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꼴찌였던 ‘주걱턱 소녀’… “저 닮은 못난이빵으로 100억 벌었죠” [아무튼, 주말]

[김성윤 기자의 공복]

강원 춘천서 ‘감자빵’ 개발해 대성공

서른한 살 이미소 ‘농업회사 밭’ 대표


‘감자빵’은 지난해 디저트 업계를 강타한 히트 상품이다. 오븐에 구워 으깬 감자를 감자전분·쌀가루 반죽으로 감싸고 흑임자·콩가루를 묻혀 흙에서 갓 캐낸 감자와 똑 닮게 만든 감자빵은 지난해 640만개가 넘게 팔렸고,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감자빵을 사려고 강원도 춘천 ‘감자밭’ 카페를 찾은 손님은 60만명에 달했다.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한 카페 측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맛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하자’며 1인당 구매 개수를 3개로 제한했다. 그러자 손님이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재구매하러 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감자빵 개발자이자 감자밭 카페를 운영하는 이미소(31) ‘농업회사법인 밭 주식회사’ 대표는 제과제빵을 전문적으로 배운 파티시에가 아니다. 금수저 출신도 아니다. 세금 납부 고지서가 날아오자 어머니가 “우리 돈 없는데 어떡해”라며 울었을 정도로 어려운 집에서 자랐다. 라면도 씹어 삼키지 못해 가위로 잘라 먹을 만큼 심한 주걱턱(부정교합)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턱 기형아 이미소’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 어려서부터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의심받았고, 중학교 때는 전교 꼴찌를 도맡았다.


이 대표가 초대박 감자빵을 개발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였다. 스스로를 “머리는 좋지 않지만 악착 같은 구석이 있는 편”이라는 그는, 서울의 한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졸업 후 강남의 한 IT 업체에서 일한 지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고향 춘천에서 감자 농사를 짓던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미소야, 회사 계속 다닐 생각이니? 올해 수확한 감자를 전부 묻어야 할 것 같아. 네가 와서 한번 팔아보면 어떨까?”


이 대표는 고민 끝에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를 돕기로 결심했다. 5년간 감자와 악전고투를 벌이던 그는 ‘지속 가능한 감자 농사를 지으려면 감자로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개발한 매개체가 바로 감자빵이다.


흙수저에 왕따였던 여성이 서른 살에 100억 매출 회사를 일궈낸 과정을 담은 책 ‘오늘도 매진되었습니다’(필름)를 펴낸 이미소 대표를 만나러 춘천 외곽 신북읍에 있는 감자밭 카페를 찾았다.


◇감자 30t 처분하러 귀향하다


-춘천에 내려와 저온 창고를 가득 채운 감자 30t을 보고 아버지에게 “심장이 꽉 막힌 기분이야”라고 말했다고.


“정식 저장고도 아니었다. 하우스에 에어컨 켜 놓고 감자를 쌓아놓으셨더라. 1억5000만원어치는 됐다. 30t이면 요즘은 열흘이면 감자빵 재료로 소진하는데.”


-아버지가 본래 금은방을 운영했다고 들었다.


“금은방 한다면 부잣집일 거라 생각하지만, 어려운 형편이었다. 돌반지 몇 개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였다. 가게 10평을 반으로 나눠 뒷방 5평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금은방이 안될 땐 가게 앞에서 어묵과 순대를 팔았다. 아버지가 포장마차를 시작으로 닭갈비집, 두부집 등 안 해본 음식 장사가 없으시다.”


-아버지는 그런 형편에 어떻게 어린이재단을 후원하고 엔젤투자를 했나.


“아버지가 완전 이상주의자다. 세상을 더 낫게 하려면 우리가 더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실천하셨다. 마지막 투자처가 감자 종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회사였다. 아버지는 식량 주권, 감자의 다양성 보존과 존중을 위해 품종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더니 투자하던 감자 회사가 망한 2012년, 모든 감자 종자를 사비로 사들였다. 그 후로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고생이 이어졌다. 감자라면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웃음).”


