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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방심했다간 큰코 다칩니다, ‘팔색조’ 여자 사기꾼의 세계

by조선일보

전청조 사건으로 소환한 역대 여성 사기범들

조선일보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와 재혼 소동을 계기로 사기 혐의가 드러나 체포된 전청조씨. 27세 여성인 전씨는 성별을 넘나들며 남녀 모두를 상대로 혼인빙자 사기와 투자 사기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42세 남씨에 대해서도 공범 의혹이 제기된다. /여성조선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여성도 절도, 사기, 폭력, 살인을 얼마든 저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범죄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고 하면 여전히 놀란다. 여성 주도 범죄에 대해 피해자는 방심하기 쉽고, 사회도 그 피해를 축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의 재혼 소동을 계기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기·사기미수 혐의로 체포된 여성 전청조(27)씨도 그런 허를 찔렀다. 전씨는 작은 체구에도 능란한 언변과 친화력, 출신과 재력·인맥 날조에 성별까지 넘나드는 변신술로 여러 혼인 빙자 사기와 투자 사기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사기 같은 지능 범죄 유형이 복잡다단해져 여성 범죄 영역도 팽창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 사기범들의 수법을 다시 짚어본다. 왜? 유비무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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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장영자부터 이은해까지


한국 여성 사기꾼의 대모는 장영자(79)다. 1980년대 5공 시절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라는 어음 사기를 저지른 ‘큰손’의 대명사. 장씨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 전두환 대통령과 얽힌 인척 관계를 내세워 어려운 기업들에 긴급 자금을 빌려주고 그 지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했다. 이전 이혼 두 번 때 받은 위자료 수억원을 종잣돈 삼아 남의 돈을 남의 돈으로 돌려막는 일종의 폰지(ponzi) 사기였다. 사기 총액은 7000억원대로 당시 국가 예산의 10%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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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총 7000억원대, 당시 국가 예산 10%에 달하는 천문학적 어음사기를 저지른 '큰손'의 대명사 장영자씨가 39세 나이로 첫 구속되던 모습. /조선일보DB

미모와 화술이 화려했던 장씨는 유력 인사 접대비만 월 3억원 넘게 쓸 정도로 통이 컸다. 1982년 첫 구속 때 포승에 묶여서도 “나는 피해자입니다. 경제는 유통이에요. 난 경제활동을 한 겁니다!”라고 외쳤다. 장씨는 출소 후 어음 사기와 구권 화폐 사기 등을 거듭 저질러 네 차례, 총 29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지난해 출소했다. 장씨 자신도 ‘사기 중독’ 수준이지만, 그의 정체를 뻔히 알면서도 당한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는 얘기다.

이후 살인을 전제로 한 보험 사기를 저지른 ‘엄 여인’ 엄인숙과 ‘계곡 살인’ 이은해가 연이어 등장했다. 보험 설계사 출신인 엄인숙(46)은 2000년부터 5년간 보험금을 타내려 두 남편을 차례로 사고로 위장해 살해했다.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까지 바늘로 눈을 찔러 실명케 했다. 엄씨는 탤런트 뺨치는 미인형에 하얀 피부, 얌전하고 나긋한 말투 덕에 장기간 의심받지 않은 채 범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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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계곡에 빠뜨려 숨지게 해, 살인과 보험사기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이은해의 지난 2016년 결혼식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방송에서 ‘소녀 가장’으로 알려진 이은해(32)는 2019년 보험금 8억원을 노리고 수영 못하는 남편을 깊은 계곡에 빠뜨렸다. 앞서 2010년 전 남편과 2014년 사실혼 관계이던 남자 친구 모두 의문사로 숨졌다. 이씨는 엄씨처럼 사이코패스(반사회성 인격 장애) 측정 평가 점수가 만점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 이기심과 공감 능력 결여, 충동 조절 장애 등이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를 ‘여신’으로 추종하는 팬클럽이 생기는 기현상도 낳았다.


◇”꽃뱀은 꽃뱀 같지 않다”


거의 모든 범죄 피의자는 남성 비율이 훨씬 높다. 사기도 그렇다. 다만 여성은 물리력이 필요 없는 사기에선 일종의 비교 우위를 갖는다. 유엔 통계상 2021년 기준 각국에서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비율은 남성이 85%이고 여성이 15%인데, 사기 분야에선 남성이 73%, 여성이 27%였다. 한국에서도 1993~2021년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 중 여성은 21.2%를 차지했는데, 사기 관련 범죄에선 그 비율이 평균치를 웃돈다. 일반 사기의 22.6%, 횡령의 26.1%, 약취 28.6%, 밀수 30.8%, 위증·증거인멸 36.9%를 여성이 저질렀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간부는 “범죄가 발각돼 처분된 수치가 그렇지 실제 여성 사기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듯한 지위를 가진 남성이나 유명 인사들이 여자에게 큰 사기를 당하고도 수치심 때문에, 또는 사생활 문제가 드러날까 봐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여성은 전통적 성 역할과 좁은 행동반경 때문에 범행 기회부터 적고, 여성 범죄가 은폐하기 쉬운 데다 사법기관이 여성에 관대한 경향이 있을 뿐, 실제 범죄성의 성별 차는 크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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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여러 국군 장교와 기업인 등을 상대로 기밀을 빼낸 혐의로 구속됐던 탈북자이자 간첩인 원정화. /조선일보 DB

