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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미대생→은행원→스튜어디스→변호사→경찰 “평생직장? 다섯 모두 소중합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곽창렬 기자의 열창]

미대생에서 경찰까지... 과천署 송지헌 수사과장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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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의 어느 날, 172㎝ 큰 키에 화장 진한 20대 여성이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 내렸다. 지나가던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신림동 고시촌은 어딘가요?” 그러자 아주머니의 핀잔. “아니, 아가씨 도대체 어딜 찾아온 거야. 여기 고시촌 없어.”


스물일곱 살 송지헌씨는 2006년에 처음 사법시험 도전을 마음먹었다. 고시를 보려면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도착. 신림역에 가면 바로 고시촌이 붙어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고시촌은 신림역에서 2㎞ 넘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자신의 세 번째 직업인 싱가포르항공 승무원을 막 그만둔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14년. 남색 경찰 근무복을 입은 지헌씨는 지금 수사 경찰 28명을 지휘한다. 송 경정 어깨에는 작은 무궁화 3개가 박혀 있다.


파란만장이랄까. 처음에는 미술학도였다. 하지만 졸업 후 첫 직장은 은행원, 그다음은 승무원. 그리고 느닷없이 변호사, 현재는 경찰. 경기 과천경찰서 수사과장 송지헌(宋知憲·41) 경정이다. 처음 붓을 잡았던 네 살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여정이었다.


예술가를 꿈꾸던 미대생은 어떻게 경찰이 되어 있을까. 하나 더. 재능이야 차고 넘친다지만, 반대로 하나의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진득함은 부족한 게 아닐까. 평생직장과 안정적 일자리가 함께 붕괴하는 시대, 그는 취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난달 29일 과천경찰서에서 그를 만났다.


네 살 때 붓 잡았다가 20년 만에 꺾어


―어려서부터 화가를 꿈꿨다면서요.


"아버지가 대기업 협력회사를 경영하고, 엄마는 미술 전공하셨어요. 흙수저는 아니죠. 부모님은 '세상 풍파 겪지 말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네 살 때부터 미술을 시켰어요. 미술은 유전자가 어느 정도 작용합니다. 엄마한테 물려받았죠. 네 살부터 대학원 1학년 1학기 때까지 20년을 그림만 그렸어요.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몰랐죠. 그림 그릴 때 몰입하면 4~5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미술을 관뒀습니다.


"2003년 대학원 1학기까지는 아버지가 뒤를 봐주셨죠. 그때 아버지가 '이제 최소한 그림은 네가 벌어서 해봐라'고 하셨어요. 저도 어느 정도 독립 생각을 하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자존심이 좀 상했어요. 1초도 고민 안 하고 '알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어렵더군요. 미술은 창조이자 생산이지만, 물감과 종이를 사야 하고 작업실도 필요합니다. 소비죠. 세상 사람들이 내 작품을 돈을 주고 사줄 때까지, 화가가 40~50세가 될 때까지는 계속 소비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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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이 됐다고 했습니다. 미대생을 받아주던가요.


"전공이 미술이다 보니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학부 졸업하고 1년이 지났기에 나이도 문제였어요. 결국 외국계 회사 정도였죠. 하루는 엄마가 홍콩상하이은행 한국지점 채용공고를 실은 신문을 오려 주면서 권하셨어요. 면접을 가니 당연히 '그림 그리다가 왜 은행에 왔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솔직하게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자본의 흐름에 대해 알고 싶고, 돈 벌어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고 했죠. 나중에 들으니 저처럼 솔직하게 말한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1년 만에 그만뒀습니까.


"대출 업무를 맡았어요. 주로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야 했어요. 고객이 10억원을 빌리기 원하는데, 우리 은행이 8억원밖에 빌려주지 못하는 상황일 때는 내가 제2금융권(저축은행)에 가서 나머지 2억원을 빌려 채워넣었어요. 첫 달에 15억원을 유치해서 팀에서 1위를 했어요. 그런데 동시에 충격도 받았어요. 개인 주민등록번호를 치면 회사와 사는 곳에 따라 빌릴 수 있는 돈의 한도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이렇게 살면 감수성이 훼손돼 영영 그림을 못 그릴 거 같더군요."


"우연히 본 헌법 책 재미있어서, 사시에 도전"


은행을 그만두고 나서 그는 2004년 말 외국계 항공사 승무원 시험을 보러 나섰다. 그리고 싱가포르항공 승무원이 돼 약 2년간 세계 곳곳을 다녔다.


