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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양조장, 미술관, 호텔로… 잠자던 폐교 코로나가 깨웠다

by조선일보

코로나 속 뜨는 ‘폐교 여행’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해 학교 운동장을 잠정 폐쇄합니다.’ 시끌벅적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던 교문이 한동안 닫혀 있었다. 아침이면 등교 대신 영상 앱 ‘줌’을 켜 화상 수업을 하고 등교 땐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짝꿍도 없이 띄엄띄엄 앉는다. 급식 먹는 재미도, 수학여행도, 입학·졸업식도 사라진 2020년의 학교. 문득 학교가 그리워진다. 교실의 소음들이, 삐걱거리던 마룻바닥이, 멍하니 바라보던 운동장이. 폐교였다가 레스토랑, 캠핑장, 미술관, 숙박 시설, 양조장으로 ‘개교’한 폐교를 찾아갔다. 외진 곳에 자리한 시골 분교일수록 거리 두기 여행이 가능하다.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는 세대공감 학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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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말 문 연 춘천 오월리의 '오월학교'는 지암국민학교 가덕분교장 폐교를 고쳐 '웰컴 키즈'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폐교’ 옷 벗고 감성 쉼터로

춘천호가 깊숙하게 흘러들어 간 강원도 춘천시 오월리 좁다란 마을 길로 차들이 연일 줄을 잇는다. 차들의 종착지는 지난 10월 말 카페와 레스토랑, 숙박, 목공 체험장을 갖추고 문을 연 오월학교다. 붉은색 박공지붕에 미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오월학교 입구 표석엔 ‘지암국교 가덕분교장 개교일 1969, 폐교일 1982 춘성군교육청’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의 오월학교는 지암국민학교 가덕분교장이 있던 자리다. 폐교 후 춘천중앙교회 소유 성경학교로 운영되다가 다시 한동안 방치돼 왔다. 온기가 사라진 학교를 가구 브랜드 ‘비플러스엠’이 인수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이곳 최상희 대표는 “학교는 모든 세대가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특히 아빠와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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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당을 연상케하는 춘천 '오월학교' 카페. 폐교의 마룻바닥을 뜯어 재가공해 벽면을 꾸몄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학교’라는 공간 특성상 남녀노소 두루 찾는다. 커플 방문객뿐 아니라 모녀, 자녀 동반 가족, 동창생으로 보이는 중년 그룹도 눈에 띄었다. 운동장에서 추억의 ‘얼음 땡’ 놀이를 하던 이시연(13)·시우(10) 남매의 어머니 김정은(40)씨는 “코로나 사태 후 학교 운동장에선 뛰놀지도 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폐교 카페에 와서 뛰놀고 있다”며 웃었다.


커다란 운동장을 앞에 두고 본관엔 카페와 스테이, 스테이 전용 라운지가 자리 잡았다. 교실 마룻바닥을 뜯어 재가공해 벽면의 일부를 두르고, 목조 트러스 구조를 그대로 살려 학교의 생명을 연장했다. 모든 공간은 비플러스엠이 만든 가구로 채웠다. 오픈 첫 주 본관 카페와 별관 레스토랑 실내 석은 이미 만석. 일찌감치 실내 석을 포기한 이들은 음료를 받아 나와 운동장 여기저기에 앉아 담소를 즐긴다.


소강당이 연상되는 카페는 ‘운멍(운동장 보며 멍 때리기)’ 하기 좋은 창가 자리가 먼저 찬다. 멍 때려도 잔소리할 선생님은 없다.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생오렌지를 갈아 만든 ‘참새라떼’(7000원)가 이색적이다. 마들렌, 휘낭시에, 파운드 케이크로 구성된 디저트 세트 ‘참새 모이 세트’(8500원)를 곁들이기 좋다. 전문 파티시에가 프랑스 초콜릿과 버터, 유기농 밀가루, 무항생제 달걀 등을 사용해 직접 굽는다고. 일본 영화 ‘카모메식당’을 연상케 하는 별관 레스토랑에선 대창 덮밥(1만2000원), 가츠 산도(1만원), 명란 카르보나라(1만2000원) 등을 맛볼 수 있다. 레스토랑 뒤편 공방에선 목공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전 객실 ‘숲 뷰(view)’ ‘운동장 뷰’인 스테이는 11월 중순부터 숙박 큐레이팅 및 예약 사이트 ‘스테이폴리오’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충북 보은의 어라운드빌리지는 탄부초등학교 사직분교였던 폐교를 5년 전 감성 매거진 ‘어라운드’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용도 변경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교정을 둘러볼 수 있다. 너른 운동장에선 피크닉과 캠핑을, 게스트하우스로 꾸민 교실에선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자유 관람 외 모두 유료). 카페, 글램핑장도 갖췄다. 분위기 하나로 일찌감치 캠핑 동호인들 사이에선 ‘5성급 캠핑장’으로 통하는 곳이다. 그동안 주말만 운영해오다 최근 찾는 이들이 늘면서 평일(목·금)에도 운영한다. 이곳 매니저는 “코로나 사태 이후 캠핑뿐 아니라 일반 관람도 많이 늘었다”며 “학교의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는 이들이 주로 찾는다”고 했다.


