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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아무튼, 주말] 변희원 기자의 한 點

中卒 아빠, 게임중독 中卒 형제를 직접 가르쳐 서울대로

by조선일보

중졸 3父子 노태권·동주·희주

조선일보

노태권(가운데)씨는 게임 중독에 걸린 아들 동주(왼쪽)와 희주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같이 걷자”고 했다. 그는 “부모는 아이가 공부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되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하찮은 일에 빠지는 아이를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시행착오도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아이의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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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동주가 중학교 3학년 어버이날 때 쓴 카드. /노태권씨 제공

'어버이날

우리 아빠는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다.


2006. 5. 8.'


노태권(64)씨는 중학교 3학년짜리 첫째 아들이 쓴 어버이날 카드를 발견하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멍하게 있을 정도로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저걸 보고 아들에게 화낼 생각도 못 했던 건 틀린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중학교 겨우 나온 막노동꾼인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멸치 똥 같은 아버지였죠. 멸치는 끓이면 감칠맛 성분이 우러나 요리의 맛을 높여주는 음식 재료이지만, 쓴맛만 내는 멸치 똥은 솥에 넣기 전에 떼버리잖아요."


노씨의 최종 학력은 중졸(中卒)이고, 그는 40대 중반에야 한글을 뗐다. 두 아들도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첫째 동주(29)씨는 게임 중독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형처럼 게임에 빠졌던 둘째 희주(27)씨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중졸 삼부자가 된 셈이다. 두 아들의 중졸이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 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노씨는 두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게임 중독이란 수렁에서 건져냈다. 동주씨는 2011년 서울대 경영대에, 희주씨는 2015년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두 사람 모두 4년 장학금을 받았다. 한글도 몰랐던 중졸의 아버지는 어떻게 두 아들을 서울대에 가도록 가르쳤을까? 최근 에세이집 '떼루 떼루 빠떼루 달인'을 펴낸 노씨와 두 아들을 함께 만났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의미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단다.

마흔 넘어서 아내에게 한글을 배우다

노씨 또래 중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노씨는 예외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 시청 공무원이어서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두 남동생은 모두 연세대를 나왔을 정도로 집안에선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잘해줬다. 난독증이 있는 노씨는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글을 몰랐고, 교과 과목 공부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시험 성적으로 중학교 배치를 받던 시절에 그를 받아줄 학교는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가 교사로 있는 중학교에 그를 보냈다. 노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난독증이란 걸 알고 있었나요?


"옛날에 그런 게 뭐 있었나요, 요즘 사람도 난독증을 잘 모르는데. 글을 모르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든 바보 취급을 받았고, 아버지한테도 많이 맞았어요. 국민학교 때 집에 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걸 보고 무서워서 저수지로 뛰어든 적도 있었어요. 그날 아버지가 물에 뛰어들어 저를 꺼내주시면서 '괜찮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 후로 저를 때리거나 혼내지 않으셨어요. 중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에게 꽃을 받은 졸업생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가 저를 마중 나오곤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학교도 못 가고 막노동을 하는 장남이 불쌍하고도 애틋했겠죠. 저는 아버지가 무서우면서도 죄송스러웠죠. 장남이 이러니까…."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은가요.


"글을 못 읽으면 어디 가나 갑질을 당해요. 똑같은 잘못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욕만 먹고 말 것을 전 주먹으로 맞았어요. 무시해도 되는 바보라고 생각하니까."


―난독증을 고친 계기가 있습니까.


"아내 덕분입니다. 서른다섯 살에 은행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했어요. 은행 지점장이던 아버지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는 당시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를 가진, 능력 있는 여자였죠. 결혼 후 막노동을 그만하고 아내가 모은 돈으로 공사장에 자재 납품하는 사업을 했는데, 꽤 잘됐습니다. 그러다 IMF가 오는 바람에 사업이 망했죠.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아파트와 패물을 다 팔았는데도 빚이 남았어요. 집에 찾아온 빚쟁이에게 아내가 1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다니던 은행을 당장 그만두면 퇴직금이 얼마 안 나오지만, 1년 뒤 명예퇴직 신청을 하면 빚을 갚을 만한 퇴직금이 나온다고요. 덕분에 저는 신용 불량자 신세를 면했습니다. 다시 막노동을 하려는 저에게 아내가 글공부를 하자고 했습니다."


노씨의 아내 최원숙(64)씨에게 "왜 글도 못 읽는 막노동꾼과 결혼했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첫눈에 나한테 반했다고 했어요. '나는 중졸에 막노동꾼입니다. 이런 나라도 좋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건장해서 남자답게 느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눈빛에서 억눌린 열정과 욕망이 보였어요. 내가 도와주면 그걸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현대판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다.