-그럼에도 아버지를 도우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춘천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이 취업난에 너를 믿고 뽑아준 회사에 들어갔으니, 힘들더라도 적어도 3년은 꾹 참고 다니면서 배운 만큼 도움을 드리고 나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가 정말 힘드신 게 분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세종대 패션디자인학과에 수석 입학했지만 패션이 아닌 IT 업계로 취업했다.


“입학하고 2년이 되지 않아 패션디자인은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패션디자인을 하기엔 감각이 없었다. 대신 기획을 잘하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고, IT 기업 신사업 기획부서에 입사했다.”


-대학 갓 졸업하고 서울 강남의 IT 기업에 취직해 고작 6개월 차에 접어든 스물여섯 살 새내기 직장인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내 서울 생활을 들여다봤다. 서울은 혼자 살기엔 생활비가 만만찮게 들어간다. 비싼 월세에 비해 공간이 여유롭거나 윤택한 것도 아니다. 식비도 마찬가지. 교통 체증으로 늘 시간이 모자랐다. 이게 인간다운 삶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와 2년쯤 뒤면 결혼할 것 같았다. 시집가면 엄마, 아빠를 자주 못 볼 테니 그전에 도와드리자는 생각도 있었다.”


-아버지가 재배한 감자는 왜 팔리지 않았나.


“아버지는 ‘로즈홍감자’ ‘청강감자’ ‘보라감자’ ‘고구마감자’ 등 국내에서 개발된 토종 품종 감자 농사를 지으셨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보급된 감자 종자는 ‘수미(秀美)감자’다. 197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개발한 품종이다. 오래전 국내로 유입됐고, 국내 조건에 맞게 개량돼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아버지가 보존하고자 하는 품종의 감자는 맛도 의미도 좋았지만, 국내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수미감자의 아성에 밀렸다. 어떤 농부도 시장에서 제값을 받기 어려운 희귀 품종의 감자로는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망한 회사의 감자 종자를 모두 사서 직접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세계 4대 식량원 중 하나인 감자의 고향은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볼리비아에 걸친 안데스산맥 중부 고원지대다. 페루 수도 리마에 있는 국제감자센터(CIP)에 따르면, 전 세계 감자 품종은 4000가지가 넘는다. 이 중 우리나라 국립종자원에 등록된 감자는 100종 미만. 품종의 다양성도 떨어지지만, 국산 감자 품종 자급률은 약 25%로 더욱 낮다. 수미감자처럼 외국에서 들여와 개량한 해외 품종이 대부분이란 뜻이다.


◇본질에 집중하자 답이 보였다


이 대표는 초보 농부가 됐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다섯시 반이면 눈 비비고 일어나 동네 할머니들과 승합차를 타고 밭으로 ‘출근’해 감자를 심었다. 너무 힘들 때는 막걸리를 마시며 일했다. 생식 가능한 감자를 팔기 위해 생즙으로 내려 파우치 형태로 가공해 정기 배송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가정간편식(HMR)을 기획하기도 했다. 감자밭과 밭에 이어진 건물도 구입했다. 이 건물이 현재 감자밭 카페다.


5년간 열심히 감자 농사를 지었지만, 이 대표와 아버지가 재배하는 생소한 감자들은 소비자가 원하지 않았다. 이 대표는 “농사를 지어 가락시장에 내놓는 것이 21세기 농부의 역할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했다.


-21세기 농부의 역할은 뭔가.


“고객과 소통하고, 플랫폼을 구축하고, 농산물을 가공해 소비자를 만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농업을 구현하는 길이었다. 그러려면 감자로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야 했다.”


-그게 감자빵이었나?