―승무원은 또 완전히 다른 분야인데요.


"대학원을 1년 정도 쉬려고 했는데,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돈을 더 벌어보자는 생각에 승무원에 도전했어요. 다른 나라 미술관도 볼 수 있잖아요. 앞으로 그림 그릴 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죠. 외국계 항공사는 전공이나 나이를 보지 않아서 중국동방항공과 말레이시아항공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모두 떨어졌어요.


―은행은 붙었는데 항공사는 떨어졌다?


“4년제 대학 나왔고 토익점수도 900점 정도여서,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어요. 속상했죠. 왜 떨어졌는지 알아보니 ‘금세 그만둘 거 같아서’라고 했어요. 그럴 만도 했어요. 저를 제외한 지원자는 모두 하얀색 블라우스와 까만색 스커트 차림에 ‘똥머리’(머리를 올리고), 항공사가 원하는 화장을 하고 면접 보러 왔어요. 근데 저는 집에 있는 흰색 ‘A’라인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 차림이었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항공사 입장에서는 ‘진지하지 않다. 오래 못 다닐 거 같다’고 판단한 거죠.”


―그런데 세 번째에 합격했습니다. 옷을 바꿔 입었나요.


“아뇨. 한 번만 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싱가포르항공에 응시하고, 같은 차림으로 나갔어요. 근데 신기하죠. 그 항공사는 ‘다른 지원자는 모두 승무원 면접 복장으로 왔는데, 저만 머리 풀고 원피스 입고 와서, 그게 좋아 보였다’고 했어요. 그때 ‘회사와 구직자 사이에는 궁합이 있구나’라고 느꼈어요.”


―승무원은 왜 그만뒀나요.


“전 세계 곳곳 다니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죠. 하지만 저는 외국인이었고, 오래 할 수 있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미술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비행기 안으로 공급되는 한국 신문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 채용공고를 봤어요. 시험 과목 가운데 법학이 있어서 헌법 책을 구해 읽어봤어요. 저는 평생 그림만 그렸기 때문에 그때까지 입법·사법·행정부가 뭔지조차 몰랐어요. 그런데 통치구조론을 읽어보니 뉴스에서 나오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사를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 놀랍고 재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예 사법시험 한번 도전해보자고 결심했어요. 2006년 7월 말이었죠.”


―그래서 신림동 고시촌을 찾은 거군요.


“정말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신림동 고시촌에서 아침 10시에 일어나 새벽 4시에 잠들었어요. 하루종일 링 위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내려온다고 생각했죠. 공부 끝나고 방에 오면 온종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동굴에 들어간 거죠. 신기하게 그림 그리던 게 도움이 됐어요. 4~5시간씩 집중하던 게 몸에 배어 있으니까, 책을 펴도 최소 2시간은 최대한 집중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제가 공부하던 독서실 방에서 저 때문에 자리를 옮긴 사람이 여럿 있었다고 해요. 제가 공부할 때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기(氣)가 세다고 느꼈대요.”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법 공부가 맞던가요.


“그림 그릴 때는 감정의 기복도 많아요. 우울하게 그냥 있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법은 늘 명확했어요. 정답이 있었어요. 판례(判例)는 늘 퍼즐처럼 논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앉아서 책 보는 게 너무 행복했죠. 은행 영업하면서 뛰고, 비행기 안에서도 육체노동을 하다가 책상에서 공부하니 공부가 호강이었어요. 서른이 돼서야 내 재능을 발견한 거죠.”


예술 두뇌와 법학 두뇌는 다를 거 같은데요.


“다르지 않아요. 제가 나온 이대 조형예술대학에서 사법시험 합격한 사람이 처음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도전하지 않으니까, 해본 적이 없으니까 갖는 선입견이죠. 또 피아노 하다가 사시 합격한 분들도 있어요. 미술 할 때 경험은 경찰 수사에도 도움이 돼요. 그림을 그릴 땐 사물을 한 면에서 보지 않고 모든 각도에서 보는데, 수사도 그렇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내요. ‘술을 왜 마셨는지’ 단순히 묻지 않고, 다각도에서 상황을 고려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합니다.”


“역마살도 능력…50세까지는 경찰”


송 경정은 2006년 말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해 2년 반 만인 2009년 최종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변호사로 2년여 활동하다가 2014년 경찰의 변호사 특채 시험에 합격해 경찰이 됐다. 과천경찰서에서 만난 송 과장의 한 부하 직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장님, 또 관두고 어디 가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부하 직원들이 걱정하던데요.


