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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순박한 미소의 청년은 ‘화성 진범’이 아니었다..그를 믿은 단 한사람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윤성여의 무죄를 믿은 박종덕 교도관


1993년 10월, 가을날이었다. 충북 청주시 서원구에 있는 청주교도소 내 복도에 수형자(受刑者) 30여 명이 줄지어 섰다. ‘출력(出力·교도소 내 작업)’을 끝낸 뒤 ‘검신(檢身·신체검사)’을 받기 위해서였다. 신입 교도관 박종덕씨 눈에 한 남성 수형자가 눈에 띄었다. 키 160㎝를 조금 넘는 아담한 체구에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안녕하세요!”라고 소리 높여 인사했다. 그때였다. 고참 교도관들이 박씨 귀에다 대고 “쟤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범인이야. 살인·강간해서 들어왔어. 유심히 살펴봐”라고 했다. 믿기 어려웠지만, 박씨는 침착하게 이 남성의 몸을 수색했고, 별 문제가 없자 감방으로 들여보냈다.


충주구치소 박종덕 교도관(55·6급 계장)이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19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윤성여(54)씨를 처음 만난 날이다. 그때부터 2009년까지 17년 동안 두 사람은 교도관과 수형자로, 2010년부터 지금까지 11년간은 인생 선배와 후배 사이로 지내고 있다.


윤성여씨는 진범 이춘재가 잡힌 뒤, 지난해 ‘아무튼, 주말'<본지 2020년 9월 26일 자> 인터뷰에서 말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가 무죄라고 믿어준 교도관 한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윤씨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윤씨가 재심 끝에 무죄 선고를 받은 직후인 지난해 12월, 박종덕 교도관을 청주에서 만났다.

박종덕(왼쪽) 교도관과 윤성여씨가 지난달 28일, 충북 청주시에 있는 한 야외 공원에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있다. 이들은 박씨가 교도관이 된 1993년에 처음 만나 형·동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밝고 순해 보였던 연쇄 살인범

박씨는 1993년 27세 나이에 교정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지금까지 28년 동안 교도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그가 처음 부임한 곳은 청주교도소다. “처음 교도관들이 교도소에 배치되면, 보안과에서 근무합니다. 보안 의식을 불어넣기 위해서죠. 주로 하는 일이, 수형자들이 아침 8시 출력하고 나서 들어올 때 검사하는 겁니다. 담배나 칼처럼 소지해서는 안 될 물건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하죠. 신입 교도관으로 보안과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성여를 만났습니다.”


-윤성여씨 첫 모습이 어땠나요.


“피부가 하얀 데다가 한쪽 다리를 저는데,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순하고 싱그럽다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제가 2000명 넘는 수형자들을 봤지만, 성여의 첫인상이 가장 크게 남아 있어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강간·살인범일까’ 했지요.”


-처음부터 윤씨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니죠. 저도 교도관이 되기 전까지는 성폭행범이나 살인범이라고 하면 얼굴이 험악할 거란 선입견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성여는 늘 생글생글 웃고, 해맑았죠. 그렇지만 교도관이라는 직업 특성상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되잖아요. 강간·살인범 가운데 가면을 쓴 사람도 많고요. 그래서 처음엔 저도 믿지 않았어요.”



조선일보

박 교도관과 윤씨가 처음 만난 청주교도소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

-윤씨는 감옥에서 잘 지냈나요.


“성실하게 생활했습니다. 다만 돈(영치금)이 없어서 힘들어했어요. 성여가 교도소에 들어왔을 당시만 해도 쌀이 90%, 보리가 10% 섞인 밥이 나왔어요. 보통 수형자들은 오후 6시에 저녁을 먹는데, 그 밥이 넉넉지 않잖아요. 진짜 트림 한번 하면 다 소화가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영치금이 있으면 훈제 닭(현재 1개 2250원)이나 사과(3개 5400원) 등을 사 먹고 배를 채워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6시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요. 성여는 특히 스물두 살 혈기 왕성할 때 교도소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그런데 돈이 없었어요. 연락하는 가족도 없는 데다가, 무기수(無期囚)였으니 누가 도와주겠어요. 그래서 성여가 천주교 등 종교 시설에서 수형자들을 도와주는 분들(자매)을 좀 연결해달라고 했어요. 이분들은 교리를 가르치면서 수형자들에게 한 달에 1만원 정도 영치금으로 후원했거든요. 그래서 자매들을 연결해줬어요. 물론 저도 가끔 성여를 도와줬고요.”


-윤씨가 무죄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교도소에서 교도관은 수형자들하고 같이 사는 겁니다. 의식주(衣食住) 모든 것을 수형자들이 교도관을 통해 해결하잖아요. 계속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죠. 상담도 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그러다 보면 수형자들의 가정 상황 등을 다 알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약간 친해졌다 싶을 때 제가 성여한테 그랬어요. ‘네가 무죄라고 주장하는데, 너랑 나랑 이제 어느 정도 친해졌으니까, 솔직히 말해보라’고요. 그랬더니 자기는 정말 사건 자체를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경찰이 사건을 몰고 가서 여기에 와 있다고요. ‘이 자리에서 교도관님이랑 나랑 둘만 있는데,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했어요. 자기는 진짜 범인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럼 무죄를 확신한 건 언제쯤인가요.


