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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정동현의 Pick] 겉은 바삭, 속살은 포슬… 아버지는 오늘도 양보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장어

조선일보

서울 공덕동 '함루'의 히츠마부시 민물장어./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 살 적에는 민물장어 구경도 힘들었다. 대신 동네 어귀에 있는 횟집에 가면 ‘아나고’라고 흔히 부르던 붕장어를 1㎏에 1만원이면 살 수 있었다. 붕장어 껍질을 벗긴 후 기계에 넣어 뼈째 얇게 썬 다음 탈수기에 돌려 여분의 수분과 피를 완전히 빼냈다. 그 포슬포슬한 회를 집에 가져와 흰밥에 부은 뒤 초고추장에 마늘, 고추 같은 것을 넣고 한데 비벼 온 가족이 나눠 먹었다.


민물장어를 맛본 건 나중에 대형마트가 생기고 난 후였다. 마트에서 산 커다란 장어살을 부침개 부치듯 넓게 펴서 전기 프라이팬에 올렸다. 껍질부터 굽고 3분의 2 정도 익으면 뒤집어 안쪽도 익혔다. 어느 정도 굽기가 마무리될 즈음 가위로 장어를 잘라 단면이 아래로 가게 세로로 세웠다. 달고 검은 시판 소스에 장어를 푹 담그고 생강채를 곁들여 입안 가득히 넣으면 삼겹살과 또 다른 짙은 기름기가 입가에 남았다. 부모님은 대부분의 장어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서울에서 장어로 유명한 식당을 찾으면 강남에 몇 군데가 손에 꼽힌다. 장어가 비싸다 보니 자연스레 돈이 모이는 곳에 전문점이 여럿 생긴 것이다. 방배동 ‘송강’은 양식 장어를 갯벌에 풀어 키워 자연산에 가깝게 만든 ‘민물 갯벌 장어’를 판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쉽게 약속을 잡을 만한 단위가 아니었다. 민물 갯벌 장어 맛의 대부분은 식감이었다. 위를 거쳐 장 끝까지 이어지는 선 굵은 장어 특유의 기름기도, 살을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은근한 단맛도, 실상 한국 사람이 사랑하는 탄탄한 식감을 즐기기 위한 곁들임이고 추임새였다. 꿈틀거리는 장어의 근육질은 이에 닿을 때마다 탄력 있게 반응했다.


서울을 벗어나 임진강 근처 경기도 파주까지 올라가면 ‘갈릴리농원’이 있다. 이 식당은 근처만 가도 장어 굽는 냄새가 났다. 공설 운동장보다 조금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체육관 같은 식당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일을 하듯 장어를 굽고 먹었다. 사람들이 멀리 파주까지 모여드는 이유는 범상치 않은 크기의 장어, 그리고 가격이다. 장어 양식과 식당을 동시에 하는, 즉 경영학 용어로 수직계열화를 이룩했기에 다른 식당이 따라오기 힘든 가성비를 지녔다. 같은 값이라 할지라도 장어 크기가 아예 달랐다. 특이하게도 이곳에는 밥과 김치가 없다. 덕분에 사람들은 소풍 가듯 밥과 김치를 싸가지고 온다.


지옥불 같이 타오르는 숯불 위에 장어를 올리면 곧 하얀 김이 올라왔다. 큼지막한 가위로 장어를 툭툭 잘라 돼지고기 먹듯 푸짐히 입에 밀어 넣었다. 흙 냄새 같은 잡내가 전혀 없었고 단단한 육질은 태곳적 사냥을 하던 원시적 본능을 자극했다. 주위 사람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모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온몸에 연기가 배어 들었다. 장어를 먹는 것이 하나의 의식 같기도, 스포츠 행사 같기도 했다.


서울 공덕동으로 오면 일본 나고야식 장어 덮밥 ‘히츠마부시’를 파는 ‘함루’가 있다. 히츠마부시는 특이하게도 먹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첫 번째는 온전히 장어구이와 밥만 먹는다. 3분의 1 정도 먹고 나면 나머지에 와사비(고추냉이)와 쪽파 등을 섞어 먹는다. 마지막 남은 3분의 1에는 다시물(맛국물)을 부어 훌훌 떠먹는다. 꼭 따라 할 필요 없이 취향대로 먹어도 되지만 이 순서를 지켜 먹는 것 또한 재미다.


한 번 쪘다가 구운 장어는 겉이 과자처럼 바삭하고 속은 포슬포슬 부드러웠다. 하얀 밥 위에 장어를 올려 한 번에 입에 넣으면 검은 초콜릿을 먹는 것처럼 달고 열띤 기운이 몸에 퍼졌다. 와사비를 살짝 올리면 단맛 위에 쌉쌀한 포인트가 생겼다. 그 후 따뜻하게 우린 다시물을 밥에 부었다. 간간히 씹히는 쪽파의 청량함, 온화한 다시물에 풀어진 밥알의 싱그러움이 하나가 되어 천천히 몸을 채웠다.


내 앞에 앉은 아버지는 이 모든 과정이 어색해 보였다. 부자가 단둘이 식사한 것은 몇 년 만이었다. 아버지 대신 다시물을 붓고 와사비를 올렸다. 아버지는 “괜찮네”라는 말 몇 마디를 덧붙이며 밥 위에 올라온 장어 중 반절은 또 나에게 미뤘다. 그러고 말했다. “네 엄마도 장어 좋아하는데 나중에 같이 와야겠다.” 지금껏 모르던 사실이었다. 나중에도 모를 부모의 마음이었다.


# 송강: 갯벌장어구이 7만5000원, 민물장어구이 4만5000원.


# 갈릴리농원: 민물장어 5만8000원(1kg).


# 함루: 히츠마부시 민물장어(나고야식 장어덮밥) 3만7000원, 히츠마부시 바다장어 2만3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