‘여자 사기꾼들(Confident Women)’이란 연대기를 쓴 미국 여성 작가 토리 텔퍼도 “통상 여성은 사기를 칠 만한 권력이나 인맥, 자원을 가졌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위협을 감지하기 어렵다”며 “보호 본능, 공감 능력, 감수성, 친화력 등 남을 조종할 수단은 여성에게 더 많을 수 있다”고 했다.

흔히 여자 사기꾼을 ‘꽃뱀’이라고 부른다. 꽃뱀은 성적 매력으로 이성을 유혹해 금품이나 정보, 조직 내 입지 등을 얻어내기 때문에, 외모가 뛰어나고 드세거나 영리해보일 것이란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진짜 꽃뱀은 오히려 외모가 평범하거나 좀 모자라 보일 정도로 유순한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경계심을 풀게 한 뒤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다.


200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된 북한 간첩 원정화(49)는 수년간 여러 국군 장교들과 내연 관계를 맺으며 군사 기밀을 빼돌리고, 중국·일본까지 진출해 남성들을 이용해 사기·첩보 활동을 벌였다. 당시 사람들은 원씨의 범죄 스케일에 놀라고, 사진을 보곤 “저런 평범한 여자에게 다들 홀렸다고?” 하며 또 놀랐다. 호주에선 서맨사 아조파르디(35)란 여성이 2007~2019년 호주와 캐나다, 아일랜드 등에서 ‘말 못하는 10대 고아 소녀’ ‘가족이 몰살당한 러시아 체조 선수’ 등 불쌍한 소녀 캐릭터를 70여 가지나 연기하며 유괴·절도 등 사기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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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실리콘밸리에서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리며 45억달러 돈방석에 앉았던 엘리자베스 홈즈 전 테라노스 CEO. '피 한방울로 250개 질병을 진단한다'는 키트가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실리콘밸리 최악의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포브스

◇고독과 허영을 파고든다


잘난 것 없는 사기꾼이 타인의 마음을 훔치고 가스라이팅(gaslighting·심리를 조작해 지배하는 일)까지 할 수 있는 건, 사기란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의 상황에 달린 심리전이기 때문이다. 범죄 심리 전문가인 함혜현 부경대 교수는 “사기꾼들은 외로움과 불안, 멋져 보이고 싶은 허영, 부자나 유력 인사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선망 심리 등 허약한 마음을 잘 긁어주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로선 사기꾼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줄 도구로 보고 빠져든다는 얘기다. 함 교수는 “특히 경제가 안 좋을 때, 그리고 소셜미디어 발달로 부와 명예, 명분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사기는 기승을 부린다”고 했다.


미 실리콘밸리 최악의 사기범 엘리자베스 홈스(39) 전 테라노스 최고경영자(CEO)는 2014년 “피 한 방울로 질병 250가지를 진단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었다”는 거짓말로 1년 만에 자산 45억달러(약 6조원) 돈방석에 앉았다. 스티브 잡스의 검은 터틀넥과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낸 홈스가 ‘인류를 구할 기술 개발에 미친 금발 천재 소녀’로 등장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루퍼트 머독과 마윈 등 각계 거물이 그를 앞다퉈 찾아가고 투자금을 모아 줬다. 여성이 성공하기 힘든 분야에서 젊은 여성을 띄워주는 것이 자신들 이미지에 도움 된다는 것을 간파한 남성 기득권층, 그리고 신기술로 돈을 벌겠다는 눈먼 투자자들이 홈스라는 괴물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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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사교계에서 독일 재벌 상속녀 행세를 하며 유흥비와 투자비를 뜯어낸 러시아의 안나 소로킨이 지난 2019년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AP

2017년 뉴욕 사교계를 발칵 뒤집은 안나 소로킨(32)은 러시아 트럭 운전사의 딸이지만 독일 유력 가문 상속녀 행세를 하며 은행과 기업에서 유흥비와 투자금 등 수백만 달러를 뜯어냈다. 그는 자신이 꾸며낸 호화 생활과 인맥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안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일이 꼬인다 싶으면 “내가 20대 여자라 무시하느냐”며 상대의 도덕성을 들어 꼼짝 못 하게 했다. 소로킨은 자신의 사기 스토리를 넷플릭스(’안나 만들기’ 시리즈)에 35만달러(4억원)를 받고 팔았고, 출소 후 각지에 강연도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기 수법을 아무리 연구하고 알려도 속을 사람은 또 속는다는 게 함정이다.


[정시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