“그렇게 5년 이상을 보내다 보니 차츰 얘기가 깊어졌습니다. 가족 얘기를 하더군요. 누나와 여동생이 있지만 사실상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특히 자기가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밝혀 떳떳해져야 하늘나라에 가도 어머니 볼 낯이 생긴다고요. 자기는 형사보상금 같은 거 관심 없다고도 했어요.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태도나, 말의 진정성을 고려했을 때 ‘얘는 정말 (범인이) 아니구나’ 생각했죠. 그때가 2000년쯤이었어요.”

박 교도관과 윤씨가 지난달 28일, 충북 청주시에 있는 한 야외 공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 모습.

이춘재 자백 듣고 펑펑 울어

윤성여씨는 2000년 8월 15일 무기수에서 징역 2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2010년이 되면 만기 출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가석방(假釋放)을 노렸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수차례 도전 끝에 2009년 8월 15일, 만기 출소를 1년여 앞두고 가석방으로 사회에 나왔다. 19년 6개월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였다. 윤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사회에 나간 뒤 처음 3년은 정말 적응이 안 됐어요. 마트를 가려고 해도 이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냥 집에 돌아왔어요. 오죽하면 ‘차라리 교도소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어요.” 사회에 나와서도 박씨에게 연락하며 조언을 구했다. 그때부터 박씨를 ‘선배'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윤씨는 현재 청주에 있는 자동차 시트 제작 공장에서 수십 킬로그램의 원단 옮기는 일을 한다.


-윤씨의 무죄를 밝히려 노력했나요.


“제가 28년 동안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재심을 신청한 친구들은 성여 말고는 못 봤어요. 그만큼 어렵잖아요. 성여는 교도소 안에 있을 때부터 저한테 재심을 신청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저도 아는 고등학교 선배 변호사 등을 만나서 방법을 알아봤죠. 하지만 모두가 진범이 나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성여가 재심 신청하겠다고 할 때마다 그 얘기를 해주면서 그랬어요. 수형생활 잘하고 있어라.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건강 잘 유지하면 가석방돼 집에 가게 된다. 사회로 복귀하면, 재심 밟기가 더 수월하고, 그때도 늦지 않는다고요. 그래도 성여는 늘 재심 좀 알아봐 달라고 계속 그랬어요. 그래서 ‘니 마음은 내가 충분히 아는데, 니가 내려놓지 않으면 힘들어’라고 말했죠.”


-진범이 잡힐 거라고 생각했나요.


“전혀 못 했어요. 워낙 큰 사건이었고, 20년이 훌쩍 지나도 잡힐 낌새가 없었잖아요. 또 세상에 저 말고 성여가 무죄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요. 포기하고 살았죠.”

지난달 28일 윤성여씨(왼쪽)가 과거 자신이 옥살이를 했던 청주교도소의 현판을 가리키며 박종덕 교도관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2019년 이춘재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가 대전교도소에 근무할 때였는데요, 화성살인사건 진범이 잡혔다는 소릴 곧바로 뉴스를 봤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였습니다. 이춘재가 1~2차 살인 사건은 인정을 했지만, 성여가 저질렀다는 8차 사건은 인정을 하지 않았다고 뉴스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여가 실망할까 봐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 8시40분쯤이었는데, 성여도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형님, 뉴스 봤어요’라고 묻기에 ‘응 그래 봤지’라고 답했어요. 성여가 또 ‘형님 재심 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성여한테 ‘니가 실망할까 봐 말 안 했는데, 이춘재가 니건은 자기가 했다고 안 했어.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내일 출근 잘 준비해라. 소용없어.’라고 해줬어요. 그러다가 4~5일쯤 지나니까, 점심때 포털사이트를 보는데, 이춘재가 8차도 자기가 저질렀다는 뉴스 제목이 떠있었어요. 읽어보니 맞는 거에요. 그래서 곧바로 성여한테 전화했다. ‘야 성여야, 이춘재가 니것도 불었어’라고요. 그때 성여가 깜짝 놀랐어요. 그때 성여가 처음 안 거에요. 저는 정말 눈물이 났어요. 저도 그런데 성여는 어땠겠어요. 처음 이춘재가 잡혔을 때 들떴다가 실망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춘재가 처음에 8차 건도 자기가 했다고 진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경찰이 좀 더 신중하게 확인해 본다고 해서 공개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돈 문제, 산전수전 다 겪은 성여가 잘 대처할 것”

윤씨는 진범 이춘재가 자백하자, 곧바로 재심을 신청했다. 수원지방법원은 1년여간 재판 끝에 작년 12월17일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윤씨는 억울한 옥살이에 따른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 윤씨가 선배라고 불렀나요.


