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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75%가 실종된 5만원권… 시대가 불안해서? 세금 피하려 쟁여놓기?

by조선일보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 5만원권의 경제학

조선일보

‘5만원권 지급 불가.’ 요즘 은행 지점이나 현금 입출금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안내문입니다. 5만원권이 발행된 2009년 6월 이래 올해처럼 품귀 현상이 심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2020년 10월 말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5만원권의 규모는 121조8000억원입니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으면 그 돈을 시중은행에 보내고 은행은 이를 기업과 가계에 대출이란 형태로 다시 전달합니다. 5만원권은 2009년 6월 이후 235조원이 발행되었는데, 이 중 113조원은 한국은행으로 다시 환수됐지만 그 나머지가 시중에 남아 있는 셈입니다. 5만원권이 나오고 나서 시중에 유통되는 돈은 전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5만원권이 없었을 때는 화폐유통액이 GDP의 3%에 못 미쳤는데, 지금 이 비율은 약 6%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5만원권 발행액 및 유통중인 돈

5만원권은 이처럼 시중에 꽤 많이 풀려 있고, 그래서 그동안 5만원권이 모자라 문제가 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갑자기 5만원권을 찾을 길이 어려워졌다니, 뭔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시사합니다. 단순히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생각하면, 5만원권을 많이 써서 그런가 싶지만 이는 일반적인 상식과 어긋납니다. 신용카드는 물론 각종 페이로 대변되는 스마트폰 전자 결제가 점점 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코로나로 대면 결제가 많이 줄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현금 수요가 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최근의 5만원권에 대한 수요 증대 뒤엔 좀 다른 힘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생활필수품이나 금(金)을 사모았듯이 현금을 확보한 이들이 늘었을 수 있습니다. 예금 금리가 너무 낮아져 돈을 은행에 넣어둘 유인이 사라진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이전엔 적은 이자라도 받으려고 일단 돈이 생기면 통장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어쩌다 현금을 받아도 그냥 지갑 속에 넣어둔다는 것이지요. 상속·증여세 등을 피하기 위해 5만원권을 금고에 쌓아놓는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공급 측면에서 보면 올해 코로나 탓에 음식·숙박업 등 현금을 많이 쓰던 대면 상거래 활동이 크게 위축된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업장은 그동안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을 회수해 돌게 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실제로 통상 절반정도 회수되던 5만원권이 금년에는 25%밖에 회수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또 결혼식·장례식이 줄어 축의금·부의금이 덜했던 것도, 5만원권의 유통과 회수를 더디게 했을 수 있습니다.


현금은 돌지 않고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으면 경제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개인 및 기업이 예금을 하면 그 돈은 소비나 투자를 위한 대출 재원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현금으로 장롱에서 잠자고 있을 땐 아무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계란(자금)이 부화기(금융기관)에 들어가면 병아리로 탈바꿈할 수 있지만 냉장고(장롱)에 들어가면 더 이상의 변환은 어려워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유통되어야 의미가 있지, 돌지 않으면 썩을 위험이 큽니다.


[성상경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