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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야생초 천국, 억새군락… 마음의 평온 찾는 ‘평원 여행’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지금 딱 좋은 가을 평원


마음의 평정을 찾으러 간다, 평원으로. 굴곡지지 않은, 모나지 않은 광활한 평원에 서니 날 섰던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스크로 기억되는 무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의 색감으로 무르익어 가는 평원을 찾았다. 푸른 하늘 아래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때마다 평원을 쓰다듬고 온 바람이 온몸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듯하다. 여름에 바다라면, 가을엔 평원이다. 때마침 평원에선 갈대와 억새, 가을꽃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한국 맞아?’ 싶을 정도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국적인 평원을 직접 찾아가봤다.


◇‘한국의 세렝게티’ 수섬, 우음도


알만한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는 경기도 화성 송산면의 수섬 일대를 두른 평원엔 백색소음뿐이었다. 봄에 장관을 이룬다는 삘기, 여름을 장식했던 푸른 초원 대신 갈대와 억새, 제멋대로 자란 야생초가 맞이했다. 바이러스 방어용 마스크를 착용하고 짧은 호흡으로 연명한 지 10개월째. 막힘 없이 탁 트인 드넓은 평원을 마주하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야생의 거친 숨소리에 귀 기울이니 심호흡이 절로 됐다. 대자연의 스케일에 압도되는 것도 잠시, 어딘가 숨어 있던 까투리, 왜가리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수섬은 한때 서해의 조그만 섬이었다. 1994년 시흥시와 화성시를 잇는 시화호 간척 사업 후 육지와 수섬 사이의 넓은 갯벌이 초지로 바뀌면서 ‘평원 위의 섬’이 됐다. 한때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초지로 활용되기도 해 어렴풋이 방목지 풍경도 남아있다. 여행지로 개발된 곳이라기보다 관리⋅보호가 목적인 땅이다 보니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사진 동호인들은 우음도와 함께 일대를 ‘한국의 세렝게티’ ‘한국의 사바나’라 부르기도 한다.


홀로 찾기엔 어쩐지 고독할 것 같고, 서넛이 찾기엔 소란스러울 것 같은 풍경 때문일까. 드문드문 연인이나 친구, 모녀 사이로 보이는 ‘2인조’ 방문객들이 눈에 띈다. 이국적인 야생 풍경 때문에 드론 동호인들도 남몰래 즐겨 찾는다. 최근 인근 송산면 송산그린시티 개발 사업이 본격화하면 주변 풍경이 많이 바뀔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수섬의 풍경을 부지런히 담아두려는 사진 동호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중. 사람의 발길로 만들어진 ‘인공 진입로’가 몇 곳 있지만 찾기 어렵다. 일부 진입로는 아예 막혀 있다. 독지길 106번지로 이어지는 마을길 끄트머리로 가면 그나마 걸어볼 만한 길과 만난다. 수섬 일대는 보도 등 특수 목적을 제외하곤 드론 촬영 및 캠핑, 낚시 등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선일보

경기도 화성 우음도 송산그린시티전망대 부근 산책로에서 바라본 풍경.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송산면 우음도 내 자연생태공원인 ‘공룡알 화석지’(코로나 사태로 잠정 휴관)는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된 문화재보호 지역이라 원시 평원의 풍경이 간직된 곳이다. ‘송산그린시티전망대’(잠정 휴관)까지 평원을 곁에 두고 드라이브 스루 해볼 만하다. 지난달 28일 송산면 고정리에서 남양읍 문호리까지 총 5.07㎞ 구간의 동서 진입로를 조기 개통하면서 수섬과 우음도 접근이 한결 수월해졌다.


정비해놓은 ‘허락된 산책로’를 걸어보고 싶다면 송산그린시티전망대 초입 ‘환경 학교’ 산책로를 걸어볼 것. 입구에서 200m 지점에 있는 커다란 바위 전망대에선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업단지 조성으로 드문드문 공사 중인 커다란 건물이 시야를 방해하긴 해도 평원 너머 일몰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송산 그린시티 전망대나 수섬 주변엔 이렇다 할 맛집이나 편의 시설이 없다. 차로 20분 거리 송산면 ‘사강시장’ 주변에 그나마 식당이 모여 있다.



◇하늘 아래 억새 평원


단풍 물이 들기 전 고원에 은빛 융단이 깔린다. 억새 평원은 가을 산의 선물과도 같다.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등 영남의 일곱 산이 모여 있는 ‘영남 알프스’에서 올가을 가장 들썩이는 곳은 단연 간월재다. 코로나 사태 후 젊은 ‘산린이(산 타는 어린이의 준말로 등산 초보자)’들 사이에서 ‘핫플’로 떠올랐다. 고원 평지에 박공지붕 모양 ‘간월재 휴게소’와 ‘간월재 전망대’, 신불산으로 이어진 나무덱과 ‘하늘 계단’ 사진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달구고 있다.


코스가 다양해 선택에 따라 지옥과 천국을 오갈 수 있다. 백패커이자 산악인 인플루언서인 김기성씨 등 산악 전문가에게 ‘산린이들이 편안하게 오르는 간월재 코스’를 물었다. 이구동성 배내2공영주차장 부근 ‘사슴농장 출발 코스’와 등억온천단지 부근 ‘영남알프스 웰컴센터 출발 코스’를 추천했다. 사슴농장 코스는 진입로에 사슴농장이 있어서 붙여진 코스 이름. 왕복 12㎞ 정도로 영남 알프스의 관문이라 불리는 ‘간월재 휴게소’까지 1시간 30분 걸리는 임도(林道·임산도로)다. 포장과 비포장이 이어지는 임시도로 형태의 코스로, 등산이라기보다 트레킹에 가깝다. 코스가 길 뿐 위험 구간이 없어 어린 꼬마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도전하는 분위기다.


