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없는 수첩인데… 내 아들·딸이 앉아서 공부하네

[아무튼, 주말]


100만원 창업 모트모트 김권봉 대표


인스타에 ‘공스타그램(공부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계정)’을 검색하면 꼭 딸려 나오는 이름이 있다. 스터디 플래너를 만드는 스타트업 ‘모트모트’. 기성세대에겐 생소하지만 10대들 사이에선 이미 ‘필구템’이다. 회사 이름을 태그한 게시글만 54만개, 계정 팔로어도 14만명이다. 자발적으로 플래너를 홍보해주는 지원군을 등에 업고 창업 5년 차인 올 상반기에만 200만권 넘게 팔렸다.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 국내 다이어리 시장 규모가 매년 10%씩 줄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온라인 문화에 익숙한 10대들이 왜 아날로그 종이 플래너에 열광하고 있을까. 김권봉(32) 모트모트 대표는 "디지털 세대라 해서 스마트폰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얘기한다. 그간 디지털 문화에 맞는 아날로그 제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대가 소망하는 아날로그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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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스터디 플래너로 대박을 쳤다.


"공스타그램 열풍 덕이다. 원래는 노량진 공시생들을 타깃으로 플래너를 만들었다. 그런데 10대 학생들이 우리 플래너를 찍어 인스타에 '공부 인증샷'을 올리더라. 처음엔 이해를 못 했다. 나중에야 이 친구들이 매일 공부한 분량을 SNS에 올리며 보람을 느끼는구나 깨달았다. 그때부터 공스타그램에 맞는 형태의 플래너를 고민했다."


―공스타그램에 알맞은 플래너라니.


"대표적인 게 종이 두께다. 우리가 시장에 뛰어들었을 당시 대부분 제조업체는 ㎡당 80g 무게의 종이로 플래너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면 가볍지만, 종이가 얇아 뒷면이 비친다. 사진이 중요한 10대들에겐 적절치 않다. 우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120g 종이를 썼다. 조금 무겁지만 대신 뒷면이 덜 비친다. 디자인과 마케팅도 모두 공스타그램을 염두에 뒀다."


―플래너를 사면서 제조업체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여태까지는 문방구에서 눈으로 표지를 비교하며 플래너를 고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회사 이름을 기억하고 다시 찾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문구 사업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문방구에 유통할 수 있는지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직접 온라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팔았다. 이게 회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 플래너를 써본 학생들이 우리 이름을 기억하고 다시 주문하기 시작한 거다. 지금은 홈페이지 회원 수만 22만명이 넘는다. 문구 사업에 무지했던 게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다."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다. 손으로 써야 하는 플래너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나.


"처음부터 플래너를 만들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플래너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나는 학생 때부터 시간 강박이 있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도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되면 불안해지는 타입이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달력에 적어놨다. 그런 습관이 공부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손으로 직접 쓰는 플래너 수요는 언제나 있을 거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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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 외엔 어떤 사업을 하나.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은 학원, 독서실이 문을 닫았다. '갑자기 혼자 공부하려니 집중이 안 된다'는 학생이 많았다. 마라톤에 선수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페이스 메이커가 있는 것처럼, 학생들에게도 공부 페이스를 맞춰줄 사람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유튜브로 명문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시계와 공부하는 모습만 나오는 동영상을 수천 명이 보더라. 요즘은 페이스 메이커를 자원한 중·고등학생들의 영상도 송출한다. 요즘 10대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들며 공부한다. 앞으로 디지털 사업도 계속 벌일 생각이다."


사립학교인 경복초와 건대부중을 나왔다. 선화예고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울대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고등학교 친구, 대학 후배와 셋이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파리 디자인 위크,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등에 가구를 출품하면서 예술성은 인정받았지만 국내에서는 한 대도 못 팔았다. '비즈니스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다른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밤에는 졸업생 신분으로 서울대 코딩 동아리에 들어가 재학생들에게 코딩을 배웠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대학 후배와 2016년 모트모트를 창업했다. 직접 디자인한 플래너를 500권, 1000권씩 충무로 인쇄 공장에 맡겼다. 홍보는 SNS로 직접 했다. 구글 설문지로 온라인 주문을 받고 자취방에서 물건을 포장해 택배로 배송했다. 소문을 타고 서서히 매출이 늘었다. 사업 시작 6개월 만에 내놓은 양장 플래너 2000권이 며칠 만에 완판됐다. '이거 되겠다' 싶었다. 선릉의 공유 사무실에 작은 책상 두 개를 얻었다. 지금은 연 매출 100억원, 직원 12명을 거느린 회사 대표가 됐다.


―선화예고부터 서울대까지,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좋은 학교를 나온 건 맞지만 금수저는 아니다. 부모님이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창원에서 공구를 연마하는 1인 작업실을 하신다. 초등학교 때 엄마 손을 잡고 누나, 동생까지 삼 남매가 '서울 유학'을 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까지 넷이 반지하 15평 빌라에 살았다. 부자 친구가 많아 상대적 결핍도 많이 느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너네 집 가서 놀자'고 하면, 친구들 손을 뿌리치고 뛰어서 집에 갔다. 반지하에 산다는 걸 알리기 싫었다. 고등학교도 학비 지원을 받으면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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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창업이란 길을 택했나.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갖고 싶었다. 나는 디자이너다. 내 손으로 디자인한 물건을 직접 팔 때 가장 행복하다. 내 브랜드를 가지려면 창업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가 밤 아홉 시가 넘으면 텔레비전을 못 보게 했는데, 유일하게 시청을 허락했던 프로가 MBC '성공시대'였다. 그때 대기업 창업주들의 이야기를 접한 게 나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나 싶기도 하다(웃음)."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


"100만원으로 시작했다. 학교 후배와 둘이 제품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 배송까지 모두 나눠서 했다. 내 자취방에서 디자인과 제품 사진 촬영을 하고, 후배 방에서는 제품 포장을 했다. 습한 장마철에는 눅눅해진 택배 상자 냄새를 맡으면서 둘이 새벽까지 포장 작업을 했다. 돈이 없어 물건을 소량으로 찍다 보니 단가가 높았다. 원가 980원짜리 플래너를 1000원에 팔았다. 유의미한 수익이 나기 시작한 건 온라인몰을 만들고 나서부터다."


―예술과 비즈니스의 경계는 어디쯤 있을까. 가구의 실패와 플래너의 성공에서 얻은 교훈은.


"비즈니스 자체가 하나의 종합 예술이다. 가구를 만들 땐 디자인만 할 줄 알았지, 비즈니스적 관점은 전혀 없었다. 당시 만든 작은 책상 하나의 원가가 200만원이었다. 보기엔 예뻤지만, 누가 책상을 그 돈 주고 사겠나. 내 작품을 시장에 팔기 위해선 시장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스타트업 진출을 꿈꾸는 예술계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술 전공은 실행력이 좋다. ‘어떤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손재주가 있다. 그러나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이걸 정말 필요로 하는지, 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격은 얼마로 책정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계 밖의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라. 그래야 남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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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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