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라이프 ]

보육원 출신들을 채용…칼 버리고 꽃을 품었습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변희원 기자의 한 點] 보육원 출신 고용하는 기업 ‘브라더스 키퍼’ 김성민 대표


조선일보

‘브라더스 키퍼’가 안양시 한 교회에 설치한 벽면 녹화 앞에서 화분을 내밀고 있는 김성민 대표. 회사 이름의 의미를 물었더니 “성경에서 ‘네 형제(아벨)가 어디 있냐’고 묻는 하나님에게 카인이 ‘제가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그 구절을 따서 브라더스 키퍼가 된 건데, 우리는 형제자매를 지킨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성민씨, 보육원 출신이야?”


김성민(35) 대표가 보육원을 나와서 6개월 동안 노숙하다가 구한 식당 일자리. 오전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하며 사장의 신뢰를 얻었을 무렵 경찰이 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사장에게 경북 안동의 한 보육원에서 컴퓨터를 전부 도둑맞았고, 이 보육원 출신의 원생 전원이 용의자가 됐으니 김성민씨도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전화를 끊은 사장은 “보육원 출신인 걸 왜 숨겼냐”고 화를 냈다. 김씨는 “안 물어봐서 말을 안 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 뒤로 사장과 다른 직원들 태도가 싸늘해졌다. 결국 일한 지 1년 만에 그만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말 안 했어도 저에게 그렇게 화를 냈을까요. 제가 잘못해서 보육원에 간 것도 아닌데 그걸 말 안 한 게 왜 잘못인지 이해가 안 갔어요.”


김 대표가 2018년 차린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 키퍼’는 임직원 아홉 명 중 두 명을 제외하고 전부 보육원 출신이다. 만 18세가 되면 아무 연고도 없이 세상에 나온 뒤 ‘보육원 출신’이란 꼬리표 때문에 자립을 못하는 이들을 고용하기 위해 차린 회사다. 벽에 식물을 심어 가꾸는 실내 조경을 한다. 요즘은 벽면 녹화, 수직 정원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안양시의 스타트업 공유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보육원 출신이란 건 취직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결혼 등 어디서나 마이너스 요소다. 우리회사만큼은 보육원 출신을 우대하기로 했다”고 했다.


“저는 88년도쯤 안동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앞에서 발견됐대요. 당시 경찰 기록에 보면 진한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고, ‘세 살로 추정’이라고 나와있어요. 그래서 1985년생이 됐죠. 성(姓)은 원장 선생님을 따랐고요.”


–보육원 출신이란 걸 어렸을 때부터 숨겼나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진 제가 고아인 줄도 몰랐어요. 입학식 날 다들 혼자서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 손을 잡고 등교하는데 저희는 여러 명이서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갔으니 그때 알았어요. 한번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정 조사를 하는데 ‘엄마 없는 사람 왼손 들어, 아빠 없는 사람 오른손 들어’라고 했어요. 저는 양손을 다 들고 있었죠.”


–학교에서 고아라는 게 밝혀지면 어떤 불이익을 당하나요.


“반에서 뭐라도 없어지면 애들뿐 아니라 선생님까지 저나 다른 보육원 친구부터 쳐다봤어요. 한번은 친구네 집 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성민이는 집에 데려오지 말고 학교에서도 같이 놀지 마’ 하는 걸 들었죠.”


–학교에서 괴롭힘도 많이 당했나요.



조선일보

벽면 녹화 작업을 하고 있는 김성민 대표와 직원들. / 브라더스 키퍼

“초등학교 때까진 놀림을 받지만 중학교만 가도 저흴 못 건드려요, 무섭다는 걸 알거든요. 보육원엔 원생 80명에 교사 두 명이 있습니다. 그 안의 위계와 질서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이와 폭력으로 정해요.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궁핍한 아이들이 모여있는데 그 안에서 좋은 게 나올 수가 없죠. 폭력이 일상이고 문화였어요.”


