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둠초밥 한 접시가 이 가격? 아직은 살 만한 세상입니다

[푸드]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 정동현의 pick] 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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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동 ‘제주도초밥’의 ‘등푸른 생선’(앞)과 ‘모둠초밥’./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은 초밥이라 하지 않고 ‘스시(壽司)’라고 한다. 초밥 먹으러 간다고 하는 대신 ‘오마카세(お任せ)집에 간다’고 한다. 주인장이 알아서 쥐어주는(오마카세) 스시(초밥)를 코스 형식으로 먹는 것이다. 가격은 인당 최소 10만원, 최고급의 경우 50만원에 달하기도 한다. 아니면 마트에서 할인 딱지 붙은 초밥을 먹는다. 초밥의 양극화다. 초밥은 본래 일본 에도(도쿄의 옛 이름) 거리에서 바로바로 쥐어주던 패스트푸드였다. 밥알 개수를 헤아리며 선의 경지에 오른 고승처럼 티 없이 맑은 맛의 초밥을 먹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가볍게 “오늘 초밥이나 먹을까?”라고 말하며 문을 밀고 들어가 수더분한 주인장이 쥐어준 밥 뭉치 하나로 한 끼를 때우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초밥집을 찾으려면 점심 한 시간도 소중한 직장인이 몰린 곳에 가야 한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좁은 이면도로 상가에 자리 잡은 ‘스시현’의 점심 풍경이 그랬다. 손님들은 오전 11시 30분이 넘으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주방만 바라봤다.


메뉴판에 써놓은 가격이 높지 않았다. 점심에 파는 1만4000원짜리 ‘모둠초밥정식’에는 초밥 10개에 우동까지 딸려 나왔다. 인플레이션이니 물가니 하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고마운 가격과 구성이었다. 그럼에도 생선의 선도는 떨어지는 구석이 없었고 한 그릇 우동조차 존재감이 있었다. 단맛이 느껴지는 광어, 말갛게 투명한 갑오징어, 달콤한 유부초밥이 하나하나 입에서 사라지면 점심 시간의 끝도 저만치 다가왔다.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면 ‘더센다이’가 있다. 마포역 뒤편, 성지빌딩의 미로 같은 지하 상가로 발을 디디면 ‘이곳은 뜨내기가 오는 곳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온다. 낮은 천장 아래 빽빽하게 들어선 식당촌에서도 더센다이는 어깨가 당당한 대장 격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좁은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사이로 또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 안쪽에는 높은 카운터 좌석과 주방이 자리했다. 잘 다린 조리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요리사는 전장의 무사처럼 긴 칼로 생선을 바쁘게 잘랐다. 직장인, 모임을 하는 노인 등 매일 점심마다 오는 듯한 단골들이 단번에 만석을 만들었다.


앉자마자 회 무침이 나왔고 곧 초밥, 생선조림, 꽁치구이, 우동이 뒤를 이었다. 종업원이 연이어 음식을 놓을 때마다 숨이 찰 정도였다. 구성을 보면 참치, 연어, 광어, 새우 등 있어야 할 녀석들은 다 있었다. 밥은 적당히 뭉쳐졌지만 입속에서는 잘도 풀어졌다. 후끈한 우동 국물을 마시다 보면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는 낙관론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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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동 ‘제주도초밥’의 모둠초밥.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서쪽으로 좀 더 가면 구로동에 ‘제주도초밥’이 있다. 구로중학교 후문, 가로수가 높게 뻗친 도로 한편에 오래된 나무처럼 자리한 이 집은 노부부가 주방과 홀을 나눠 맡고 있었다. 좌석이라고 해 봤자 홀 양편에 붙은 높다란 카운터가 전부. 가격을 보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메뉴도 모둠초밥뿐만 아니라 등푸른 생선, 전갱이, 참치 뱃살같이 낮은 가격대에서 보기 힘든 선택지가 있었다.


안경을 쓴 주인장은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머리가 단정한 여주인은 나긋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초밥을 시키면 곧바로 주인장이 초밥을 쥐기 시작했다. 초밥의 산미는 튀지 않고 동글동글했으며 온도 또한 지나치게 낮거나 높지 않았다. 주인장의 체온에서 비롯된 온기가 초밥에 담겨 입안에서 풀어지는 느낌이 온순했다. 모둠초밥 한 접시에는 새우, 유부, 달걀, 참치까지 고루 담겨 있었다.


초밥은 유행하듯 생선이 밥을 덮다 못해 길게 늘어진 형태는 아니었다. 대신 밥을 정확히 덮을 만한 크기로, 입에 넣으면 밥과 생선이 하나가 되어 고루 씹혔다. 따로 시킨 ‘등푸른 생선’에는 전갱이 초밥과 고등어 초밥이 올랐다. 촉촉이 기름이 올라온 생선은 오래되어 산폐된 듯한 느낌 없이 밝고 화사했다.


손님에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싹싹한 주인장 내외, 편안한 모습의 손님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초밥 한 접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꽉 찬 만족감이 찾아왔다. 그 만족감을, 그 드문 뿌듯함을 다른 말로 한다면 행복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 스시현: 모둠초밥정식(점심) 1만4000원.


# 더센다이: 런치초밥 1만2000원.


# 제주도초밥: 모둠초밥 1만원, 등푸른 생선 5000원(3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2.09.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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