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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아무튼, 주말

"애들 놀이? 우린 '프로' 팔씨름꾼입니다"

by조선일보

유튜브서 인기... 팔씨름의 세계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마주 잡은 손과 손에 팽팽한 전운이 감돈다. 손아귀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된다. 마디 끝에 전해지는 상대의 악력에 온몸이 달아오른다.


"레디, 고!(준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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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서울 성북구 대한팔씨름연맹 사무실에서 오동표(왼쪽) 선수와 남우택(오른쪽) 선수가 연습 대련에 앞서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심판의 호령이 떨어지면 기운을 한쪽 팔에 모은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문제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이 팔씨름에 인생을 건 이들이 있다. 매일 훈련장에 나가 힘을 기르고, 전국 고수들을 찾아가 한판 붙는다. 팔심 하나로 국가대표가 돼 세계 대회에 출전하기도 한다. 이들은 '팔씨름 프로'다. '아무튼, 주말'이 대한팔씨름연맹 소속 선수와 관계자 네 명을 만나 프로 팔씨름 세계를 엿봤다.

동호회원 2만명, 프로는 70여명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간단한 놀이면서, 깊게 파고들면 끝이 없는 심오한 스포츠."


배승민(36) 대한팔씨름연맹 회장은 팔씨름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배 회장은 고3이던 2001년부터 팔씨름 동호회를 운영했고, 2010년에는 국내 최대의 팔씨름 커뮤니티 '그립보드'를 만들었다. 이어 2017년 세계팔씨름연맹(WAF) 산하에 사단법인 대한팔씨름연맹(KAF)을 창립했다. 팔씨름 선수들을 위한 운동기구를 만드는 제조업체도 운영 중이다.


"고등학교 시절 경기도 분당에서 팔씨름 '일짱'이었어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죠.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팔씨름 동호회에 나갔는데, 거기서 꼴찌를 해버렸어요(웃음). 팔씨름에도 기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팔씨름의 매력에 빠졌죠."


팔씨름을 사랑하는 이들은 결코 적지 않다. 온라인 팔씨름 커뮤니티 '그립보드' 회원은 2만여 명. 1년에 네 번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매번 선수 300여 명이 몰린다. 전국 곳곳에 자리 잡은 팔씨름 체육관에서도 많은 아마추어가 프로를 꿈꾸며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나 '팔씨름 프로'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대한팔씨름연맹이 주최하는 팔씨름 대회는 다섯 체급이 있고, 각 체급에는 하비(hobby·취미)―노비스(novice·초심자)―아마추어―세미프로―프로 등 다섯 단계가 있다. 선수들은 하비부터 시작해 각 단계에서 2회 이상 입상하거나 1회 우승해야 다음 단계에 출전할 수 있다. 대회마다 수백 명이 출전하지만, 20회가 넘는 대회 동안 프로 자격을 획득한 선수는 70여 명뿐이다. 한국 팔씨름 통합랭킹 7위 남우택(40) 선수는 "10년 전만 해도 체계적으로 훈련받는 선수가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는 노비스 단계에 출전하는 선수도 팔씨름 전문 체육관에서 2년 이상 훈련받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현재 연맹에 등록된 팔씨름 체육관은 전국에 12곳. 대부분 개장 5년이 안 된 신생 체육관이다. 최근에는 서울이나 부산, 대구 등 대도시는 물론 원주·청주·제주까지 체육관이 생겼다. 전·현직 프로 선수들이 운영하며 관원들은 오직 팔씨름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팔씨름에 가장 중요한 근육은 악력의 바탕이 되는 앞팔근육, 전완근이다. 팔씨름 선수들은 전완근을 중심으로 이두·삼두 등 팔근육을 부위별로 나눠 집중적으로 단련한다. 근육의 가동 범위를 좁혀 보디빌더들보다 최대 2배의 무게를 팔로 견딘다. 프로 선수 대부분의 상완 둘레는 40㎝가 넘는다. 하지만 팔심만으로 팔씨름의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팔을 지탱하는 등과 하체, 장기전을 버티게 하는 근지구력 운동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에 공격·방어 기술을 다양하게 익히고, 실전 같은 스파링을 반복해야 진정한 팔씨름꾼으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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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씨름 강자 4인방 오른쪽부터 배승민(36):대한팔씨름연맹(KAF)회장/프로팔씨름리그(PAL) 한국지부장/팔씨름 동호회 그립보드 운영자, 심재원(34):대한팔씨름연맹 사무국장/한국팔씨름랭킹 95kg 이상 부문 5위/2019 국제팔씨름대회 프리미어101 무제한급 4위, 남우택(40):국제팔씨름연맹(IFA) 시니어 레프리/한국팔씨름랭킹 95kg 이하 부문 2위/ 2019 국제팔씨름대회 프리미어101 105kg 이하 부문 3위, 오동표(28):대한팔씨름연맹 해설위원장/前 한국팔씨름랭킹 통합 부문 7위/前 학생부 대회 10관왕.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힘보다 기술, 패기보다 노련함"