“처음부터 감자빵을 떠올리진 못했다. 모든 조리법을 총동원해 2년 넘는 기간에 200종이 넘는 감자 음식을 만들었다. 춘천 하면 닭갈비가 가장 유명하니까, 감자와 닭갈비를 활용한 파이를 만들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감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이 없었다. 처음 고안한 빵은 ‘고감마빵’이었다. ‘고구마 감자 마늘 빵’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맛이 없진 않는데, 찾아 먹고 싶진 않은 맛이었다. 이후로 ‘삽질 삼매경’이 이어졌다.”


-감자와 똑같이 생긴 감자빵 아이디어를 아버지가 제안했다던데.


“아버지가 ‘감자와 똑 닮은 감자빵을 만들어보라’고 하셨다. 감자의 본질에 집중하고 함량을 최대한 올려서 감자 모양의 빵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빵 전문가 홍상기 요리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감자빵을 완성했다. 홍감자, 청강, 흰감자 같은 다양한 품종의 감자를 적절히 배합했다. 감자를 삶거나 찌면 훨씬 공정이 편리하고 비용이 적게 들었다. 하지만 섭씨 200도 이상 오븐에 구웠을 때 수분이 날아가 감자 본연의 진한 맛과 당도, 풍미가 살아났다.


-처음부터 잘 팔린 건 아니라고.


“하루에 50개가 채 팔리지 않았지만 점차 소문이 났다. 2020년 1월 처음 선보이고 4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팔리더니, 곧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동안 밥 한 끼 겨우 먹고 감자빵을 만들었다. 새벽 3시까지 감자를 굽고 손질하느라 늘 잠이 부족했다. 두어 시간 눈만 잠깐 붙이고 출근하면, 하루가 끝나지 않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자밭 카페 진열대에서 감자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이 주먹만 한 크기에 울퉁불퉁 찌그러진 모양과 겉에 묻은 시커먼 ‘흙’이 영락없이 밭에서 갓 캐낸 감자였다. 비닐 포장을 벗기자 감자 표면에 묻은 ‘흙’에서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다. 흙이 아니라 검은깨와 콩가루를 볶은 가루였다. 감자 전분과 쌀가루를 섞어 만든 껍질은 빵보다는 떡처럼 쫀득했다. 오븐에 구워 으깬 감자로 만든 소에서는 구수한 감칠맛과 함께 자연스러운 단맛이 났다. 이 대표는 “감자 자체의 단맛”이라며 “로즈홍은 단맛이 특히 강한 감자 품종”이라고 했다.


◇왕따였던 과거는 나의 원동력


어린 시절 이미소 대표를 알던 이들은 그가 매출 100억원짜리 회사를 일궈냈다는 사실에 놀란다. 주걱턱으로 불리는 안면 비대칭으로 악몽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대표는 책에서 “‘턱 기형아’ ‘마귀할멈’ ‘외톨이’ ‘왕따’ 은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 동안 내 청소년기를 따라다닌 수식어들이다. 춘천의 작은 동네에서 유명한 ‘턱 기형아 이미소’였다”고 고백했다. ADHD를 의심받을 만큼 집중력이 없어서 선생님들에게 늘 지적받았고, 학교 성적도 나빴다.


-주걱턱인지 지금은 전혀 모르겠다.


“스무 살이 되면서 양악 수술을 받았다. 어렸을 때는 치료받을 생각을 못했고, 열여섯 살 때 치료받으려니 이미 늦어서 성장이 끝난 다음 치료받아야만 했다.”


-얼마나 심각했나.


“아래턱이 21㎜ 튀어나왔었다. 엄청 심각한 거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갔을 정도니. 라면도 못 씹어서 가위로 잘라 먹어야 했다. 소화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데 고통을 겪었다. 이번에 출판한 책 인세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안면 비대칭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전액 어린이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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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전 얼굴 사진을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 올렸던데, 감추고 싶은 과거가 아닐까.


“전혀. 더 많이 알려져서 나를 보고 누군가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소풍 가도 짝이 없어 놀이기구를 못 타고, 학교에는 급식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어서 도시락을 싸 갔다고 책에 썼더라.