“성여가 교도소에 있을 때 가석방 신청을 했지만, 계속 떨어졌어요. 가석방이 되려면 사회로 나갔을 때 보호해주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는지, 나가서 일할 곳이 있는지 등을 중요하게 봐요. 성여는 가족도 없고, 나가서 일할 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가석방이 계속 안 됐어요. 그래서 성여가 저에게 취업보증을 부탁했어요. 그래서 제가 청주에 있는 출소자를 위한 거주시설인 ‘뷰티플라이프’ 나호견 원장님에게 성여의 거처를 부탁했어요. 원래 그곳은 일할 수 있는 출소자만 받는다는 원칙이 있어서 장애인인 성여를 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 원장님한테 제가 책임질 테니까. 성여 숙식만 해달라고 했어요. 나 원장님이 ‘박 교도관 믿고, 성여를 받겠다’고 했어요. 2009년 광복절 특사로 성여가 가석방이 됐어요. 그때도 제가 ‘성여야 너 가석방 됐다’고 알려줬어요, 그때부터 성여가 저를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박종덕 교도관은 "성여(윤씨)가 모든 면에서 잘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한번은 저한테 돈(보상금)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은행원 출신 지인한테 연금 등을 물어봐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여가 전세 150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데요, 집이 중요하니까 아파트 하나 사고, 자동차도 한 대 사는 것 정도가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물론 큰돈이 성여에게 화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걱정 안 해요. 성여는 심지가 곧아요. 이쪽저쪽에서 바람이 불어도 오로지 한 곳으로 가는 친구입니다. 일을 해서 모은 돈은 대부분 저축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카 등록금을 대신 내줬어요. 천진난만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두 살에 살인범으로 몰려서 20여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어요. 감방에서 조직폭력배나 강간범, 살인범 등과 방을 계속 바꿔가며 생활했고요. 거기서 엄청난 트레이닝이 됐을 겁니다. 다만 반드시 결혼을 했으면 합니다. 저도 그렇게 조언해요. 큰돈을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요. 가정을 꾸려서 자손에게 넘겨주는 게 어머니에 대한 도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성여는 그러네요. ‘형님이 소개해주면 하겠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라고요(웃음).”


-윤씨가 유일하게 박 교도관만 믿은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수형자가 있으면 그들의 얘기를 진심으로 들으려고 노력했어요. ‘니 문제를 얘기해봐라’고 하면 이러 저러한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니 문제는 내가 봤을 때 이렇다’고 공감을 해 줍니다. 그러다 보니 저한테 모든 것을 얘기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성여 말고도 지금도 출소하고 나서 연락을 해 오는 친구들이 5명도 정도 됩니다. 한 친구는 아버지를 살해해 징역 12년 이상 살았다가 출소했는데, 1년 반째 자기를 바른길로 이끌어줘서 고맙다고 꾸준히 문자가 옵니다. 성폭력 사범이었던 친구도 있고요. 그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저는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어요.”


-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범죄자를 돕는 게 맞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필요도 있어요. 수형자들이 만약 제대로 반성을 하지 않고, 사회에 나가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가 있어요. 특히 성폭력 사범들은 재범률이 높아요. 만약 교도소에서 죄를 뉘우치고 잘 적응해 사회에 정착할 수 있게 하면, 피해자가 줄어들잖아요. 반대의 경우라면 다시 누군가의 자녀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커져요.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교도소에서 충분히 죗값을 치르고,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일보

지난해 여름 박종덕 교도관이 대전교도소에서 출소 예정인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취업ㆍ창업지원 교육을 하는 모습.

-교도관의 매력은 뭡니까.


“흉악범을 보면 겁이 안내냐고 물어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일이고 직업이잖아요. 사실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수용자들 이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조두순 보다 더 악한 수용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해도 교도소 안에서 말 안 듣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1~2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제가 근무하는 충주교도소에서는 450여명이 있는데, 문제 되는 수용자들은 2~3명 정도에요. 나머지는 교도소 규율을 대체로 잘 지키고, 생활합니다. 교도관처럼 다양한 일을 하는 직업도 없어요.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감시하고, 죗값 치르게 하고, 사회에 나가면 더는 사고 안 치도록 교육하고 관리하잖아요. 사실 저는 말주변도 없어서,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교도관들을 위해 나오게 됐어요. 사실 교도관들은 음지(陰地)에서 일을 다하다 보니 좋은 일을 한 것은 거의 잘 안 보입니다. 대신 드라마 등에서는 수형자한테 담배 팔거나, 특혜를 베풀거나, 그들을 때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최근에는 서울동부구치소 등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는 우울한 소식만 나왔죠. 소방관, 경찰관님들이 고생하셔서 선행도 바로바로 전달되고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국민 여러분이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청주=곽창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