프로 팔씨름 규칙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상대의 팔을 넘겨 상대 손등이 터치패드에 닿도록 하면 이긴다. 동네 팔씨름과 프로 팔씨름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힘에만 의존하느냐, 기술을 활용하느냐'다. 예를 들어 동네에서 대개 반칙으로 여기는 '팔목 꺾기'도 프로 세계에선 엄연한 기술로 대접받는다. 팔씨름의 대표적 기술은 크게 세 가지. 상대의 손목을 꺾으면서 몸에 체중을 실어 상대를 짓누르는 훅(hook), 손목을 바깥쪽으로 비틀면서 상대의 손을 순간적으로 잡아당기는 톱롤(toproll), 어깨를 이용해 팔에 체중을 실어 상대를 눌러 버리는 프레스(press)다. 여기서 파생되는 응용 기술과 각종 연계 동작을 활용하면 수십 가지 전략이 만들어진다. 오동표(28) 선수는 씨름에 빗댔다.


"이만기 장사 같은 씨름의 절대 고수는 기술을 걸기에 앞서 네댓 수를 봤다고 해요. 팔씨름도 비슷합니다. 내가 기술을 쓰면 상대가 어떻게 방어할지를 미리 예측하고, 맞춤 전략을 연구하죠. 그래서 팔씨름은 두뇌 싸움이기도 해요."


힘보다 기술이 중요하기 때문일까. 팔씨름 선수는 자신보다 몸집이 두 배 이상 큰 다른 종목 선수의 손을 가뿐히 넘긴다. 심재원(34) 대한팔씨름연맹 사무국장은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 남성은 아무리 체구가 좋아도 50㎏ 내외의 여성 팔씨름 선수를 이기기 어렵다. 대중도 왜소한 체구의 선수가 근육질 스트롱맨을 넘길 때 가장 환호한다"고 했다. 실제로 팔씨름판에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선수 생명이 긴 것도 팔씨름의 특징이다. 다른 프로 스포츠 선수 대부분은 20대 후반에 전성기가 끝나는 반면, 팔씨름 선수들은 대개 30대 중반 이후에 전성기를 맞는다. 심지어 60대가 넘어서도 현역으로 뛰는 선수도 있다. 1949년생인 캐나다 팔씨름 선수 조지 이자쿠이츠(Iszakouits)는 70세가 넘은 지금도 매번 세계대회 입상권에 든다. 배승민 회장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의 판단력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만큼 패기보다는 노련함이, (노화가 빠른) 근육보다는 인대와 힘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림픽 팔씨름을 볼 날이 올까

팔씨름은 최근 들어서야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18년 팔씨름을 다룬 영화 '챔피언'(관객 112만명)이 나온 뒤부터 백성열, 홍지승 등 유명 팔씨름 선수들의 경기, 그리고 선수들이 일반인 수백 명을 연속으로 넘기는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았다. 2016년 팔씨름 국가대표 선발전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250만 회나 조회됐다. 젊은 세대가 팔씨름에 관심을 가지면서 팔씨름 체육관을 찾는 일반인들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프로 스포츠로서 팔씨름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연맹 산하에 9개 프로팀이 있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스폰서가 없다. 프로팀에 소속된 선수들도 대회 상금(각 부문 1위 약 50만원) 외에는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 본업을 따로 가지는 경우가 많다.


남우택 선수는 "팔씨름을 '애들 놀이'쯤으로 치부하던 과거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말한다. "15년 전만 해도 팔씨름에 대한 이해가 없어 책상 하나 놓고 힘자랑하던 수준이었어요. 지금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고, 대중도 유튜브로 팔씨름 경기를 보며 환호하고 있지요. 시간이 더 흐르면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팔씨름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기자 같은 일반인이 단기간에 팔씨름 실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선수들은 "상대방 팔을 넘긴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당기는 힘을 함께 이용하라"고 입을 모았다.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팔을 내 왼쪽 가슴에 끌어온다는 상상을 하며 상대 팔을 넘겨보세요. 이렇게 조금만 연습하면 어지간한 상대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종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