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합격증을 받았을 때 나는 경비원이었습니다”

[라이프]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28년 고시 생활

‘늦깎이 변호사’ 권진성


비번(非番)이었다.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서 잠깐 쉬고 있었다. 오후 느지막이 시내나 들러볼 참이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형님! 합격자 명단에 형님 이름이 있어요!” 친한 변호사 후배가 들떠 전화를 했다. 고시를 시작한 지 28년 만에 받은 합격 통보. 믿기 어려웠다. 떨리는 손을 붙잡고 9차 변호사 시험 합격자 명단을 찾았다. ‘수험번호 12286, 권진성’. 이름 석 자가 선명했다. 지난 4월 24일, 아파트 경비원 권진성(54)은 그렇게 변호사가 됐다.


본격적으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부산지법 앞 사무실에서 ‘새내기 변호사’ 권씨를 만났다. 손은 주름투성이에 머리도 희끗희끗했다. “양복 입고 출근하는 게 영 어색하네요.” 수습 중이라는 권씨가 수줍게 웃었다.


◇”어머니와 한 약속, 드디어 이뤘다”


-28년 만의 합격. 그 순간이 오니 어떻던가요.


“막상 합격하니 눈물은 안 나고 그저 얼떨떨했어요(웃음). 믿기지 않아 합격자 명단에서 몇 번이나 이름을 확인하고선 어머니께 전화 드렸어요. ‘잘했다, 내 새끼. 될 줄 알았다’ 하시더라고요.”


전남 곡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게 된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경상도를 떠돌았다. 초등학교 때만 여섯 번 전학을 다녔다. 그러다 친가가 있는 부산에 정착했다. 어머니는 월셋집에서 하숙을 쳤고, 권씨는 1984년 동아대 법대에 입학했다. 김도읍 국민의힘 국회의원과 동기다.


-왜 법대에 갔습니까.


“어릴 때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전학을 많이 다녀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 선생님한테 의지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부산교대에 갈 성적이 안 됐어요. 고민하던 차에, 친형이 어디서 구했는지 ‘고시 합격 수기’를 건넸어요. 하나하나 감동이더군요. 그때 결심했죠. 나도 고시에 붙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께 고시에 꼭 합격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36년 만에 지켰군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제가 고시를 안 했겠죠(웃음). 1992년 처음 행정고시 준비를 시작하고 2년 만에 1차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2차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느낌이 좋았어요. 척 붙을 줄로만 알고 시험 직후 아내와 신혼여행을 다녀왔죠. 그런데 불합격이었어요. 3년 후 다시 1차 시험에 붙고 ‘이번에는 정말 합격이다’라는 생각에 딸을 낳았는데, 또 2차에서 떨어져 버렸어요. 행시와 사시를 합쳐 1차 시험만 여섯 번 붙고, 2차 시험에선 열두 번 떨어졌어요.”


-공부를 게을리한 건 아닐까요.


“동아대 기숙 고시반 이름이 ‘지독료’입니다. 말 그대로 ‘지독하게 공부하라’는 뜻이죠. 거기서 ‘왕고’ 생활을 10년 넘게 했어요. 법전을 하도 오래 보다 보니 매일 잠꼬대로 법전을 외웠나봐요. 옆방 학생이 ‘저 형 미친 것 같다’고 교수님께 일러바친 적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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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이 거듭되니 심적으로 힘든 날도 많았을 텐데요.


“그래서 매일 산을 탔습니다. 등산한 게 아니고, 두 시간 정도 미친 듯이 뛰어다녔죠. 육체가 괴로우면 잠시나마 정신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고시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던데, ‘난 고시할 운이 아닌가 보다’ 생각한 적은 없나요.


“해마다 선택의 순간을 맞았어요. 1차 합격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더 고민됐죠.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마다 ‘고시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자’는 생각과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충돌했어요. 결국 제 대답은 늘 같았어요. ‘될 때까지 한다’. 그런데 쉰 살이 넘어가면서 ‘세상에 할 수 없는 일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감을 잃은 건가요?