하얀색 건물 외관부터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곳곳이 포토존이라 20~30대 젊은 층과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많이 찾는다. 실내화를 신고 좌측 통행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마룻바닥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 카페가 나온다. 커피와 차를 즐기거나 자체 제작 제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카페는 캠핑, 글램핑에 필요한 장비를 대여하거나 살 수 있는 매점, 종합 안내소 역할을 겸한다.

맛집으로 소문

6·25 때 군인들을 치료하는 병원, 이후 전쟁 고아와 기지촌의 혼혈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였다가 이제는 맛집으로 유명해진 곳도 있다. 인천 청천동 힐록은 옛 금성기술전문학교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일대 청천1동 재개발 공사로 다소 어수선한 입구를 지나 산비탈을 오르면 빨간 벽돌의 단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기뻐할 힐(欯), 산기슭 록(麓)을 써 ‘기쁨이 있는 산기슭’이라는 뜻을 담았다. 이름처럼 장수산 자락, 숲속에 숨은 산장 같다. 능소화가 피고 청포도가 열리던 계절을 지나 마당엔 단풍이 폭신하게 내려앉았다. 어디에 앉든 유리창 너머 전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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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 '힐록'의 명태무침덮밥. / 박근희 기자

대표 정시운(70)씨 가족이 가정집으로 사용하다 레스토랑으로 꾸며 3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피자, 파스타 등 이탈리안 메뉴 외 명태무침덮밥(1만2000원)은 주문진에서 직송한 명태를 빨갛게 양념해 밥에 올려내는 이색 메뉴다. 매콤새콤하면서 명태 향이 살아있다.


이따금 작은 결혼식이나 단체 행사용으로 빌려주기도 한다. 미리 예약하면 바비큐 메뉴(1인 2만5000원, 4인 이상)도 즐길 수 있다. 반려동물도 동반 가능하다. 단, 내부에선 반려동물 유모차나 케이지에 태우고, 야외 테라스나 마당 좌석을 이용할 경우 목줄을 사용해야 한다. 마당에선 이 집 마스코트인 올드 잉글리시 시프도그 ‘릴리’가 먼저 반긴다. 어머니 정씨를 도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형묵(31)씨는 “이따금 이곳 졸업생이라며 일부러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다”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라 이곳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전남 곡성 미실란 밥카페 飯하다에선 건강식을 맛볼 수 있다. 발아 현미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에서 유기농 오색 발아 현미를 활용한 건강 밥상을 선보인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어촌공사가 농촌 여행 코스로 선정한 농가 맛집이다. 곡성동초등학교 폐교 건물은 미실란의 사무실, 전시관 및 오색 발아 현미 체험관 겸 식당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기농 오색 발아 현미밥에 채식 밥상인 ‘발아오색낭만세트’(1만5000원, 2인 이상)가 베스트셀러다. 토란영양덮밥(1만2000원), 삼색궁중 떡볶이(1만5000원) 등 ‘식약동원(食藥同源·음식과 약은 근본적으로 같다)’ 철학이 담긴 건강 메뉴를 선보인다. 섬진강 들녘을 바라보며 차도 즐길 수 있다.

‘명불허전’ 레트로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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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 '웃다리문화촌'은 금각국민학교 폐교를 2006년 문화예술체험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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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 '웃다리문화촌'의 전시실. 옛날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해 놓았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복도를 지나 오래된 풍금을 치는 시늉을 하며 사진 찍는다. ’10월 20일 오후 5시 일시에 쥐를 잡자'라는 포스터를 보곤 웃음이 터진다. 옛 풍경을 간직한 폐교는 남녀노소가 즐겁다. 경기도 평택 웃다리문화촌은 1945년 개교했다가 폐교된 금각국민학교를 2006년 문화예술체험장으로 개관 후 운영해오고 있다. 전시실에선 추억의 학교를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 평택 지역에서 사용한 물품과 금각국민학교 시절 학교 종과 문패, 교과서, 상장, 책가방 등과 각종 소품으로 옛 교실 풍경을 재현했다. 각종 체험도 진행한다. 개인 관람객은 화~일요일 도예(재료비 포함 1만~1만5000원), 금·토요일 금속가죽공예(재료비 포함 9000~1만5000원) 등을 체험해볼 수 있다. 일반 관람은 출입명부 작성 후 자유 관람 가능하다. 웃다리문화촌 직원 최희련(30)씨는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주말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차로 10~15분 거리에 미군부대, 평택중앙시장, 송탄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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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림읍 '명월국민학교'는 제주 서부 여행 코스로 꼽힌다. / 박근희 기자