–조용히 차분하게 말하는 말투와 깍듯한 태도를 보면 폭력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상처가 있는 손등을 내보이며) 제 손 보세요.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우다가 누군가의 뼈가 부러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어요. 보육원 안에서 그런 건 별거 아니니까요. 그땐 욕 없으면 말이 안 나왔고, 모든 일은 주먹으로 해결했어요. 제 인상이 너무 사나워서 학교에선 애들이 저를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속에 화가 많았겠습니다.


“다들 그랬어요. 맨날 맞고 배고프니까요. 중학교 땐 주방용 칼을 가방에 넣어 갖고 다녔어요.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부모님을 만나면 복수하려고요.”


–요새도 보육원에 있는 아이가 많을까요.


“제가 어렸을 땐 저처럼 부모를 모르는 채 버려진 아이가 대부분이었어요. 한 80%정도? 지금은 그 비율이 역전됐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다 없는 아이가 20%이고, 나머진 부모가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간 경우죠. 학대나 방임을 해서 격리를 당했거나. 또 보육원은 줄고 ‘그룹홈’(관리인 한 명과 아이 너덧 명을 모아 가족처럼 살도록 한 제도)이란 게 늘었어요. 이런 변화는 있지만 아이들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어요. 아이러니하죠. 출산율은 줄었는데, 버림받은 아이는 많아졌네요.”


김성민 대표는 만 18세가 된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도 못 하고, 취업도 못 한 채 보육원을 나섰다. 옷가지 몇 점만 가방에 들어있었고, 수중에는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는 “차비 한 푼 안 주고 날 내보냈다. 막막하단 말 말고 그 당시 감정을 설명할 게 없다”고 했다. 그는 보육원 선배 몇 명에게 전화해서 돈 5만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무작정에 서울에 갔다.


–서울에 가서는 뭘 했나요.


“6개월간 노숙했어요. 길거리나 화장실에서 자고, 쓰레기통 뒤져서 먹고요. 어렸을 때는 보육원을 나간 남자 선배들이 감옥에 가고, 여자 선배들이 성매매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런 어린 시절을 버틴 사람들이 왜 제대로 못 살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나와보니 이해가 갔어요. 그 나이에 노숙을 하면 범죄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저는 노숙 6개월 만에 서울의 한 식당에서 재워주고 먹여주는 일자리를 구했어요.”


–요새는 자립 정착 지원금과 디딤씨앗통장 같은 게 있습니다. 보육원을 나가면서 적게는 500만원, 많게는 1000만원을 받던데요.


“저희 때도 자립 정착 지원금이 있었는데, 그걸 못 받는 사람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인천아시안게임이 열린 해 인천 지역 보육원을 나온 아이들은 그 돈을 못 받았어요. 예산이 부족하면 그런 지원금부터 삭감하거든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항의를 못 하니까요. 저도 그런 경우죠. 그걸 받아도 제대로 자립하긴 어려워요.”


–돈이 적어서 그런가요.


“안 그래도 돈도 없고 무시당하던 아이들이 과시적인 소비를 하거나 허세를 부리게 됩니다. 주변에 술을 사주거나 오토바이, 명품을 사면서 그 돈을 금방 탕진해요. 더 큰 문제는 아이가 돈을 받았다는 걸 알고 어디선가 나타나는 부모입니다. ‘그 돈을 주면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하죠.”


–자기를 버린 부모한테 돈을 순순히 주나요?


“다들 부모와 살고 싶은 마음에 돈을 내놓죠. 부모는 돈만 받고 사라지기도 하고, 돈을 받아서 같이 살다가 돈 떨어지면 아이를 내쫓기도 해요.”