“체력 한계를 느꼈습니다. 허리가 안 좋아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 어려웠어요. 집중도 잘 안 되고요. 그래서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진학을 택한 거예요.”


◇낮엔 로스쿨생, 밤엔 경비원


2015년 동아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같은 학교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31년 만이었다. 권씨는 “경비 일을 한 덕”이라고 했다.


-경비 일 덕이라고요?


“제가 법대 옆 건물에서 경비를 섰는데, 그 건물에 헬스장이 있었어요. 거기 다니는 법대 후배가 ‘형님, 저 로스쿨 갔어요’ 하더라고요. 로스쿨이 생겼다는 얘기만 들었지 어떤 곳인지는 몰랐던 때였어요. 후배한테 자세히 들어보니 고시 공부를 오래 했던 저 같은 사람한테는 수월한 길 같더군요. 그래서 지원했죠.” 낮에는 로스쿨 건물에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옆 건물 경비를 섰다.


-경비 일은 언제부터 했나요.


“10년 전부터요. 그전엔 치킨 가게 운영도 하고, 단란주점 청소도 했고요. 아이들 태어나면서 1년에 8개월은 일해서 생활비 벌고, 4개월은 변호사 시험 공부에 올인했어요. 경비 일은 짬짬이 공부하기에 좋아 오래 했습니다.”


-주독야경(晝讀夜耕)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야간 근무 많은 날은 수업 때 꾸벅꾸벅 졸아요. 다행히 대부분 아는 내용이라 시험은 잘 봤어요.”


-동기들이 자식뻘 아닌가요. 쑥스럽진 않던가요.


“전혀요.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부끄러워요? 동기들도 살갑게 대해줬어요. 경비 서다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고, 저를 ‘형, 오빠’라 부르면서 고민 상담 해오는 친구도 많았고요.”


로스쿨 졸업 후 또 좌절을 반복했다. 변호사 시험에 두 번 낙방했다. 올해 세 번째 도전해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실패에 인이 박였을 법해요.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아뇨. 변호사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젊어서부터 고민 들어주는 일을 좋아했고, 법 공부도 워낙 적성에 맞았어요. 좋아하는 일을 눈앞에 두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반평생 고시 생활은 가족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아빠로서 저는 말 그대로 빵점입니다. 공부하느라 아이들 놀이공원 한번 데려간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절 보러 고시반에 자주 놀러왔는데, 아들은 ‘아빠가 고시반에서 짜장면 사주던 게 아빠와의 유일한 추억’이라고 하더군요. 아내는 제 뒷바라지를 하느라 신발 공장에서 일감을 떼와 부업을 했어요.”


-가족이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제 고집이 워낙 세서 그런지, 아내는 반대한 적은 없어요. 다만 딸이 언젠가 얘기하더군요. ‘아빠, 포기하는 것도 용기 아닐까?’ 제가 그랬어요. 자기 의지에 따라서 자기 삶을 펼쳐나가는 자체가 행복한 삶이 아니겠냐고. 설사 마지막까지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다 해도 후회하진 않았을 겁니다.”


최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폐암을 앓고 계셨는데, 합격 소식을 전해드린 지 20여 일 만에 의식을 잃으셨어요. 몇 주 동안 투병하시다 지난 6월 돌아가셨죠. 그래도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20일은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그간 공부하며 읽었던 책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동차가 없어 모두 가져가긴 어렵다’며 로스쿨 때 썼던 책 30여 권을 가져왔다. 차상위 계층인 그는 지금 월세 7만원짜리 공공 임대주택에 산다. “느지막이 인생 2막이 열린 기분입니다. 이제 남은 삶은 그간 저를 위해 희생해준 가족에게 바칠 겁니다.”


/부산=유종헌 기자


[부산=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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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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