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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4분 자막에 2시간,
"막힌 웃음 혈 뚫어 드려요"

by조선일보

'미스터트롯' 막내PD가 말하는 '자막의 세계'


예능에서 자막이 빠진다면? 수프 빠진 라면, 춘장 없는 자장면이다. '자막 공해'라는 비판도 종종 나오지만, '자막 센스=인기 예능 필요충분조건'이란 공식은 더 단단해졌다.


예능 자막이 처음 등장한 건 25년 전. '쌀집 아저씨'로 유명한 MBC 김영희 PD가 1995년 예능 'TV 파크'에 자막을 넣은 게 최초로 알려졌다. 김 PD는 한 방송에서 "1994년 6개월 동안 일본 후지TV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시도했다. 첫 방송 땐 '우리가 청각 장애인이냐'는 시청자 항의가 쏟아졌다"고 했다. 방송가에서 자막의 위력을 보여준 첫 사례로 꼽히는 프로는 '무한도전'. 이후 '라디오스타' '무릎팍도사' 등으로 자막 명가 계보가 이어졌다.

조선일보

‘미스터트롯’ ‘아내의 맛’ 자막을 담당한 TV 조선 4년 차 동기 PD들. 왼쪽부터 이자은·김도영·임지훈·라수빈 PD. 이들의 자막 원칙인 아랫말(아래 큰 자막) 10자 이내에 맞춰 미스터트롯 대표 글꼴 ‘을지로체’로 제목을 달았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최근 새 자막 강자로 떠오른 프로는 최고 시청률 35.7%를 기록하며 예능 역사를 새로 쓴 '미스터트롯'과 후속편 '사랑의 콜센타', '아내의 맛' 등 TV조선 히트 예능 세트. 이 프로들의 자막은 입사 4년 차 신참 PD들 작품이다. 주인공 김도영(29·사랑의 콜센타 연출), 임지훈(31·사랑의 콜센타), 이자은(26·아내의 맛), 라수빈(27·13일 첫 방송 뽕숭아학당) PD를 만나 '자막의 세계'를 살펴봤다.

영상 4분당 자막에 2시간

미스터트롯에서 이찬원과 나태주가 남진의 '남자다잉'을 부른 장면. '찬또 윙크라니. 연차 내길 잘했어' '골반 개방' 등의 자막이 올라온다. 영탁에겐 '리듬탁', 중저음 목소리의 류지광에겐 '버터산유국'이란 별명이 붙었다.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는 트로트란 소재의 막힌 웃음 혈을 센스 만점 자막으로 시원하게 뚫었다. 10대까지 먹힌 미스터트롯 자막은 20대 삼총사 김도영·라수빈·이자은 PD의 합작품. "셋이서 월요일 밤부터 편집실 소파에서 쪽잠 자며 2박 3일 자막에 매달렸어요." 동기 셋이 까르르 웃는다.


자막이 시청률 바로미터로 꼽히는 요즘은 작가가 아닌 막내급 PD가 예능 자막을 다는 추세. 어렸을 때부터 예능 자막에 익숙한 '자막 네이티브' 밀레니얼 세대다. 미스터트롯 등을 총괄한 서혜진 TV조선 제작본부장은 100% 담당 PD가 자막을 쓰게 하는 걸로 유명하다. "자막은 PD가 시청자와 소통하는 창구. 직접 편집하는 PD가 맥락에 딱 맞는 자막을 가장 잘 달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론.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자막에도 엄청난 땀방울이 맺혀 있다. "영상 4분에 2시간이 숨어 있다고 보면 돼요. 자막 아이디어를 떠올려 문서 파일로 적는 데 1시간, 영상에 얹는 데 1시간 정도 걸려요." 이들은 "PD 준비할 땐 상상하지 못했던 업무"라고 입 모았다.


대체로 '녹화→ 2~3일간 각자 담당 파트 편집하며 1차 '가자막(임시 자막)' 달기→ 하루 정도 '텍스트 파일'로 자막 정리(내용, 글씨체, 효과 등)→하루 정도 종합편집실에서 자막 감독이 디자인한 자막을 영상에 얹기' 과정을 거친다. "자막 공장이랄까요? 우리 공장 제품은 '세대 무차별 프리 스타일'." 임 PD가 웃으며 말했다.

명사형 맺음말, 캐릭터 심기

"명사형으로 명료하게 끝내기, 상황 묘사가 아닌 캐릭터 심기." 이들이 유념하는 자막 법칙이라고 했다. 지난 5일 방영된 '아내의 맛'에서 홍현희가 오만상 찌푸리며 굼벵이를 먹는 장면. 이 PD는 '시원하게 기지개 켠 안면 근육'이란 자막을 넣었다. 안면 근육을 재치 있게 의인화했고, 명사형으로 맺어 간결한 느낌을 줬다. 굼벵이를 넣어 음식 만드는 화면엔 '속세 맛 첨가한 굼벵이 감바스(?)'라는 자막이 나왔다. 요즘 인기인 스페인식 새우 요리 '감바스'를 넣어 젊은 층이 웃을 포인트를 찍은 것. 라 PD는 '필연 커플' '보고 커플' 등 출연자 이름을 조합한 커플 작명으로 화제 모았던 '연애의 맛' 자막을 담당했다.