첫 직장이었던 식당에서 요리를 배운 뒤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굶을 걱정을 덜자 그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가족이 돼주고 싶었다. 김 대표는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가족을 갖고 싶단 욕구가 가족이 돼주고 싶다는 욕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방 일을 하면서 보육원 아이들을 도울 방법은 많지 않아 보여서 대학 공부를 한 뒤, 다른 직업을 갖기로 했다. 김 대표가 스물두 살에 대입 준비를 하고자 지내던 보육원에 갔을 때 NGO에서 나온 외국인 선교사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보육원에서 일주일간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부모 노릇을 해줬다. 김 대표는 이 NGO에서 일하다가 스물여섯 살에 김천대 사회복지선교학과에 들어갔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계속 NGO 활동을 했다.


–NGO 활동을 오래 한 이유가 있나요.



조선일보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 키퍼’의 김성민 대표와 직원들. / 브라더스 키퍼

“어렸을 때의 기억과 사회 경험 때문에 보육원 출신이란 걸 숨기고 살았어요. 그건 언제나 상처였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해준 건 보육원 아이들이었어요. 제가 보육원에 가면 아이들은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제 주위에 몰려들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제가 멋있대요. 아이들은 제가 보육원 출신이란 걸 알고 있거든요. 보육원 출신은 다 전과자가 되는 줄로만 알고 있는데, 자기들을 도우러 오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게 좋고 멋진 거죠. 아이들이 절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나도 사랑받는구나, 나도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보육원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가 보육원 출신이란 걸 안 숨기게 됐습니다.”


–그럼 왜 그만뒀나요.


“후원만으로 이들을 도울 수 없단 걸 알았어요. 보육원에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한 걸 후원할 땐 아이들이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후원이 없어지면 문제가 다시 생겨요. 후원보단 자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보육원을 나온 친구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제가 다니던 교회의 다른 신도에게 일자리를 부탁했고, 사업가들을 찾아다니며 알음알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땐 제가 전도사를 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렸죠.”


–일자리가 생기면 자립에 성공하나요.


“일자리를 구해줘도 다들 금방 그만뒀어요. 가장 오래 버틴 게 3개월이더군요. 원인을 찾기 위해 이 친구들과 이 친구들을 고용한 사장님을 다 만나봤어요. 직장 동료들이 잘해주면 보육원 출신이라서 동정한다고, 일하다가 혼나면 보육원 출신이라서 무시한다고 생각해요.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심해서 사회생활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또 보육원에서 거짓말을 하던 버릇을 못 버리는 경우도 있고요. 보육원에선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생존술의 하나였거든요.”


–그래서 아예 회사를 차린 건가요.


“벽면 녹화를 하는 한 회사에서 일할 사람 두 명이 필요하대서 보육원 출신 두 명을 소개해 줬어요. 한 명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한 명은 6개월간 회사를 잘 다니는 거예요. 그 친구한테 이유를 물어보니까 매일 식물을 대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됐대요. 식물을 키워보면 처음에는 다들 한 번씩 죽여요. 사랑을 주고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죠. 그 친구도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주면서 자신을 치유한 거예요. 마침 그 회사 사장님이 벽면 녹화 기술을 공짜로 전수해줄 테니 사업을 해보라고 제안해서 바로 받아들였습니다. 2018년 5월에 저와 다른 보육원 출신 두 명이서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왜 브라더스 키퍼인가요. 직원이 다 남자입니까.


“성경에서 ‘네 형제(아벨)가 어디 있냐’고 묻는 하나님께 카인이 ‘제가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 구절을 따서 브라더스 키퍼가 된 건데, 저희는 형제 자매를 지킨다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직원 아홉 명 중 제 아내를 빼고는 다 남자예요. 보육원 출신 여성을 많이 뽑고 싶었는데, 아직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자리는 여성에게 더 필요한데 이들은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렵죠. 보육원 출신 여성들은 성매매를 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이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가 또 보육원에 가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회사는 자리를 잡았나요.