“외톨이 시절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나를 성장하게 했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했다. 누구보다 명확한 꿈을 가지고 살게 된 것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며 살게 된 것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다.”


-공부를 못했고 ADHD로 의심받은 것도 거리낌 없이 밝혔던데.


“내 아이큐가 낮다. 103이던가? 하여간 진심 낮다(웃음). 그런데 낮은 아이큐가 나에게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도가 워낙 낮기 때문에 한 번 이해하면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


-어떻게 이토록 매사 긍정적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주셨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고 ‘네가 꼴찌를 하니, 누군가는 1등을 하겠지’라며 껄껄 웃으셨다. 그러곤 ‘너는 네 인생의 하나뿐인 주인공이니,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덧붙이셨다.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무조건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어서 결국은 외롭지 않았다.”


◇조직에서 나의 역할은 ‘전두엽’


이미소의 감자밭 카페에서 감자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직원들 대부분이 ‘알바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 대표는 “우리 회사(농업회사법인 밭) 직원이 100명 좀 넘는다”고 했다. “대부분 지난해 입사했다.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다.”


-평균연령이 30대 초반? 이 대표를 포함 전 직원이 20대로 보인다.


“하하, 그런가? 강원도 양구에 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감자 껍질 까는 ‘여사님’들이 열 분 정도 계신다. 하루에 많이 깔 때는 감자 3t어치를 깐다. 껍질이 100㎏ 넘게 나온다. 제일 나이 많은 여사님이 84세시다. 이분들까지 합쳐 평균을 내면 30대 초반이 된다. 얼마 전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여사님들 은퇴하시는 나이가 우리 회사 정년’이라고 직원들에게 말했다(웃음).”


-구인난이 어느 업종이나 심각하다. 지방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젊은 직원을 모았나.


“청년들은 돈만 많이 준다고 일하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도 연봉을 많이 주지는 못한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성장한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연봉이나 물질적 혜택뿐 아니라, 공감하는 가치와 지향점이 일치할 때 조직원은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직원들도 처음 입사하면 물론 힘들어한다. 하지만 적응이 되면 다들 되게 재밌어한다. 일이라기보다는 대학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듯한 기분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직원들은 그 에너지에 휩쓸려 불협화음을 낸다. 대표는 회사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일을 재미로 느낄 수 있도록 좋은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해줘야 한다.”


-서른한 살 대표로서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나?


“전두엽! 전에는 팔과 다리는 물론 손톱, 발바닥 역할까지 혼자서 다 했는데, 이제 두뇌로 좁혀진 거다. 앞으로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할지 ‘철학’을 고민하는 게 지금 나와 남편의 역할이다.”


이 대표는 강원도 농부의 아들로 한국농수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양구에서 유기농 사과 농사를 짓던 동갑내기 청년 농부 최동녘씨와 2020년 결혼했다.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부부는 각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남편 최동녘)와 경영(아내 이미소)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최씨는 카페 뒤에 꽃을 심어두고, 손님이 직접 밭에 들어가 원하는 만큼 따 오고, 꽃다발까지 만들어보는 ‘꽃 따러 오는 밭(꽃다밭)’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화제가 된 기획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회사로 성장하고 싶나.


“지속 가능한 농업, 종의 다양성을 위해 시작했다. 수확량과 생산성에만 치우친 농업은 땅을 병들게 한다. 수확량과 편의성을 추구하다 사장된 다양한 품종을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젊은 직원들이 잘 살아갈 생각을 하더라. 출산율, 실업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결국 서울에만 몰려 살아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지방에 양질의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가 만든 사업 모델이 성공하고 확장되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회사, 그게 나의 목표다.”


카페 감자밭 뒤로 작은 밭 하나가 보였다. 평생 월세로 빌린 집에서 살고, 월세로 빌린 땅에서 농사를 짓던 이 대표 가족이 처음으로 갖게 된 ‘우리만의 땅’이다. 한겨울 텅 빈 밭에서 새해의 희망이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춘천=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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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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