―고졸인 아내가 어떻게 난독증을 고쳤죠?


"저는 '홍'이란 글자를 보면 위아래에 'ㅎ'이 두 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아랍 문자를 보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으로 보이죠?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글자를 그냥 외웠어요. 한글의 자음과 모음으로 만들 수 있는 글자가 총 1만1172자라던데, 그중에 ' '처럼 일상에서 실제로 쓰이지 않는 비(非)단어를 제외하면 약 1500자예요. 아내가 도서관 다니면서 1500자를 추려내서 종이 한 장에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적어주면 그걸 외웠어요. 외워도 계속 까먹는 통에 한글을 떼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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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권씨는 난독증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보통 책의 활자를 보기 어렵다. 글씨가 두 배는 크고 진해야 한다. 아내가 수능 교재를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주면 남편은 그것을 갖고 다니면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했다. /노태권씨 제공

―생계는 어떻게 했나요.


"아내는 은행을 그만둔 다음 식당에서 일했고, 저는 막노동을 했습니다. 아내는 일 마치고 새벽 한 시에 집에 와서도 저를 앉혀놓고 공부를 시켰어요. 저는 길을 걸어 다니거나 일터의 점심때, 쉬는 시간에도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한글을 배우고 난 뒤에 아내가 이젠 다른 공부도 하자고 하더군요. '내 나이 마흔다섯이면 십, 이십 년 살다가 죽을 건데 공부해서 뭐하냐'고 하니까 아내가 '100세 시대가 온다, 아직 반도 안 살았다'고 했어요."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초등학교 3~4학년 사회·과학 교과서로 시작했어요. 한글을 알아도 작은 글씨는 눈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아내가 교과서 내용을 요약해서 종이에 큰 글씨로 옮겨 적어줍니다. 그 종이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서 갖고 다녔어요. 출퇴근 시간이나 일터에서 볼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든 거죠. 아내가 책을 읽어서 테이프에 녹음해준 것도 있어요. 가끔 아내가 졸다가 코 고는 소리도 들려요(웃음). 당시 막노동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갔고, 대부분 여관에서 자거나 노숙도 했죠. 그런 날엔 길에서 그냥 공부하는 겁니다."


―공사장에서 공부할 분위기가 아녔을 텐데요.


“다들 저를 정신 나간 놈 취급했죠. 그 나이에 막노동하면서 공부를 해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놀렸고, 점심때 공부하고 있으면 와서 책을 발로 차기도 했어요. 쉬는 시간에 공부하다가 잘린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영어 단어장을 보면서 짜장면 배달하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갔어요. 한 손에는 단어장, 다른 한 손에는 철가방을 꼭 쥐고 있었더래요. 공부는 해야 하는데, 돈도 벌어야겠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공부를 하다 보니까 너무 재밌고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EBS 수능 교재도 다 옮겨 적어서 저만의 교재를 만들어줬어요. 아내가 쓴 글자 수를 대충 따져보니 3000만 자가 넘어요. 혼자서 공부하다가 저만의 공부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7년 정도 됐을 때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풀어봤는데, 매번 만점이 나왔습니다. 2013년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공부 달인’으로 소개됐을 때 제작진 앞에서 그해 수능을 풀었는데 한 개 틀렸습니다.”


―자신의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어떻게 아들의 공부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나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정말 잘했어요. 첫째가 중학교 가서도 전교 상위권을 유지한다고 하기에 저희 부부는 그런 줄로만 알았죠. 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에 갔고, 아내는 식당에서 낮 한 시부터 밤 한 시까지 일했으니 학교에도 못 가봤죠. 첫애가 중3이 됐을 때 아내가 전화 와서 ‘동주가 전교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전교 3등으로 고쳤다가 걸려서 집을 나갔다’고 했어요. 성적 위조를 한 게 처음이 아니었대요. 그때 뭔가 잘못됐단 걸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죠. 애들이 공부를 포기한 지는 오래였고, 몇 날 며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노릇 못하면 친구라도 되자”

동주·희주 형제는 사이가 좋았다. 부모는 집을 비우고,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니 둘이 함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춘천에 살던 형제는 함께 가출을 자주 했다.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식당일 하는 어머니가 있는 집이 싫었고, 어디 가서 게임이나 실컷 하고 싶었단다. 2007년 12월 자전거를 팔아 돈을 마련해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부산에 가는 데 돈을 다 써버린 형제는 가방에 들어 있는 20만원을 발견했다. 가출하는 아들 둘이 고생할까 봐 노씨가 미리 넣어둔 돈이었다. 동주씨는 “당시 다리를 다친 아버지가 공사장에 이틀 나가서 벌어온 돈이었다”며 “그날 바로 집에 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후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아들이 가출할 줄을 어떻게 알았나요?