자막에도 '치고 빠지기'가 중요하다. "'PD가 빠져서 보느라 자막 다는 거 까먹었구나'란 댓글이 가끔 있는데, 정확히 보신 거예요. 하하." 김 PD는 "장면 자체로 재미있을 때는 자막을 빼고, 좀 심심한 장면엔 자막을 넣는다. 재미의 일관성을 유지해주는 도구"라고 했다.


자막 참고서는 어딜까. 자막도 쌍방향 시대. 라 PD는 "시청자 게시판, 촌철살인 댓글은 아이디어 공급 창"이라고 했고, 김 PD는 "시험지 채점하는 마음으로 댓글 창에 들어가 내 자막 반응을 본다"고 했다. 자막에서도 '집단 지성'이 중요하다. 이 PD는 "시쳇말로 '드립 치다가' 아이디어가 툭 튀어나올 때도 있고 동료와 '크로스체크(교차 확인)'하며 내가 쓴 자막이 먹힐지 가늠하기도 한다"고 했다. 임 PD는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신조어 섭렵하는 건 기본"이라며 "주변 사람들의 평범한 눈도 믿는다. 어른들 눈높이 맞출 때는 어머니가 이걸 보고 웃을까, 젊은 층 타깃일 때는 여자 친구가 웃을까 생각해 본다"고 했다. 자막 잘 다는 타 프로그램으로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종방)' '나 혼자 산다' '놀면 뭐 하니' '1박 2일' 등을 꼽았다.

자막은 시각 예술

조선일보

(왼쪽부터) 이자은 PD 라수빈 PD 임지훈 PD 김도영 PD

자막은 화면을 구성하는 필수 시각 요소로 자리 잡았다. 서체, 크기, 색깔 등 자막 디자인에 들이는 공이 상당하다. 이 PD는 "프로그램 방영 전 자막 종류별로 기본 폼을 세팅한다"며 "미스터트롯 메인 서체를 정할 땐 수십 가지 궁서체를 올려 본 뒤 '배달의 민족 을지로체'로 결정했다. 이후 SBS '트롯신이 떴다' 등 타 방송에서도 이 서체를 따라왔다"고 했다.


과유불급. 글자 수에도 디테일이 숨어 있다. 김 PD는 "자막에서 '윗말(화면 하단 두 줄 자막 중 위의 작은 자막)'은 6자 이내, '아랫말(아래 큰 글자)'은 7~10자 쓰는 게 우리 원칙"이라고 했다. 라 PD는 "미스터트롯은 장년층만을 겨냥한 게 아니라 '시청자들이 시원하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자막을 큼지막하게 넣었다"며 "MBC '쇼! 음악중심', SBS '인기가요'에 임영웅·영탁이 나오는 장면에만 우리처럼 자막을 크게 넣어 흥미로웠다"고 했다. 자막이 출연자의 정체성을 표현해 주는 도구가 된 셈이다.


단순히 색만 넣는 방식을 벗어나 벨벳 질감, 깃털 장식 추가 등으로 자막을 입체적으로 살린다. 이 PD는 "신인선이 '쌈바의 여인'을 부를 때 구글에서 '브라질 리우 카니발'을 검색해 나오는 이미지를 참고해 자막을 만들었다"고 했다. 입에서 나오거나 후드득 떨어지는 등 움직이는 '공격 자막', 출연자의 눈·입 등을 자음으로 활용하는 자막이 최근 등장한 스타일이다.

마법의 물음표 넣고, 느낌표 빼고

자막 중요성이 커진 만큼 맞춤법 실수는 치명적이다. 과거보다 훨씬 신경 쓴다. 이 PD는 "텍스트로 대본 파일 작성할 때 혼자서 한 번, 동료와 교차 체크할 때 한 번, 작가가 다시 한 번, 적어도 세 번 점검한다"고 했다.


특히 맞춤법에 신경 쓰는 단어로는 안 돼요(○)/안 되요(×), 거예요(○)/거에요(×), 콘셉트(○)/컨셉(×), 파이팅(○)/화이팅(×) 등을 꼽았다.


문장 부호 용법에도 숨은 뜻이 있다. "표기법이 실생활과 달라 영 어색하거나 비속어의 경계에 있는 말, 신조어 등엔 괄호 안에 물음표를 슬쩍 넣어요. 우리끼린 '마법의 물음표'라고 해요." 라 PD가 말했다. '찐(?)' 식으로 쓰는 것. 김 PD는 "느낌표는 감동을 강요하고 조잡해 보여 안 쓰자는 주의"라고 했다.


탈모 등 외모 비하, 종교, 지역색 등은 전통적 자막 금기어. 임 PD는 "재난 관련해선 특히 조심한다. 지진이 났을 때 '동공 지진'을 절대 안 썼다. 코로나 19로 힘든 요즘은 '바이러스'란 단어가 금기어 목록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

예능 자막 공정

1. 녹화

2. 2~3일간 각자 담당 파트 편집하며 1차 임시 자막 달기

3. 하루 정도 '텍스트 파일'로 자막 정리 (내용·글씨체·효과 등)

4. 하루 정도 종합 편집실에서 자막 감독이 디자인한 자막을 영상에 얹기

5. 마스터본으로 자막 최종 점검


자막 고수의 '자막 법칙'

  1. 명사형으로 간결하게 종결
  2. 상황 설명 말고 캐릭터 심기
  3. 자막도 쌍방향, 댓글은 참고서
  4. 치고 빠지기 기술
  5. 신조어 허들 '마법의 물음표'로 넘기
  6. 과유불급, 큰 자막은 10자 이내로
  7. 탈모, 종교, 지역색은 금기어

김미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