제주 한림읍 폐교 카페 명월국민학교는 제주 서부 여행 인기 코스로 꼽힌다. 옛 교실은 ‘커피반’ ‘소품반’ ‘갤러리반’ 등으로 변신했다. ‘구멍가게’에선 떡볶이와 어묵 등 분식류도 맛볼 수 있다. 교실 좌석 창문으론 운동장이, 복도 좌석 창문으론 학교 뒤뜰, 멀리 금능, 협재 바다와 비양도까지 보인다. 명월리 마을회 소속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입장료가 따로 없는 대신 성인 1인 1주문을 원칙으로 한다. 지난해 9월 애월읍 옛 어음분교장에 문 연 어음분교 1963은 어음2리 주민들이 마을공동사업으로 운영하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다. 기념 촬영용으로 교련복, 교복 등을 갖췄다. 아기자기한 교정에서 커피와 디저트, 우동(주말 한정) 등을 맛볼 수 있다.

SNS 성지 된 미술관, '내일로’ 코스 된 양조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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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 '아미미술관'. / 박근희 기자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에선 폐교 캠핑장과 함께 폐교 미술관과 박물관이 특히 인기다. 각 여행지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여행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강원도 평창에 평창무이예술관이 있다면 충남 당진엔 아미미술관이 있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지난달 29일부터 새로운 전시 ‘그림+책 전’(~2021년 3월 31일)이 시작돼 관람객이 이어진다. 전시 교체 후 사실상 첫 주말인 8일 매표소 앞은 코로나 사태 후 오랜만에 줄 서는 풍경도 연출됐다. 관람객들은 1993년 유동초등학교 폐교 건물을 미술관으로 되살린 소박한 교정을 거닐고 담쟁이로 덮인 학교 담벼락에서 사진을 찍는다. 중학생 자녀와 동행한 김진아(42)씨는 “우리 세대 추억은 학교를 빼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올해는 수업 후 바로 하교하니 학교 이야깃거리도 줄어드는 것 같다”며 “잠시나마 폐교 미술관을 찾아 추억에 잠겨 좋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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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을 맞은 충남 당진 '아미미술관'. 복도에 설치 미술 작품은 포토존이 됐다. /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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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수지미술관'의 운동장은 야외 전시장으로 활용한다. / 수지미술관

전북 남원 수지미술관은 문 연 지 6년째를 맞고 있지만 거리 두기 여행이 뜨면서 조용히 소문이 퍼지고 있다. 옛 수지남초등학교 운동장에선 설치 미술 작품을, 전시실에선 회화 작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연 4회 이상 기획전을 개최한다. 현재 기획 초대전 ‘자연으로부터, 지리산 그리고 섬진강’(~2021년 1월 31일)이 열리고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3인의 작가가 독창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는 22일에는 소규모 ‘작가와의 만남’도 개최할 예정이다. 자연 채광이 잘되는 본관 전시실과 함께 목조 트러스 구조를 살린 별관도 둘러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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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양조장 '청산녹수'는 장성북초등학교 건물을 전통주 양조장으로 개조했다. / 청산녹수

학교 운동장에 술독이? 양조장으로 변신한 폐교는 특별하다. 전남 장성 청산녹수는 장성북초등학교 폐교였다가 10년간 기숙학원으로 운영된 곳을 2009년 전통주 양조장 겸 체험장으로 만들었다. 전화 예약 후 견학할 수 있다. 기차 여행 ‘내일로’ 추천 코스로 대학생들이 많이 다녀갔다. 주현목(43) 청산녹수 관리부장은 “식품 공장이다 보니 견학과 공장의 생산 공간을 분리해야 해 폐교에 꾸미게 됐다”고 했다. 교실은 공장으로, 복도는 견학로로 활용한다. 10인 이하일 경우 무료 견학 가능하며 10인 이상일 경우 1인 견학료 1만원을 내면 편백숲 산소 막걸리 등 청산녹수에서 만드는 주류를 시음해볼 수 있다. 술 거르기와 술 빚기 체험은 코로나 예방을 위해 잠시 중단한 상태다.


[박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