“이미 (가출을) 몇 번 했기 때문에 나갈 때가 되면 분위기가 느껴져요. 그럴 때면 못 나가게 하려고 운동화랑 옷을 빨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공사장에서 돈을 벌어서 가방에 넣어뒀죠. 혹시 길에서 자거나 밥을 못 먹을까 봐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별 볼일 없는 막노동꾼’이라고 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리 돈·직업·학벌이 중요한 세상이라지만, 명문대 나오고, 부자이며, 잘나가야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 건가’라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돈과 능력이 중요한 게 현실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친구라도 돼주기로 했어요. 제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애들이 차마 그러진 못하고 저를 가끔 ‘벽공’(碧空·푸른 하늘)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게임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학교 다녀오면 집에 부모는 없지, 친구들은 다 학원 가지. 돈도 없고 할 것도 없는 아이들이 결국 할 게 게임밖에 없더라고요. ‘이건 애들 잘못이 아니다, 다 아버지 노릇 못 한 내 잘못이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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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돌아와서 졸릴 땐 아내의 교재를 벽에 붙여놓고 서서 공부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기도 한다. /노태권씨 제공

아이들과 걸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

―게임 중독을 어떻게 고쳤나요.


“첫째가 중학교 졸업 전 한 학기를 남겨두고 학교에 안 가려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하니까 의미가 없는 거죠. 초등학교 졸업이 아이의 최종 학력이 될까 봐 불안했습니다. 제가 ‘주말에 나와 산책을 하면 게임 그만하라는 얘기 안 하겠다’고 빌다시피 얘기해서 애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여덟 시간 동안 소양강을 따라 25㎞를 걸으면서 제 나름대로 춘천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해줬는데,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한테 눈길 한번 안 주더군요. 그래도 몇 달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 도중 큰애가 ‘아빠, 밥 안 먹어?’라고 한마디 던지는데 눈물이 났어요.”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는 게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게임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공부를 하기 위한 체력까지 미리 기를 수 있었다. 동주·희주씨는 “걷는 시간 빼고는 다 게임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덟 시간씩 걷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게임을 오래 못 했다. 그렇게 게임하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노씨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던 동주씨를 자신의 일터에 데리고 다녔다. 부자(父子)는 전국을 돌면서 공사장·주유소·세차장 등에서 일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희주씨도 합류했다. 노씨는 “다행히 동주의 체력이 좋아서 몸 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도 안 보내고 돈벌이시킨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일년 반 동안 전국 8000㎞를 돌아다니고 나서, 동주씨는 아버지에게 “공부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를 해보니까 중학교만 나와 갖고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게 아예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다. 공부를 해봤자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상황을 바꾸려면 일단 공부를 해야 했다”고 했다. 2008년 8월, 또래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아들과 전국 공사장과 주유소를 돌아

―아이를 데리고 다닌 이유가 무엇인가요.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을 보면서 좋은 아버지가 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아들한테 ‘아빠는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같이 다니자고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마치고 일을 시작한 아버지의 과거를 아들이 되풀이했네요.


“아이를 데리고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어요.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도 실패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만 나온 애는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 안 간 애, 문제가 있는 애라고 낙인찍고 함부로 대합니다. 제 아이들은 게임을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아파서 학교를 포기했을 뿐이에요. 학교를 포기했다고 인생까지 포기하게 놔둘 순 없잖아요.”


―아이들은 게임을 끊었나요.


“아니요. 저는 아이들이 게임을 아예 못 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첫째는 저랑 일을 하러 다니면서도 PC방에 가서 한두 시간씩 게임을 했어요. 일이 힘들어지니까 그것도 잘 안 하더라고요. 나중에 공부할 때도 게임을 조금씩은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아들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겠네요.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어요. 걸핏하면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좀 조용하다 싶으면 졸고 있고. 일단 5분 동안만 집중하는 공부법으로 시작했어요. 컴퓨터 자판을 잘 치는 애니까 5분 동안 영어 단어를 자판으로 치게 했고, 10분 휴식 시간과 게임 시간도 줬어요. 이걸 반복해서 적응시킨 다음에 공부 시간을 5분에서 10분, 20분으로 늘리다 보니 나중에는 100분도 거뜬히 집중하던데요.”