반면 영남알프스 웰컴센터 코스는 약간의 등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코스다. ‘편하게 걷는 게 낫겠다’ 싶어 사슴농장 코스를 택했다. 사슴농장 코스는 MTB(산악자전거) 코스로도 유명해 걷는 동안 MTB 수십대가 휙휙 지나갔다. 굽이진 임도를 따라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바람도 쉬어간다’는 간월재 휴게소에 다다른다.



신불산과 간월산 두 형제봉 사이에 가르마처럼 잘록한 간월 잿마루는 바람이 불 때마다 약 16만5000㎡(5만여 평) 억새 물결이 일렁였다. 해가 구름에 가려질 땐 스산한 분위기, 해가 들 땐 황금 물결을 뽐냈다. 억새 군락지로 진입은 금지다. 억새 군락지 사이로 나무덱 탐방로가 이어져 있어 산책하기 좋다. 관리 직원은 “올해는 연이은 태풍으로 억새가 예년 같지 못하다”면서도 “신불산으로 넘어가면 더욱 볼만한 억새 평원이 기다린다”고 설명했다. 등산객 중엔 KTX를 이용해 당일치기로 방문한 이도 많았다. 지난 6일 친구들과 간월재를 찾은 김호연(29)씨는 “아침 일찍 KTX, 버스를 이용해 당일 여행을 왔다. 울산역에 내려 시내버스 시간 잘 맞추니 영남알프스 웰컴센터 코스를 통해 간월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원점 회귀 코스를 이용하려면 영남알프스 웰컴센터를 출발, 도착지로 삼는 게 편하다. 자차 이용 시 사슴농장 코스는 ‘배내2공영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좀 더 쉽고 빠르게 억새 평원과 만나고 싶다면 경남 합천 황매산 군립공원 억새평원이 답이다. 해발 1113m 황매산 정상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황매산 군립공원 제1주차장이 있어 조금만 걸으면 황매산 정상에서 억새 평원을 감상할 수 있다. 봄에 철쭉으로 덮였던 황매산은 어느새 은빛 찬란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굳이 정상까지 올라가 내려다보지 않아도 정상으로 향하는 길 사이에 억새 군락지 진입로가 나 있다. 하늘 바로 아래서 평원을 감상하고 싶다면 산 정상으로 가파르게 난 ‘하늘 계단’까지 올라가 보자. 숨넘어간다는 ‘깔딱 고개’만큼 힘들지만, 계단에서 뒤돌아서면 아찔하면서도 황홀한 평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계단 산불감시초소에서 오르던 방향으로 2㎞ 직진하면 황매산 정상이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 알프스


경기도 이천 원적산은 영남알프스 축소판이라 해서 ‘경기 알프스’란 별칭을 얻었다. 가을 평원 여행지로 원적산을 추천한 신준범 월간 산 기자는 “원적산은 해발 634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원적봉에서 정상인 천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영남알프스와 묘하게 오버랩된다”고 했다. 서울 근교인 데다 최근 이천시가 ‘산수유 둘레길’을 정비하며 등산하기 한결 수월해졌다. 여기에 산린이와 백패커들 사이에서 ‘올가을 버킷리스트’로 뜨면서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여러 등산로 중 비교적 도전해볼 만하다는 ‘오름 1코스’인 ‘영원사 출발 코스’를 택했다. 이천시 백사면 영원사 등산로 입구에서 원적산 원적봉까지는 1.77㎞, 천덕봉까지는 2.34㎞였다. 가볍게 오를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으나 초입부터 극기 훈련 수준의 난코스들이 나타났다. 지난 장마에 부러진 통나무를 올라타고, 경사가 가파른 산길을 탔다. 영원사 갈림길까지 고작 0.57㎞ 올랐지만 이미 맥박은 요동치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초심자 코스라고 하기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사가 부담스러웠다. 슬슬 ‘얼마나 대단한 풍경이라고 이 고생을 하나’ 싶을 때쯤 하산하는 등산객들에게 “원적봉까지 어느 정도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3분의 1도 못 미쳤다”는 대답. 순간 포기하고 하산할지를 고민하다가 좀 더 가보기로 했다. 점점 말수도 줄어들었다. 출발한지 1시간 20분 남짓,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어 원적봉에 닿았다.




원적봉에서 바라본 풍경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간월재나 황매산 억새평원처럼 평원지대는 아니었지만, 천덕봉까지 오르는 능선 주변이 평평해 제주 오름의 풍광과 닮았다. 무엇보다 전망이 압권. 원적봉에 서니 이천 평야 황금벌판이 발아래 펼쳐졌다. 군락을 이룰 만큼은 아니지만 전망대 주변 가까이에 억새와 어우러져 마치 제주의 오름에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그간의 고행은 그새 까맣게 잊었다.


오후가 되니 백패커들이 하나 둘 천덕봉으로 향했다. 천덕봉까지 올라보겠다는 각오도 잠시. “해가 일찍 지니 하산 시간도 계산해야 한다”는 한 등산객의 말에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하산길도 마찬가지.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이미 다리는 후들후들, 잔뜩 긴장한 탓에 뒷목이 뻣뻣해졌지만, 누구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가을 평원의 풍경을 마음에 담고 다시 겨울을 이겨낼 채비를 하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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