“제 나이가 마흔한 살인데, 인생에서 다시 터닝포인트가 있다고 하면 쉰 살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한 번 더 업그레이드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죠. 지금은 경찰서에 일하러 나오는 게 너무 좋아요. 2014년 처음 발령받은 곳이 서울 서초경찰서 경제팀이었는데, 하루종일 사람이 많았어요. 도떼기시장 같은 데서 일하는 게 오히려 신났죠. 다른 형사님들하고 같이 구치소도 가고, (피의자) 체포하러도 가고, 자장면 값 못 받아서 온 아줌마도 만났고요. 하루하루 살아 있는 느낌이었죠.”


끈기나 진득함이 부족한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적응 못 하거나 만족하지 못한 게 아니라 좀 더 재미있고, 좀 더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요. 나는 역마살(驛馬煞)이 있어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나쁘다고 봤지만, 지금은 그만큼 열심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기회를 넓혀가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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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경찰이 역마살 있는 젊은 여성 변호사를 받아주던가요.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시보로 수사를 접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검찰 출신 연수원 교수님들이 늘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하면 안 된다’ ‘시기상조’라고 했는데, ‘도대체 왜 경찰이 수사하면 안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경찰 들어가서 알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어요. 뒤늦게 알았는데, 2014년 제가 변호사 특채 시험 면접을 볼 때 심사관들 사이에서 저를 두고 논란이 있었대요. 면접관 대부분은 ‘얘는 오래 못 버틴다. 경찰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를 뽑지 말자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면접 심사를 총괄했던 전(前) 서울청장님이 저를 뽑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답니다. ‘우리(경찰) 조직이 경직되고 상명하복 이미지로 국민에게 신뢰를 잃은 부분이 있는데,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람이 조직에 들어와야 한다’고요.”


―돈은 더 벌 수 있을 텐데 변호사는 왜 포기했나요.


“로펌에서 일할 때 ‘기업사냥꾼(기업을 매수·합병해 차익을 노리는 사람)’ 변호를 했어요. 한번은 위조화폐 감별하는 특허를 가진 유망한 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을 도왔어요. 나중에 보니 다 기업사냥꾼이었어요. 회사 자산을 다 빼먹고 도망갔고, 회사는 날아갔죠. 검정을 회색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일은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경찰 좋은 점이 또 있다면.


“변호사 업계에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여자 변호사 배가 불러오는 만큼, 남자 변호사 어깨가 무거워진다.’ 법조인이 되고 모든 면접에서 한 번도 안 빠지고 들었던 말이, ‘결혼은 언제 하나, 애는 언제 낳을 거냐’였어요. 그런데 경찰에 들어와서는 그 소리 단 한 번도 안 들었어요. ‘검정은 검정이다’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당연히 좋고.”


“일하는 이유 갖고 취업에 도전해야”


과천경찰서 수사과장실에 있는 그의 책상에는 ‘결혼을 말하다’라는 책이 꽂혀 있다. 책의 중요한 부분에는 10개 이상의 라벨 스티커가 붙어 있다. 싱글인 그가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하직원들이 최근 선물한 책이라고 했다.


―유복한 집안 덕에 아무 때나 퇴사하고 또 사시 준비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아버지께서 계속 후원하셨다면 아마 전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기에 지금 길을 걸을 수 있게 됐죠. 저는 한번 이직을 결심하면, 그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했어요. 승무원 할 때는 다음 직업을 위해 돈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2년 동안 안 쓰고 5000만원을 모았어요. 면세점에서 정말 사고 싶은 거 많았는데 참아서 3년간 사법시험 준비 자금으로 썼죠.”


좋은 직업이란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꼭 가서 해야 할 이유가 있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월급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갖고 도전하면 취업 준비할 때 더 열심히 잘하게 됩니다. 저는 은행원이나 승무원 할 때 돈도 필요했지만, 그것보다는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운다는 목표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그림 그릴 때 도움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러니 그 분야에 재능이 없더라도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재능이 없으면 합격하기가 어렵잖아요. 가진 건 성실뿐이라고 말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문과·이과처럼 아무런 스펙을 내세울 게 없어서, 전공 보지 않고 진입장벽이 낮은 직장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미대 다닐 때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타고난 미적 감각의 소유자를 만났고, 사법연수원에서는 타고난 두뇌를 가진 동기들을 봤어요. 그들과 경쟁할 때는 재능이 없다고 한탄한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세상에 나와보니 꼭 재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노력하다 보면 운도 따라 준다고 믿어요.”


[과천=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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