라 선육후면(先肉後麵)이었다.


집에서 편히 끓여 먹으라는 이 인스턴트 음식을 굳이 밖에서도 사 먹는 한국인의 라면 편애는 깊고도 넓다. 뒷면에 쓰인 조리 예를 거부하며 당당히 메뉴 한 자락에 이름을 올린 라면을 다르게 즐기는 방법은 고기를 먹고 난 뒤 먹는 것이다. 그 방법을 본격적으로 펼친 곳이 몇 있다.


서울 강남 로데오거리 ‘우텐더’는 라면 한 가닥 한 가닥에 고급스러움을 담았다. 녹청색으로 벽을 칠한 실내에 자리를 잡으면 ‘1’ 뒤에 플러스 두 개가 더 붙는 한우가 화려한 가격표를 달고 나타났다. ‘텐더’라는 이름처럼(영어로 안심은 ‘tenderloin’이다) 소고기 안심이 메뉴 제일 높은 곳에 자리했다. 하얀 마블링이 거미줄처럼 박힌 안심을 숯불에 올렸다. 살짝 핏기가 남아있도록 구운 종업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원물 자체가 확연히 달랐다.


대망의 마지막은 ‘해장한우라면’이었다. 미역과 파로 육수의 단맛을 잡고 소고기를 넣어 맛의 무게감을 한껏 살린 이 라면은 ‘해장’이라는 접두사에 걸맞게 속 깊은 곳까지 쓸고 내려가는 듯한 얼큰한 맛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라면 면발은 살짝 꼬들꼬들해야 한다는 ‘국룰’(국민 룰·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해진 규칙)을 정석대로 지켰다.


신사동으로 가면 돼지 목살로 유명한 ‘꿉당’이 있다. 돼지 목살로 일가를 이룬 ‘땅코참숯불구이’에서 수련한 주인장은 원조집의 노하우에 21세기 세련된 도시 감성을 한데 모아놨다. 지그재그로 두껍게 살을 주조한 독특한 무쇠 불판 위에 연분홍색의 신선한 목살이 자리하니 이윽고 칼춤 같은 가위질이 이어졌다. 고기를 집게로 들고 가위로 썰고 뒤집는 이 정신없는 퍼포먼스는 모두 강력한 화력 덕분이다. 속을 바싹 익히는 대신 핏기가 가실 정도로만 구워낸 덕택에 질긴 느낌은 찾기 힘들었다.


고기를 한껏 먹고 사이드 메뉴를 보니 익숙한 된장찌개부터 비빔면을 거쳐 짜파게티를 아울렀다. 꿉당의 짜파게티는 마치 간짜장처럼 소스가 면에 착 달라붙었고 물기가 적었다. 여기에 트러플 오일을 뿌리고 오이채와 달걀프라이를 올렸는데 그 꾸밈새와 맛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유성 스프가 아닌 트러플 오일을 낙낙히 뿌려 이국적인 정취를, 달걀프라이 하나에 부산 출신 사나이의 심금을 울렸다.


다시 길을 떠나 강동으로 가면 성내동에 ‘다람’이 있다. 숯불구이 전문점이라는 오래된 수식어처럼 삼겹살, 목살, 차돌박이까지 다루는 이 집은 고기도 고기지만 상에 깔리는 김치로 명치에 깊숙한 한 방을 날렸다. 새하얀 머리를 한 주인장은 테이블 하나하나를 돌며 김치를 올리고 이웃집 할머니처럼 자상한 설명을 곁들였다.


경상도 출신인 주인장의 역사가 담긴 김치는 고흐의 그림처럼 고춧가루로 붉은 선을 굵게 긋고 간간한 젓갈이 그 배경을 짙게 칠했다. 흔히 파는 보쌈김치 같은 화려한 양념과 소는 없었다. 부록과 잔가지 없이 굵은 펀치만 날리는 인파이터 같은 김치였다. 이 김치에 삼겹살, 항정살을 구우면 김치가 반찬인지 고기가 반찬인지 헷갈렸다.


고기 한 판을 굽고 나면 시킬 수 있는 홍게 라면이 그 뒤를 이었다. 된장 육수에 홍게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는 이 라면은 라면이지만 라면 같지 않은 맛을 냈다. 된장 육수에는 한 번에 작렬하는 감칠맛이 희미했고 대신 장의 푸근한 맛이 유장하게 흘러갔다. 홍게는 그 속에 몸을 풀어 짭짜름한 단맛을 냈다. 그 안에서 라면 면발이 펄떡이듯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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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한 모금에 라면 한 젓가락을 들었다. 밥 대신 라면을 찾으면 혀를 끌끌대면서 달걀 하나 풀어 라면을 끓여주던 어머니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입에 들어간 쭉 찢은 김치 한 조각. 돌고 돌아 결국 찾게 다시 찾게 되는, 익숙하지만 언제나 그리운 맛이 그곳에 있었다.


# 우텐더: 안심 5만9000원(150g), 해장한우라면 1만2000원. 010-2055-3889


# 꿉당: 목살 1만7000원(180g), 트러플 짜파게티 5000원. (02)545-9600


# 다람: 삼겹살 1만3000원(150g), 목살 1만3000원(150g), 홍게된장라면 1만3000원(중). (02)475-6047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1.03.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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