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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전투에 나가야 하는 병사처럼 어깨 들썩이며 순댓국을 먹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순댓국

조선일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제일어버이순대의 순댓국.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에 올라와서 많은 것을 처음 접했다. 지하철 사당역 환승 통로로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은 부산에서 겪어 보지 못한 규모였다. 서울에서는 남자들끼리도 “밥 먹었어?”라고 다정하게 물어봤다. 부산에서 동성뿐만 아니라 이성에게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이제 성인이자 대학생이 된 마당에 나 역시 친절하게 답해야 했고 “아니”라고 하면 자취를 하던 친구들 입에서 자주 나온 음식이 바로 ‘순댓국’이었다.


순대로 국을 끓인다고 생각조차 못했다. 순대라는 것은 자고로 마늘, 참기름으로 양념한 쌈장에 찍어 먹는 것이었다. 찾아 보면 부산에도 순댓국을 파는 곳이 여럿이다. 하지만 스무 살까지 부산에서 순댓국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거리에 보이는 간판은 대부분 ‘돼지국밥’이 아니면 ‘횟집’이었다. 어른으로서 서울 생활을 하면서 순댓국 먹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에 이만한 음식이 없었다. 싸고 푸짐했다. 여의도의 ‘제일어버이순대’에 앉아 순댓국을 먹으며 이 흔한 음식이 가진 저력에 대해 생각했다.


이 집을 찾으려면 우선 제일빌딩에 가야 한다. 샛강역 근처 KBS별관 바로 옆에 있는 제일빌딩은 1980년 12월에 사용 승인이 났다. 그 시절 여의도에 지어진 많은 건물이 그렇듯이 밖으로 난 창은 작고 외관은 각이 져 있으며 지하에 주차를 하려면 입에서 거친 말이 여러 번 나오는 그런 곳이다. 이 빌딩 안에 들어서니 콘크리트를 두껍게 쳤는지 발을 디딜 때마다 돌의 냉기가 느껴졌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제일어버이순대’라는 집이 나타났다. 들어가지 않아도 분위기가 느껴졌다. 말 없이 혼자 순댓국을 먹는 직장인, 역시 순댓국 한 그릇 앞에 두고 홀로 낮술을 마시는 노인, 같은 유니폼을 입고 마주 앉아 또 조용히 밥을 먹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중년 여자는 숨이 가빠 보일 정도였다. 점심시간 막바지였다.


먼저 나온 것은 모둠 순대. 아침마다 채소, 찹쌀, 고기로 직접 순대를 빚는다는 이 집의 대창순대는 나온 모양부터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창순대는 잘못 손질하면 잡내가 나거나 질긴 식감에 입맛을 망치는 경우도 흔하다. 이 집은 잡내도 없었고 식감도 부들부들하여 먹을 때 거슬리는 느낌이 없었다. 또한 찹쌀의 고소한 맛이 피에서 비롯된 선지 특유의 아린 느낌을 가려주고 씹을수록 오히려 단맛이 우러나오는 듯했다.


같이 나온 머릿고기 역시 거칠게 다룬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고급 식재료를 다루듯이 말끔하게 익혀내 첫맛이 깔끔하고 개운한 뒷맛이 오래 남았다. 보통 분식집에서 순대에 곁들여 파는 돼지 간은 시간을 두지 않고 무작정 찌기만 하여 먹으면 푸석푸석하고 모래알처럼 좋지 않은 식감을 남긴다. 또한 돼지는 큰 짐승이고 그만큼 간이 머금은 피도 많기 때문에 아무리 잘 쪄도 쓴맛이 나고 입에 떫은 기운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핑크빛이 살짝 어린 이 집 돼지 간은 그 색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입에 넣으니 부드럽게 간이 살짝 굳은 생크림처럼 녹아내리면서 잔잔한 단맛이 함께 퍼졌다. 일식에서 높게 치는 아귀 간이나 프랑스의 푸아그라 어디쯤은 따라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재료들을 넣고 끓인 순댓국 맛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인 순댓국에는 순대와 머릿고기, 각종 내장이 듬뿍 들어 국물만 떠먹기가 힘들 정도였다.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는 약을 달이듯 고아낸 국물을 입에 넣으니 묵직하고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힘이 느껴졌다. 다대기를 풀고 딸려 나온 부추 무침도 적당히 집어넣었다. 국물에 붉은빛이 퍼져나갔고 얼큰한 기운이 올라왔다. 건더기를 얼추 건져 먹는 데만 시간이 걸렸다. 밥을 말려고 보니 대충 지은 솜씨가 아니었다. 한꺼번에 많이 밥을 지어 온장고에 버리듯 넣어둔 밥이 아니라 적은 양을 그때그때 짓는 것 같았다. 쌀알이 짓이겨져 떡지지 않고 하나하나 낱알이 살아 있었다. 그 밥을 국물에 말아 훌훌 마시듯 먹기 시작했다. 단맛이 도는 깍두기와 매콤한 겉절이를 곁들였다.


무표정한 건물 바깥으로 차갑게 불던 바람은 쉽게 잊혀졌다. 나는 곧 전투에 나가야 하는 병사처럼, 높은 산을 올라야 하는 일꾼처럼, 숟가락을 든 손아귀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순댓국을 먹었다. 뚝배기의 빈 바닥을 보았을 때 나는 부산의 말수 적은 소년이 아니라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쓰린 말을 웃음으로 갚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제일어버이순대: 0507-1414-1712

순댓국 8000원, 순대정식 1만원, 모둠순대(소) 1만7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