―명강사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고 합니다. 모의고사를 만점 맞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이 꽤 답답한 학생이었을 텐데요.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은 모습부터가 어찌나 귀엽던지. 공무원이었던 저희 아버지에 비하면 저는 덜떨어진 아버지인 데다가, 공부도 0점부터 시작해서 100점까지 해봤습니다. 공부 못하는 심정은 제가 제일 잘 알죠. 저는 마흔 넘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아들은 열일곱 살에 시작했으니 시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표는 애를 서울대 보내는 게 아니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좀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하루는 자습을 시키고 일을 다녀왔더니 아이가 책을 다 찢어놓고 밖에 나갔어요. 아내한테 들어보니, 아버지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불안하고 답답해서 소양강에 다녀왔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천천히 가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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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첫째 아들 동주, 어머니 최원숙, 아버지 노태권, 둘째 아들 희주.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사교육은 전혀 없었나요.


“아내는 차비를 아끼려고 밤늦게 일 끝나고 집까지 걸어왔는데, 사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일하는 시간을 좀 줄이고 7년 동안 공부한 비결과 시험 보는 요령을 모두 전수했어요. 수능 전 과목을 직접 가르쳤어요. 동주는 두 달 만에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이듬해 수능을 본 뒤 연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지 1년 7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에요. 실력보다 점수가 덜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재수를 하겠다고 해서 아예 학교 등록을 안 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1년 뒤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어요.”


―둘째 희주는 또래에 비해 대학을 더 늦게 들어갔습니다.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학교를 못 나가는 날이 더 많았고, 결국 고1 때 자퇴를 했어요. 형이 대학 가는 걸 보고 자기도 공부를 하겠다는데 몸이 계속 아팠어요. 나중에 대상포진까지 걸려 눈도 못 뜰 지경이 돼서 책을 못 보길래 제가 EBS 교재를 옆에서 읽어주면서 강의를 했어요. 수능 열두 과목을 그렇게 가르치다가 저도 몇 번 쓰러졌어요.”


희주씨는 2013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아토피 때문에 한 학기 만에 휴학했다. 그는 학교를 관두고 서울대 간호학과를 목표로 다시 수능을 봐서 2015년 합격했다. 현재 동주씨는 로스쿨 준비를 하고 있고, 희주씨는 4학년에 재학 중이다. 형제는 아버지가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고 ▲간섭을 거의 안 했으며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게임 중독을 끊어내고 대학 입시를 성공시켰다고 봤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자식이 움직이질 않는 것 같아요. 부모도 매력을 드러내야 아이들이 따르고 싶어 하고, 부모가 움직여야 아이들이 뒤따라가지 않을까요. 저희는 아버지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하고 아버지가 향하는 곳으로 방향을 튼 경우죠.”(동주)

부모가 매력이 있어야 아이가 따른다

―요즘 ‘아빠 찬스’란 말이 있습니다. 주로 ‘잘나가는 아빠’의 덕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제가 아버지 노릇을 못 해서 애들이 힘들어졌고, 나중에 조금이나마 제 노릇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제가 게임 중독 걸린 애 둘을 직접 가르쳐서 서울대에 보냈단 얘기가 나오니까 서울에서 큰돈 갖고 와서 자기 애도 가르쳐달란 부모가 꽤 있었어요. 아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애 공부시키는 부모도 세상에 많다. 우리가 그걸 잘 알면서 어떻게 이 돈 받고 애들을 가르치느냐’고 다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아내가 참 고마웠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애들한텐 ‘아빠 찬스’가 없었지만, 저에게 ‘아내 찬스’가 있었네요.”


―학력은 여전히 중졸입니다.


“원래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고, 공부가 재밌어서 계속 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만점을 받으니까 나중에는 해외 유학도 가볼까 하는 큰 꿈까지 꿨어요. 그때쯤 애들의 문제를 알고 거기에만 매달리느라 제 공부를 못 했죠. 애당초 제 목표가 제가 대학에 가는 것이거나 애들 서울대 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쯤 많이 허탈할 거예요. 100세 시대를 살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까, 그걸 이제 써먹어야죠.”


노씨의 다음 목표는 창업이다. 개발자·기획자 세 명과 함께 7월에 법인을 설립하고 50대 이상을 위한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플랫폼 ‘펼치고’를 선보일 계획이다. 노씨의 사업 계획이 적혀 있는 서류의 글씨가 책상 맞은편에서 보일 정도로 컸다. 남들은 한글 폰트 10~12포인트 크기로 볼 수 있는 글자를 그는 18~20포인트로 키우고 ‘굵게’까지 만들어야 볼 수 있다. 정자(正字)로 쓰지 않은 글씨도 여전히 못 읽는다. 그는 “난독증은 완전히 고쳐지는 게 아니다. 나는 아직 좀 모자란 사람이다”라고 했다.


“집도 절도 없는, 돈이 없어서 학원도 보내주지 못했던 막노동꾼 아버지이지만,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모든 것을 잘하는 완벽한 아버지는 없을 것이고, 아버지라고 해서 전부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처럼 모자란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변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