“지금까지 안양시청, 서울시청, 이니스프리(화장품 브랜드) 매장 등에 시공했어요. 올해 매출이 다 합쳐서 12억원입니다. 2년 된 회사 치곤 괜찮은 편이에요. 직원들 월급을 다 주고 있고, 직원들이 보육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비용도 다 지원할 정도는 됩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공사가 중단이 되는 바람에 5월쯤엔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 좀 회복했어요.”


–브라더스 키퍼 직원들은 다 자립한 건가요.


“자립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일어선다는 겁니다. 저한테 자립의 의미는 달라요. 식물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산이나 들에서 나무를 관찰할 일이 많아져요. 처음에는 나무가 혼자서 잘 자란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보다 보면 나무도 땅에, 물에, 바람에 기대서 살고 있어요. 또 다른 생물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죠. 저는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생기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게 자립이라고 생각해요. 브라더스 키퍼의 직원들은 보육원 후배와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을 후원하고 있어요. 남에게 도움을 받았고, 남을 도와주고 있으니까 자립을 한 거죠.”


–앞으로 다른 목표가 있나요.


“사회적 기업은 장애인이나 탈북자 등 취약 계층을 일정 비율 고용해야 해요. 회사를 차리면서 알아보니 보호 종결 아동(보육원을 나온 원생)이 사회적 기업 관련법에서 취약 계층에 포함이 안 됐어요. 그래서 국회도 찾아가고 청원을 해서 법을 바꾸긴 바꿨는데, 보호 종결 이후 5년 동안만 취약 계층이 됐어요. 5년으론 자립이 힘들어요. 군대나 대학을 다녀오면 이 시기가 지나가거든요. 청년법에서 34세까지 청년으로 보고 있어서 이 시기까지 취약 계층으로 인정을 받게 하려고요.”


브라더스 키퍼에서는 이름이나 직위 대신 식물 이름으로 호칭한다. ‘님’ 자도 붙이지 않는다. 이곳은 위계 질서가 분명한 보육원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김 대표의 식물 이름은 꽃 ‘바비아나’. 꽃말이 ‘단란한 가정’이다.


–가족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스물일곱 살에 결혼했어요. 아내가 저를 처음 집에 인사시키려고 할 때 장모님께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데려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딸이 있더라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보육원 출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요.”


–일찍 결혼했네요.


“네. 보육원 출신은 연애하기가 쉽지 않아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또 버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 크거든요. 저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애할 기회가 있었지만 계속 피하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연애한 상대가 지금의 아내입니다.”


–결혼식은 어떻게 치렀나요?


“학교 체육관을 빌려서 보육원 네 군데 아이들을 다 불렀어요. 체육관이 꽉 찰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고, 밥값이 많이 나와서 저희는 신혼여행도 못 갔어요. 그 아이들에게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저는 결혼식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우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요. 저 이렇게 잘 커서 장가를 간다고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울고, 나란히 앉아 계신 장인·장모님을 보자마자 ‘나는 아버지, 어머니 중 누굴 닮았을지’ 궁금해져서 또 울었죠. 결혼한 날만큼 부모님이 보고 싶었던 날이 없어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아직도 보고 싶으세요.


“주변에선 부모를 찾지 말라고들 해요. 부모를 찾은 보육원 출신들을 보면, 이 친구들이 부모를 부양하고 도와야 할 정도로 부모 상황이 열악하거든요. 그래도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그런 거 계산 안 하고 일단 찾고 싶죠. 저는 경찰에 DNA를 등록했기 때문에 부모님만 DNA를 등록하면 바로 찾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대상자를 못 찾았다는 건 부모님이 등록을 안 했단 얘기겠죠? 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면 눈길을 돌리지 않고 같이 쳐다봐요. ‘부모는 어릴 때 헤어진 자식도 커서 다 알아본다던데 혹시 저분이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라서 날 쳐다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부모님이 저를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저를 찾아서 알아보실 거라고.”


[변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